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토) 새벽 양재 출발해 홍천군 철정휴게소 도착.
양양고속도로 없고,길(44번 국도)도 2차선이던 그 시절.
이곳에 이르면 홍천강을 바라보며 '설악이 가깝겠구나...' 하던 그 추억의 철정 휴게소
30분만에 등산 초입 설악산 장수대 분소 도착
오전 10시 산행 시작
맞은편으로 삼형제봉,가리봉(1519),주걱봉이 보이고.가리봉은 남한에서 10번째로 높은 산.
/우(右)로부터 몸을 제대로 틀어올려, 기껏 뾰족해보자 기껏 솟아보자 한 봉(峰)이 가리봉(加里峰)이요,
그 다음으로 끝은 칼날 같은 선(線)으로 삥 돌리고도 안으로 휘우듬이 패어 밥을 푼다면 한번에 십만석(十萬石)은 퍼낼 법한 것이 이곳 특유의 ‘주걱봉’이요,
또 다음으로 키도 맞추어 대중소(大中小)인 것이 부명(父命)을 받자와 공수(拱手)하고 선듯함은 물을 것도 없이 ‘삼형제봉(三兄弟峯)’입니다/
-노산 이은상 설악기행-
아랫길이 44번 국도 한계령길
저 아래서 올라왔고
V 홈이 한계령 휴게소(1004).
너머는 양양군,이쪽은 인제군
예전엔 일대를 설악이 아닌 한계산이라 불렀네요.
왜?
장수대 초입에 통일신라 때 세워진 한계사가 있어서.
한계사는 백담사 전신으로 자주 화재가 나자 현 백담사로 옮긴 것.
대동여지도에도 일대는 설악이 아닌 한계산으로 나옵니다.
한계사터 삼층석탑.
통일신라 시대 작품.
한계산,한계산성,한계령,한계리는 다 여기서 유래.
한계산은 조선조 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
당시 찾아온 명사들이 읊은 시를 철재 시판에 새겨놓았네요.
대승폭포가 보이고
대승폭포
80미터를 수직하강
옛날 부모를 일찍 여읜 대승이라는 가난한 총각이 장수대 인근서 버섯,꿀벌 채취로 살아갔답니다.하루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에 동아줄을 매고 내려가 석이버섯를 따고 있었고.순간 돌아가신 어머니의 급한 목소리가 절벽 위에서 들려왔어요.놀란 대승은 동아줄을 타고 급히 올라왔는데어머니는 없고 대신 집새기 신짝만한 지네가 동아줄을 끊고 있었고.대승대승이렇게 목숨을 건졌고 이후 주민들은 대승폭포라 불렀다........라는 전설이.
남장으로 조선팔도를 주유한 김금원(1817~?) 아시죠? 그녀도 한계산에 왔어요.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
-경국대전-
1830년 그녀는 가마를 타고 원주를 출발해 남한강을 건너 금강산으로 갔습니다.이후 원주 관기가 되었고 남편과 단양팔경,관동팔경을 구경하고는 기행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을 썼죠.(호는 충청,동은 금강산등 관동,서는 평양등 황해도,락은 한양)
대승폭포 등 설악산 기행 얘기도 호동서락에 나오네요.당대에도 유명해 필사본도 많이 전해지고.
대승폭포/김금원
천봉돌울삽천여 ( 千峰突兀揷天餘 )
경무초수화불여 ( 輕霧初收畵不如 )
호시설산기절처(好是雪山奇絕處)
대승폭포승광노(大勝瀑布勝匡盧)
대승폭포가 중국의 여산폭포 보다 낫답니다.
대승암터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숙박처이기도
대승령이 저 위
12선녀탕계곡,귀때기청봉,백담사의 분기점.
칠선계곡 지나 백담사로 가는 길은 산양 보호구역으로 지금은 출입금지.
한계사 스님들이 백담사로 옮겨 갈 때도 이길을 넘었을 겁니다.
시판 한번 읽어보심이
투구꽃 씨방
세상에나~~
설악투구꽃 발견.
대승령은 이미 겨울
여기서 부터 12선녀탕 계곡은 시작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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