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백제가 송파에 남긴 최고 선물,몽촌 토성
현재 남한산성의 연주봉 옹성에 서있는 나~~
타임 슬랩으로 올림픽 공원 내 몽촌토성으로 순간 이동.인근 풍납토성과 더불어 초기 한성 백제의 도성으로 여겨지는 곳.
왔으니 2키로 '토성 한바퀴' 해야죠
저 위가 가장 높은 곳으로 망월봉이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우측 보이시죠?
한성 백제 도성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발굴.
뒤에서 걷던 60대 후반 아저씨 한분이 그러네요.
"언제 까지 땅만 파고 있을 거야?"
피가 솟더라는.고대국가 법궁을 찾는 발굴의 의미를 모르는 걸까? 외면이겠지.
문득 생각난다.
몽촌토성이 송두리 째 날라가 버릴 위험의 순간.
한강 하중도(河中島)였던 잠실도와 부리도가 매립될 때 이곳 몽촌토성의 흙들을 사용하려 했다는.여의도를 매꿀 때 선유도와 밤섬을 송두리째 폭파해서 사용했듯이.일부 역사학자들의 노력으로 겨우 막아낸 결과가 지금의 몽촌토성.
앞 호수는 토성 초기부터 있었어요.
방어책으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성내천 물을 끌여들인 것.그래서 저 길 발굴하면 당시 유물이 나올거라는.경주 안압지처럼.
토성의 동쪽은 성내천을,북쪽은 성내천 물을 끌여들여 해자(垓子) 사용했고.
해자란 성곽 주변을 도랑으로 파내고 물로 채운 것.
동문이 있던 자리로 성곽이 끊겼네요
토성 남동쪽에서 더욱 가까운 저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핫했고 문화적으로 유희한 그 실례 하나.숙종 때 축성된 북한산의 북한산성이 당시 지식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였던 것처럼.
아래는 겸제의 경교명승첩에 실린 송파진(松波津)
한강 북쪽에서 송파나루를 그린 것으로 남한산성이 선명하네요.우측 전각은 청태종의 삼전도 비각.
성곽 위가 유독 검푸르죠? 노송들을 표현한 것.
인조는 산성을 정비하면서 소나무 식재를 강조.서문~북문 성곽 길을 걸을 때면 귀는 송뢰(송풍)로,코는 솔향으로 호강합니다.
겸재는 안보이는 산성도 봤지만 나는 핸드폰으로 줌인
더 줌인
보이시나요?
남한산성(남한산)의 일부 성곽이 보이고.보이는 성체는 연주봉 옹성.남한산의 지맥이 한강 향해 낮은 포복으로 북진하다 송파강(예전엔 이리 불렀음)에서 마지막 용트림이 바로 몽촌토성.고도 1백미터도 안되지만 정상 망월봉에 서면 서,북,동쪽이 훤히 들어와요.
ㄷ
당연 몽촌토성에서의 비상 도피처는 남한산성.남한산성의 시작도 한성 백제 부터.그리고 남한산성과 몽촌토성을 연결하는 하천이 바로 성내천.지금 부터 성내천을 거슬러 오릅니다.
좌 아산병원으로 성내천의 최하류
한강과 만나는 성내천의 하류는 이렇게 직선.
원래는 돌고 도는 곡류천이었으나 잠실도를 매립하면서 난도질한 것.성내동이 성내천에서 유래하지만 정작 성내천은 성내동을 흐르지 않아요.이유는 현대에 와서 성내천 하류를 완전 직선화 했기 때문.예전엔 구불구불 성내동과도 맞닿아 흘렀다는.
우측으로 몽촌토성 동사면이 보이고
성내천은 몽촌토성의 동북쪽을 흘러 천연 해자 역할.
꿩도 보이고
1시간 천변 따라 오르면 5호선 마천역이 나오고.
트레킹으로 좋은 천변 길.이후는 복개되어 있고.도로로 올라와 10여분 걸으면 남한산 초입.
마천역서 10분 거리 등산로 초입
수차례 남한산성엘 왔고 팔당 쪽으로 가기위해 지나치기도 했지만 그 때는 차로.정식으로 등산하기는 이번이 처음.아니다,40년 전 군장 메고 소총 어깨에 걸고 오른 적이 있었지.그때는 산행이 아닌 고행.
30분만에 연주봉 옹성(甕城) 도착.
보통 마천서 출발하면 서문으로 들어가지만 길을 잘못 들었어요.연주봉 옹성 끝에 서면 동에서 서까지 한강변이 파노라마로 들어옵니다.그래서 봉수대가 있었고.최종적으로는 남산 봉수대와 응대.
타임 슬랩에서 현재로 귀한~~~
저 아래가 백제한성(漢城百濟),즉 한남위례성이 있던 수도.기원전 18~475년 까지니 거의 500년.
그 기간이 공주,부여 시기보다 무려 두배.
앞으로 이어지는 직선의 녹지 축 보이시죠? 남한산성의 산세가 몽촌토성 까지 쭉 이어졌다는 얘기.
롯데타워 우측으로 좌우 길게 보이는 녹지가 방금 놀다온 몽촌토성.나는 지금 성내천을 거슬러 남행(南行)해 이곳 남한산성까지 왔고.
자,눈맛도 시원하니 더 보죠.
멀리 중앙이 북한산 능선,우측이 도봉산...그러니까
조선은 개경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동서로 성체 처럼 뻗은 도봉~북한산을 천연 방어막으로 삼은 것.
우측 중앙 짓푸른 산군이 망우산~용마산~아차산.
아차산 아시죠? 아차산 하면 아차산성의 고구려가 떠오르고.아차산 일대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 부자의 한강 최남단 전초 기지로 수십개 보루(堡壘) 터가 남아 있고.보루란 작은 성으로 군. 진지(최후의 보루 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망우산에서 아차산 까지 남북으로 길게.사진만으로도 당시 상황이 충분히 그려지네요.아차산의 고구려 병사 VS 풍납토성,몽촌토성의 백제군의 대치.
실제로 광개토대왕의 1군은 서해~한강 따라,2군은 아차산에서 들어왔고.결국 아들 장수왕에 의해 풍납토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은 몽촌토성으로 피신하다 문루 아래서 죽임을 당했고(삼국사기에서 유추).두 성은 직선으로 1키로 거리.
1백년 전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였으니 장수왕이 복수한 거네요.그 근초고왕의 무덤이 바로 석촌동 고분군 중 하나인 적석총(추정)
이렇게 송파에 녹지가 많은 이유는 몽촌토성,석촌동 고분군,방이동 고분군 등 한성 백제의 음덕이라는.
우측 아래 단독주택지 보이시죠?
마천동입니다.남한산 바로 아래라 하늘을 문지르는 摩天인줄 알았어요.지금 보니 말이 거닐어 노는 馬川이더라는.실제로 말을 키우고 했답니다.산성 가는 행인 상대 주막에 역참도 있었고.산 위에서 보니 확실히 남한산이 내린 복된 곳.좌 아파트 신축 건너는 거여동.크게 여유롭다는 뜻이니 마천이나 거여는 살기 좋았던 곳.
앞 아파트 신축 구역이 위례신도시의 동쪽 끝으로 바로 아래 산록은 하남시.마천역에서 남위례역,복정역까지 트램(노상 전차)으로 위례신도시를 동서로 관통하고.그 위례신도시 이름은 백제 한성인 하남위례성에서 온 것.하남시 유래도 하남 위례성에서.
그리고.
연주봉 옹성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이성산성에 닿아요.이성산성? 또다른 하남위례성으로 여겨지는 곳.또는 외성으로.그러니 비상시는 당연 능선 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왔겠죠.
본성과 연주봉 옹성의 연결 암문.
세월의 흔적이 역력.볼수록 멋스럽네요
북동쪽으로 하남시가 보이고
바로 아래로 교산신도시가 들어섭니다.
상-하사창동,춘궁동 등 아주 유서 깊은 동네로 조선 초기엔 광주목의 읍치(邑治)가 저기에 있었고.지금도 광주 향교가 있고.길게 뻗어 내린 능선 끝,누에같은 녹지가 이성산성.아래는 한강~덕풍천을 통해 북문으로 들어가는 핵심 물류 길.
우측 높게 검단산,너머가 예봉산.두산이 만들어낸 협곡에 팔당댐이 들어섰고.
암문
실제로 앞에 서면 감탄이 절로나요
현존 산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고.그래서 세계문화 유산 등재.
암문(暗門) 축성이 예술
주원장 명나라와 이성계 조선은 건국의 시기를 같이 한다는.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는 이괄의 난을 겪은 후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증축.명나라가 쇠하고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는 인조 4년 침공하니 정묘호란.인조는 광화도로 피신.후금은 강화도서 양국간 형제의 맹약을 하고 철수.명나라 부터 조선을 분리시키기 위한 전략.
그러나 임진왜란 파병 고마움에 여전히 친명사대 고수하니 10년 후인 1636년 재 침공하니 병자호란.기세가 파죽지세.북방서 도착한 장계에는 개성이라는데 이미 임진강을 넘고 파주를 지났고.급히 왕자와 종친은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세자,문무백관이 뒤를 따르기로.그러나 숭례문에서 부터 길이 막힘.용골대 휘하 기마병이 이미 김포에 진을 쳤기 때문.어쩔 수 없이 어가는 남한산성으로 향하니 때는 추운 정월 달.어찌나 급한 파천이던지 행궁은 임금을 맞을 준비도 안되었고.마루를 당상관들이 닦았다는 얘기도.47일 간 농성.그리고 송파강 삼전도서 항복식.
중앙.
성안의 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水口)도 보이고
동쪽으로 검단산이 보이고.
백제 사람들은 검단산을 숭산(崇山)으로 여김.
삼국사기에 나온 얘기.해가 검단산 위에서 떠올라서.
북문(北門)
지대가 낮고 한강과 가장 가까와 물류는 북문을 통해.
아래로 덕풍천이 흘러 하남시청 ~ 미사리 조정 경기장을 거쳐 한강으로.
아랫 마을이 상사창동,하사창동,춘궁동.사창(司倉)이란 관의 창고를 의미.남한산성 군량미의 비축 기지였으나 병자호란 때 미처 옮기지 못해 몽땅 청군 군량미가 되어버림.당연 마을 이름도 남한산성에서 유래.
그리고 조선군 정예병 3백명이 북문을 빠져나가 싸웠지만 전멸.당시 최대 전투.이전 청군 50여명을 죽인 전과도 있었고.
동으로 이어지는 성곽 라인들.
성곽 위로 푸른 하늘이 걸리고 군데 군데선 신록에 묻혀 숨었네요.
지금부터 연주봉 옹성을 출발해 성곽 따라서 동~남~서로 12키로 한바퀴.
뒤돌아 보니
저 봉우리가 남한산성의 최고 지휘부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淸凉山,483 m) 정상.
그 수어장대 옛사진으로 볼까요
현~~
장대(將臺)는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지휘소.
서장대는 영조 때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 편액을 守御將臺,안쪽은 無忘樓라.두 편액은 지금도 걸려 있고.無.忘.樓....그때의 수치를 잊지말자는 뜻.
숙종,영조,정조는 여주에 있는 효종,세종 능을 매년 참배했어요.오는 길 지금의 구리시 동구능(태조능이 여기에)을 들른 후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행궁에 묵고 군사훈련을 참관했다는.
옛~
남한산성은 예나 지금이나 유명 유람처
서장대는 가장 높아 송파강의 청군 진영이 한눈에 들어오고.47일 간 농성 중 비극의 정점을 이루는 곳.
인조는 이곳에 올라 성첩의 군사들을 위로하기도.또한 장대에 올라 송파강 청의 진지도 살폈죠.인조실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명이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에 올라 동쪽으로 월봉(月峯)을 바라보았다./
30만은 과장이고 3만정도.성안은 백성 포함 1만5천.
암문도 보이고
평시에는 드나들고 비상시에는 돌로 막아버리고
구은 벽돌을 석회로 콘크리트한 성 위의 여장(女墻) 보이시죠.적으로 부터 아군을 숨기고 공격을 원활하게 하기위해 성 위에 쌓은 담.
성 뿌리는 지상에 튼튼히 뿌리박고.
봉암성 입구
남한산성은 하나의 성이 아녀요
후대에 주성에다 봉암성,한봉성,신남성 등 몇개를 덧대여 보강했다는.
성문을 빠져나오니 또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대부분은 숨겨진 보물도 모르고 동문으로 직진.
가장 행복했던 순간~~
옛 성곽이 허물어진 채 그대로.
봉암성은 저 정상(남한산) 너머 까지 이어지고
딸린 성이지만 전장 2키로가 넘는다는.
내겐 봉암성이 남한산성 제1경~~~
좌우 잘룩한 한거 보이시죠?
본성에서 지형(능선) 따라 덧대여 2차성을 쌓다보니.
힐링 힐링 하는데 이 길을 걷는 것 보다 더하랴
무리지어 피어난 각시붓꽃
저기가 봉암성 정상(남한산)
봉암성 동쪽 끝자락.
중요 지역이라 외동장대도 있었고.
멀리 검단산이 보이네요.
봉암성은 손보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남한산 표지석.
실은 남한산성은 두 산의 연결이라는.이곳 남한산과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그런데 이곳이 더 높아요.그래서 청군은 이곳에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안 1만5천이 농성중인 행궁에 포를 쏴댔다는.그래서 숙종 때 보강 차원에서 이곳에 봉암성을 축성.그것만 아녀요.봉암성 인근 한봉 까지 능선 따라 축성하니 이게 바로 한봉성.
이건 또 뮈여?
남한산 바로 뒤 벌봉에서 만난 산양들.
꿈인지 생시인지 지금도 미스테리!
다시 '남한산성 산양' 하며 검색해 봐요.그런데 여전히 오리무중.산양 자연 서식지는 설악산(천여마리).월악산에도 산양이 있는데 이들은 설악산서 가져와 방사한 것.도심 근교 남한산성에????
무너진 산성 보이시죠?
정체는 숙제로 남기고 본성으로 귀향합니다
멀리 광주시가 보이네요
그 너머가 이천,여주.
다시 주성서 빠져나오니 신지옹성~
신지옹성은 장경사 승병 관할.
남한산성은 두 구역으로 나눠,남쪽은 조선정규군이
동북쪽은 승병이 축성했다는.8도 승려들이 구역을 도별로 나눠서.
포대 보이시죠?
천자총통을 설치했네요.거북선의 그 천자총통.
장경사
남한산성 축조 때 9개 사찰 중 하나.마당 앞으로 성곽이 지나요.지금은 비구니 사찰.확실히 비구니 사찰은 꽃들이 많고 정갈합니다.
장경사 앞 암문.
저 암문은 한봉성과 연결되어 있고.수구도 보이고.
이제 동문으로 향합니다.
황진이가 재상집 아들 이생과 금강산 유람하고 귀경 길에 남한산성에 들어왔어요.그리고 동문 바로 위 송암정에서 놀았다는 야사도 있고.
동문
남한산성서 가장 낮은 곳.
평지 계곡이라 당시 매복한 청군과 국지전이 자주 벌어졌고.물이 흘러 나가고 주검이 실려나가는 산성의 배출구.신유박해 때 3백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된 곳.
그도 그럴 것이 동문을 나서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천진암이 가깝고.성 바로 밖이 엄미리,불당리.더 나아가 팔당의 퇴촌면,남종면.
동문 앞 흐드러진 돌배나무 꽃은 그들의 영혼이려나
이하는 남쪽 성곽 라인~~
완만한 산세라 견교하게 쌓았어요.
캬아~~~~
성체에 기대어 인스타 등에 사진 찍어올리면 시니어 모델로 스카웃 될지도
남한산성의 美 제 2경
보통 남한산성에 오면 남문~서문 거쳐 북문으로 만족하지만 반드시 남쪽을 들러야.여기서는 성안이 아니라 성밖을 걸어야하고.성안에선 멀리 전망을 보고 밖에선 축성의 견교함을 봅니다.
병꽃
길게 뻗은 옹성...천자총통 포대를 설치했고.
바로 앞산이 검단산..팔당의 검단산 말고.당시 청군이 저 검단산에 홍이포를 설치했다는.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졌고.삼남(三南)의 근왕병들이 북상하다 검단산 인근서 저지당했고.숙종 때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저 검단산 정상에 작은 성을 세우니 바로 신남성.
검단산 너머는 성남시와 광주시를 잇는 이배재와 갈마치고개.갈마치 위로 3번 국도가 지나고
대단한 공력
지형이 넓은 능선으로 완만하고 이어져 옹성을 3개나 축성했다는.
포대의 타격점은 맞은편 검단산
성곽 바깥 길.
스틱으로 석축 크기 비교
축성이 정밀하고
성밖도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어요
옥수수 알을 차곡차곡.
세월 먹은 성곽들은 보는 이의 정서를 편하게 합니다
성 두께가 10미터가 넘고.
남문(南門)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380년 전 이문을 통해 들어왔고
서문으로 향합니다.
바로 아래 성남시 수정구 거처 분당~죽전~수지~기흥~동탄 라인.
뒤돌아 보니
성체는 드문드문 신록에 숨었고.
바로 아래가 위례신도시.
위례신도시는 성남시,송파구,하남시 복합이다 보니 동사무소도 각각 셋.
그때 그시절이 생각나~~
전씨는 80년 12.12 반란 후 81년 대통령에 올랐고.
가장 큰 저항 세력은 대학.그래서 생각해낸 게 입학생은 문무대 입소,2학년 때는 전방 입소.각각 1주일.
그 첫 대상이였던 나.스쿨버스를 타고 잠실 석촌호수(그때는 롯데도 없었고) 건너고 허허벌판 논길 지나(지금의 송파대로) 내렸던 곳이 육군학생군사학교(rotc) 연병장(현 남위례역 맞은편).마지막 전날은 완전군장 야간산악행군.그 산이 바로 남한산성의 청량산이요 최종 집결지는 수어장대 앞.5백미터 밖에 안되지만 왜 그렇게도 지루하고 화나고 힘들었던지.이후 산에 대한 염증은 30년 넘게 이어졌고.이렇게 40년 시차를 두고 남한산을 두번 올랐지만 그 성격과 느낌은 극과 극.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의 숙명이려나요.이후 남한산성 아래는 온통 군사 관련 시설이 들어섰다는.육군학생군사학교,육군군사행정학교,군체육부대,특수전 사령부(서울의 봄에서 9공수가 반란군 진압하려 출동하다가 회군한 그 부대),美그린베레 파견대,군 관련 골프장,심지여 군교도소(속어로 남한산성이라 불렀음.현 산성역 옆 한국폴리텍 캠퍼스)까지.
지금은 일부 골프장만 남기고 죄다 지방으로 이전 하고 위례신도시로 변천.
수어장대 아래 숭렬사
백제 시조 온조왕을 기리는 곳.당시 사람들은 남한산성을 처음 쌓은 게 백제라고 믿었다는.초기 백제 위에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할 때 한강 이남 전초기지로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그 주장성이 이곳 남한산성.이어 인조,숙중,정조의 증축을 거쳐서 현 모습.이처럼 1천년 넘는 시대적 축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된 한 이유이기도.
사당은 인조 때 세운 후 숭렬사라는 사액은 정조가.
서문 일대는 일몰,야경 촬영지로 큰 인기.
해질녁엔 수십명 사진작가들이 자리 선점해있고
서문(西門)
당시에는 누각이 없었고.
인조는 큰아들 소현세자와 함께 저 서문을 빠져 나와
송파강 삼전도로 향했고.
서문 밖.
급경사에 빙판길 서문을 나온 인조는 거여,마천을 지나 송파강 삼전도로 향하고.말이 서문이지 개구멍.그래서 남문은 south gate이지만 서문은 west door.
여기서 삼전도는 섬 島가 아닌 건널 渡로 나루터.임진강의 벽란도 처럼.
평상복 인조는 단 위에 앉아있는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배'(三拜九叩頭拜)하고.단에 올라 태종이 내린 술을 황망히 마심.三拜 九叩頭拜....한번 절하고 3번 이마를 바닥에 찍고 이를 3번 반복.
인조실록은 이렇게.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는데 백관들이 앞 다투어 어의를 잡아당기며 배에 오르다.사로잡힌 부녀들이"우리 임금이시여,우리 임금이시여,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짓다.인정(人定) 때가 되어 창경궁 양화당으로 들어가다./
며칠 후 용골대로 부터 서신이 도착합니다.황제를 전전송하라는.인조는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부녀자 사이로 삼학사 홍익한,윤집,오달제,소현세자,봉림대군도 보았다는.
나도 서문을 빠져나옵니다.
경사가 심해요.그때 패배자들 투항길은 그래서 더 힘들었을 터.마천역서 전철을 탑니다.지금 내 기차는 삼전도 아래를 지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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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 네장
항공사진
좌 너머가 북으로 송파구(서문),우는 하남시(북문).
성내 좌가 남문(성남시),우측 계곡이 동문(광주시).
앞쪽으로 남쪽 성곽이 뚜렸하고.모종삽쳐럼 길게 나온 게 옹성. 당시엔 남한산성 동서남북 일대가 모두 광주목.
한말 성 안(광주시 남한산성면 성내리) 사진.
좌 하얀 실선이 남쪽 성곽.지금은 숲으로 우거졌지만 논밭으로 개간된 당시 남쪽 성곽 주변을 보니 간고했을 삶을 느끼게 하고.
사진 아래쪽 행궁 보이시나요?
인조는 47일 농성 중 저기서 묵었고.벌봉,한봉,검단산에서 쏜 홍이포 탄환이 행궁 외전 지붕을 뚫고 박혔다는 기록도 있고.행궁이 있으니 당연 광주목은 승급해 광주 유수부(지금의 특별시 개념)로 승격.이전에 광주목의 읍치는 춘궁동(현 하남시).
남조선 후기 남한산성도(圖)
좌 위쪽 기계톱 모양의 연주봉 옹성,우측 상단 봉암성,그리고 봉암성서 우측으로 능선 따라 길게 한봉성.아래쪽으로(남) 3개 옹성.지도를 찬찬히 보면 많은 게 보이고.옛 지도는 신기해요.회화적 표현이 들어가 이해가 쉽다는.
삼전도비의 수난.
당태종이 가면서 내린 지시 하나가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라는 것.문장은 당연 조선에서 작성해 오면 본인이 심사한 후 결정.당연히 누가 쓸 것인가를 놓고 조정은 대혼란.우여곡절 후 수년만에 완성.청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바로 삼전도 비.공식은 대청황제공덕비(淸太宗功德碑).비 크기만도 2미터가 넘고.탑본해 가서 황제에 재가 받았다는.비는 같은 내용을 만주어,몽고어,한문 세 언어로 새겼기에 사라진 만주어 연구에 절대적으로 중요.나폴레옹의 로제타 스톤 처럼.
이후 1980년 까지 수차례 옮기고,홍수로 잠기고,뭍히고 하다 지금은 어디에? 아래~~
현 삼전도 비는 있는 듯 없는듯 그 많은 석촌호수 인파들도 아는 이 거의 없고.더 정확한 위치는 매직 아일랜드와 현 위치 중간 호수 안.그러니까 현 삼전도 비가 있는 언저리가 한강 남쪽 강가 였다는 얘기.그땐 잠실이 섬이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