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장난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덜 더울 때 일을 하려는 거다.
유월 초순 감꽃 떨어질 무렵 1차 방제를 하고,
이어지는 가뭄을 핑계로 2차 방제를 미루고 있다가
장맛비가 또 이어지는 바람에 한 달이 넘도록 하지 못했다.
습한 장마에 병충해가 많이 생겼을 텐데
시기를 놓친 것 같아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지나간 버스에 손들어 봤자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3차 4차까지 했다는데
나는 어차피 늦어진 거
올해 감 농사는 이번 2차 방제를 마지막으로,
그 결과는 운에 한번 맡겨보기로 했다.
새벽이라 그런대로 선선해서 뜨거운 커피 한 잔 마시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방제 약, 방제 마스크, 방호복, 보안경, 밀짚모자,
식수, 장갑, 수건 등을 챙겼다 (챙겼다고 생각했다).
트럭에 실린 1,000 리터짜리 물탱크는 밤새 물을 받아 놓았고,
동력기계와 분사호스도 어제 점검을 했는데
(어제 까지는) 이상 없었다.
요즘 나오는 약이 아무리 저 농약이라지만
채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벌레 잡다가
사람 잡는 불상사가 생기겠기에 하나하나 잘 챙길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준비하는 동안 어느새 왕산 위로 해가 올라오니
살짝 초조해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더울 때 끝내려고
서둘러 밭으로 트럭을 끌고 갔다.
밭 끄트머리까지 호스를 길게 풀어놓고 방호복을 입었다.
방호복은 공군조종사가 입는 항공복이랑 비슷한
후드까지 달린 일체형인데,
전투기 조종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그 후드 위에 밀짚모자까지 쓰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총알은 막지 못하겠지만)
쏟아지는 햇볕과 농약으로부터 나는 안전할 터였다.
그런데 그 밀짚모자가 사라졌다.
분명 내 트럭에 실려 있었는데 (실려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안 보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는 나는 요즘 이것저것 흘리고 다닌다.
유감스럽지만 모자를 어디서 흘렸는지 기억이 없다.)
어쨌든 꼭 필요한 것이라 더 생각할 것 없이
모자를 찾으러 다시 집으로 갔다.
차를 타고 가면 빠르겠지만
차에서 호스를 100미터나 풀어놓은 상태라
그냥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
덧입은 방호복 때문에 제법 땀이 났다.
집 구석구석을 뒤져도 밀짚모자가 안보여
대체할만한 것을 찾다가 아들 야구 모자를 빌려왔다.
야구모자 쓰고 약치기는 처음인데 별로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방제마스크를 착용하고 보안경만 끼면 완전 모델인데
이번에는 그 빌어먹을 보안경이 안 보인다.
보안경 찾는 동안 해가 뜨거워지겠다 싶어
그냥 약을 치기로 하고 물탱크에 약을 타려고 하는데
아뿔사~ 제일 중요한 약봉지도 안 보인다.
데크에 올려놓고 서두르다가 그냥 온 것이다.
전투기 조종사가 탄약 없이 기총소사를 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할 수없이 다시 한번 집으로 달려갔다.
덧입은 방호복을 벗고 가면 땀이라도 좀 덜 날텐데
새벽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왔다리갔다리 하니
아래 밭에 새벽일 나온 노인회장님이 한소리 하신다.
<어이~ 유주사~ 멋지다~그래 입으니
조류독감 살처분하는 사램 같구만~>
(헐~ 조류독감 살처분이라...나는 전투기 조종사라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