헌책방을 찾아 헤메이게 만들던 책,
절판되었던 책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복간되었네요..
나오자 마자 서점에서 구입했어요.
스무살, 가슴 뜨거웠던 그 시절
오늘처럼 비 내리던 여름날..... 울면서 읽었던 글이랍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이 무너지는 글..
이 글을 읽고 아직도 눈물이 나는걸 보면..
아직 제 가슴이 그렇게 무뎌지진 않았나 보네요..
그 해 첫눈이 펑펑 내리던 밤
엉금엉금 기어가는 마지막 호송차는 만원이었지요
그 바람에 규정을 어기고 나는 그 여자 옆에 앉혀지게 되었습니다
눈송이 날리는 창 밖만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그 여자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검은 눈이 어느덧 젖어 있었습니다
자기는 아이 둘 가진 노동자인데 교통사고로 들어와서
합의를 못 보다가 오늘에야 나가게 되었다고
내 시를 노래로도 부르고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항상 죄송하고 마음 아팠다고·····
눈이 내리니 어두운 세상도 참 고와 보이네요
아까 내내 창 밖을 내다보며 저 이런 생각 했어요
죄수복에 포승줄 묶인 내 모습이
차창에 비치는 게 그렇게도 싫었는데,
아니야 아니야 나야말로 이 모습 이대로 죄인이구나
난 지금까지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노조에도 참여하고 가진 자들 욕도 하고
잘못된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고 원망도 많았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다 도둑놈 마음이었어요
죄가 어디 홀로 지어지는 건가요
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죄짓고 사는 건데
저들의 큰 죄 속에는 제 자신의 죄가 스며들어 있고,
제 욕심과 비겁함과 힘없음이 저들을 더 크게
더 거칠 것 없이 죄짓도록 부추겨온 건데요
제 자신이 먼저 참되고 선하고 정의롭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 평화와 정의를 바랄 수 있겠어요, 도둑 마음이지요
가진 자들의 탐욕과 부정부패는 사납게 비판하면서도
왜 제 자신의 이기심과 작은 부정들은 함께 보지 않았을까요
왜 네 탓이오 네 탓이오만 외치고 제 탓이오가 없었을까요
‘제 탓이오 제 탓이오 그리고 네 큰 탓이오!’
라고 해야 옳은 게 아닐까요
왜 저는 못 갖는 한이 아니라 안 갖는 긍지를 지닌
떳떳한 인간으로, 진실로 당당한 노동자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지 못했을까요
첫눈 내리는 오늘 밤에야 제가 자유의 몸이 된다니까
지난 삶이 부끄럽게 돌아봐지네요
좋은 세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전 솔직히 공짜로 바란 거예요
좋은 세상, 좋은 세상, 하면서도 사실은
가진 자들의 부귀와 능력을 시샘하면서
좋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몫의 행복을 훔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며 살아온 겁니다
선생님을 뵈니 더욱 죄송하고 자꾸만 눈물이 나네요
어디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나요, 단번에 오나요,
우리 빼앗긴 게 한꺼번에 되찾아지나요
설사 빼앗긴 돈과 권리는 되찾을 수 있을지라도
빼앗긴 삶과 인간성과 제 상한 영혼은 어디에서 찾을까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인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어요
좋은 세상은 어찌 보면 우리 안에 이미 와 자라고 있는 건데,
지금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착실히 힘 모아나가면
사실 저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데
선생님, 저 이제 나가서는 잘 살겠습니다
좋은 세상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제 자신과도 싸우면서 그 힘을 보태겠습니다
마치 고해성사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다짐하던 그 여자
서울 구치소로 가는 어두운 밤길에
함박눈은 가슴 미어지도록 흐득흐득 내리고
느리게 기어가는 만원 호송버스 안에서
오누이처럼 스스럼없이 어깨를 기댄 채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순결한 연꽃송이 같은 말씀들·····
무기징역 선고받고 돌아오던 내 마음은
환하디 환한 슬픔이었습니다
운명의 그날 밤, 산처럼 무너져내린 그날 밤!
선생님, 제 마음속에 품어온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정말 우리가 바라는 그런 좋은 세상인가요?
그렇게 평등하고 경쟁 없이 편한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회에서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사회가 누구 힘으로,
어느 세월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언제쯤 이기적인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이
그런 성인으로 변화하겠습니까?
그 여자의 소박한 물음 앞에서
나는 산산이 무너져내리고 말았습니다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온 한 여자가
온 삶으로 던져오는 화두 앞에,
태산처럼 육박해오는 준엄한 심문 앞에,
아아 나는 꼼짝없이 무너지고 깨어졌습니다
선생님 저는요, 선생님처럼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며 살지는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맞벌이로 잔업까지 뛰지 않으면
매달 카드 결제와 시동생 학비 지불,
친정 어머님 병수발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머리에 이고 살아가야 할 제 인생의 의무입니다
제 생활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제 인생이 참되고 보람찰 수 있을까요
일 년에 한두 번 임금인상 때 반짝하고 마는
노조활동 같은 거 말구요 회비 잘 내고 서명하고
집회나 시위 있을 때 참여하는 그런 거 말구요
제 일상생활 속에서 제가 주인이 되어서
제가 살아 있다는 느낌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나이 들수록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을 닮아가면서
생활 속의 작은 걸음들이 곧바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그런 실천이 무엇인지요
정말 저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고 싶어요 선생님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가슴 미어지게 눈은 내리고,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변명도 비껴섬도 없이
그저 정직하게 산처럼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게 내가 할 일이고 남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산덩이만한 패배와 무너짐, 마지막 한 껍데기까지
철저하게 깨어지고 쪼개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지난 7년 동안 나는 이 벽 속에서 죽음을 살았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가’ 를 찾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참혹했습니다
그날 밤 그 여자가 내게 내린 화두가 나를
죽더라도 정직하라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이렇게 아픈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게 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야
내 안에서 싹이 트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야 고요한 희망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그날 밤 하늘이 내게 보내신 그 여자 앞에
자신 있게 다시 서는 날까지
나의 기다림과 정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박노해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그 여자 앞에 무너져내리다
비내리는날 조회수 : 558
작성일 : 2011-07-14 21:49:20
IP : 211.174.xxx.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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