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귀경길~~
우측 창가로 계룡산이 보이네요. 고속도로 생기기 전입니다.
논산~공주~천안 간을 이동 할때는 계룡산에 바짝 붙는 23번 국도를 타곤했죠.
그 때 창가로 보이던 계룡산,그리고 국도 변 갑사 이정표.
불현듯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우리 들렸다 갑시다!!"
차는 지금 탄천 나들목을 빠지고 있습니다.
우측으로 계룡저수지가~~
일대는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요,갑사 초입은 중장리.
계룡산에서 흘려온지라 맑네요. 공주시나 논산시 식수로 사용하지 않을까, 했는데 농업관개용.
계룡산(845) 일대는 사방팔방 드넓은 평지,평야지대.
옛사람들에게 계룡산이란 '신성' 자체였죠.이는 정상에 오르면 절감합니다.
1)통일신라 때는 토함산 지리산 태백산 부악(팔공산)과 더불어 서악(西岳)이 되어 오악(五岳)으로 숭배되었고.
2)조선시대에는 상악 묘향산,하악 지리산 과 더불어 삼악(三嶽)으로 중악(中嶽)이 되었습니다.
3)여말 선초 계룡산 일대(신도안)가 조선의 수도가 될뻔했던 했으며
4)지금은 세종특별시가 계룡산 동북쪽에 들어섰죠.
수도권 한 중앙에 관악산이 버티고 있듯 결국 계룡산을 중앙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공주시 세종시 대전시 계룡시 논산시가 빙둘러 감싸고 있습니다.
5)무속의 총본산으로서 계룡산의 신성도 여전하구요.
삼악(三嶽),오악(五岳)이란 산악숭배 신앙의 표현으로 계룡산 남서쪽 신원사엔 중악단(中岳壇)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갑사,신원사,동학사는 모두 공주시.
가장 인기있는 등산 코스는 동학사~오누이탑~갑사로 이어지는 4~5시간 코스.
보통 동학사 출발해 갑사로 하산하든지,아니면 역으로.
초입 사하촌에 있는 괴목신수(槐木神樹)~~
갑사가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라 대찰에 고찰이였음을 웅뵨하네요
수령이 1600여 년이 넘고 둘레만도 10여미터, 천수를 다한 괴목(느티나무)입니다.
나이가 1600 살이니 갑사의 창건 역사와 괘를 같이 하겠네요.
槐는 느티나무 뜻.
주민들과 갑사 스님들이 모여 정월 대보름이면 제를 지내는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영규대사 휘하 승병들이 이 느티나무 아래 모여 전의를 다졌다네요.
'갑사 가늘 길'~~~
뭔가 좀 아련한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중,고등 국어책에 나온 그 수필이요.
이상보님이 동학사~갑사 중간에 있는 남매탑 전설을 바탕으로 쓴 70년대 대표 수필.
그런데 지금 보니 제목이 '갑사 가는 길'이 아닌 '갑사로 가는 길'이네요.
35년 텀이 한 인간의 기억을 이렇게 편리성에 순응케 했나 봅니다.
짧은 글이니 추억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죠!!
http://www.youtube.com/watch?v=GFfGHUiuous
Beethoven
Cello Sonata No. 3 in A major, Op. 69
Paul Tortelier & Eric Heidsieck)
갑사로 가는 길
-이상보-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 바람에 떨었을 나뭇
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우리들은, 마치 북국의 설산이라도 찾아간 듯이 아취
(雅趣)에 흠씬 젖는다. 원근을 분간할 수 없이 흐릿한 설경을 뒤돌아보며, 정상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一字)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鷄鳴精舍)가 있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가에서는 남매탑이 눈을 맞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거금(距今) 천사백여 년 전, 신라 선덕 여왕 원년인데, 당승(唐僧) 상원(上原) 대사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하
며 수도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 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에만 전심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하는 것
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이 분분하여 사방을 분간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 가 버렸다.
대사는 정성을 다하여, 기절한 처녀를 회생시키니, 바로 경상도 상주읍에 사는 김 화공(金和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한 도덕과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연모의
정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 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는가?
김 화공도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해 준 상원 스님이 생명의 은인이므로,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
(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이 요, 상주(尙州)에도 이와
똑같은 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의 지순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塔身)에 손을
얹으니 천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大德)의 부동심과, 백설인 양 순결한 처자의 발원력, 그리고 비록 금수라 할지라도
결초심(結草心)을 잃지 않은 산중 호걸(山中豪傑)의 기연이 한데 조화를 이루어, 지나는 등산객의 심금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며칠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하나,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 지 오래여서, 다시 산 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1972년 작품이라 작가도 응당 돌아가셨겠지 했는데 생존해 계시네요.
이상보(1927~)
전남 장성,국민대 교수.구순을 넘겼고.
어,그런데 다시 읽어 보니 옛 기억 속의 그 것과 좀 많이 다르네요.
내용도 의당 갑사 관련이려니 했는데 장소 설정 부터가 달라요.
글은 유성 쪽 동학사를 출발해 남매탑을 들른 후 반대쪽 갑사로 막 떠나려는 시점에서 끝납니다.
그러니 갑사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다는.
이렇게 수십년간 동학사,오누이탑의 얘기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갑사에 대한 어떤 서정적인 이미지만 새로이 만들어졌네요.
나는 지금 그 갑사의 '갑사 가는 길' 입니다.
일주문 ~~
계룡,닭과 용의 결합이라니...?
주봉인 천황봉(845)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벼슬을 한 용의 형상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입니다.
지리산에 이어 두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
길에서 우측으로 잠시 벗어나면 옛 대웅전 영역에 역작을 하나 만날수 있습니다.
철당간(보물)~~~
청주시 남문로 광장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국보)과 더불어 이땅 2대 철당간으로 뽑히는 수작입니다.
철당간은 안성 칠장사 철당간 포함해 딱 세개만 있고.
철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15미터)으로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때(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네요.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때(680)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근거는 없고,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후기나 고려초.
당간이란?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죠.그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신성의 상징으로,사찰 영역 표시로,혹은 벽사로 꼭대기에 오색 깃발을 달아 두는 거죠.
당간지주에 받쳐져있는 철당간~~
저리 당간(幢竿)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
들어 보셨나요? 봄에는 마곡사,가을에는 갑사 가 좋다는 뜻입니다.둘다 공주시 소재.
그러나 가을 아닌 봄이여도 좋아요.사람 치이지 않아서도 좋고.
사찰에 들어서는 2키로 주변이 그렇게 안온하고 부드러울수가 없어요.
길 앙옆 여기저기에 느티나무 고목들이 즐비하고 노란 황매화로 화사합니다.
그런데 많이 아쉬워요.
이 좋은 길을 왜 각진 포장 길로 만들었을까요? 그것도 단숨에 치닿을수 있는 일직선으로.
포클레인 이라도 끌고와 확 파버리고 싶은 충동이 입니다.
길섶은 황매화 천국~~
우리가 흔히 보는 황매화는 곂황매인데 이곳은 홑황매입니다.
참고로 겹황매.
강당~~
승려들의 법문 강론이나 사부대중(四部大衆) 회합장소.
청색 편액이 멋스럽네요.
420년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나 이는 알수 없고.
679년 의상대사가 화엄십찰로 중창했다는 얘기도.
여느 사찰과 다르게 벚나무 고목들이 보이고.
공우탑(功牛塔)~~
말 그대로 중창불사를 돕다가 죽은 소의 공덕을 기리는 탑.
당시 소는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
희생(犧牲)이라는 한자어에 소 우(牛)자가 들어가는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탑신에 새겨진 글자 보이시나요?
功~~
牛塔~~
합하여 공우탑.
벚꽃 아래서~~
도시락이라도 까먹으면 딱이겠어요.
왼쪽 작은 전각 보이시나요?
종각 안엔 동종(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선조 때 주조한 것으로 조선조 대표적인 동종.
일제 강점기 일본에 방출 되었다가 돌아왔다네요.
제작 시기를 표시한 명문이 있어 범종 변천사 연구에 중요.
甲士寺라는 명문이 있어 전에는 갑사 아닌 갑사사였음을 알수 있고.
대웅전 영역~~
연두색이 일기 시작한 뒷산에 눈이 더 가고.
대웅전~~
선조 때 중건하고 고종 때 보수했다네요.
건축학적으로 큰 특색은 없어 충청남도 지정문화제.
그러나 대웅전 안에 들어가면 국보가 한점이 있어요.
갑사 삼신불괘불탱( 甲寺三身佛掛佛幀)~~(국보)
괘불 중 국보는 총 7점인데 그 중 하나입니다.
1650년.길이 12m,폭 9.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괘불화.
중앙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있는 17세기를 대표 수작.
경잠·화운·응열 등 8명의 화원이 제작, 그리고 공양시주 및 괘불 조성에 필요한 물품 시주자들이 기록되어
17세기 중반 생활상과 사찰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있는 귀중한 자료랍니다.
괘불이란? 큰 법회 때 법당 앞뜰에 걸어 놓는 대형 불화.
관음봉,문필봉 등이 보이고~~~
바로 뒤로 정상 천황봉은 숨었고.
동학사는 왼쪽 능선 너머에.
지금 동학사 계곡은 벚꽃 축제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 겁니다.
승탑(보물)
신라말 고려 초 작품.
서산대사,사명대사 와 함께 임진왜란 3대 승병장 영규대사(靈圭大師)를 얘기 안할수 없네요.
영규대사는 이곳 갑사에서 출가 후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청주까지 점령되자 승려 700명을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죠.
임란 최초의 승병장이 된 것.
영규대사의 승군은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되찾았습니다.
이어 왜병의 호남 점령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진격했으나 금산 전투에서 조헌과 함께 전사.
이는 왜의 호남 진입이 저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갑사 내에는 휴정과 유정,영규대사를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갑사 뒤뜰을 지나니 갑사계곡이~~
이 계곡 따라 능선을 넘으면 오누이탑,그리고 동학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상보님은 오누이탑을 출발해 이 계곡을 따라 갑사로 하산했겠네요.
황매가 지천으로~~
계곡 따라 20여분 오릅니다.
저 버들가지 줄기를 꺽고 싶네요.
왜나구요? 버들피리 만들게요.
비틀면 껍질과 속 줄기가 쉽게 분리되어 나오는데,이는 초봄에 물가라 흠뻑 물을 머금어서죠.
이를 일정하게 자른 후 면도칼로 끝부분을 얇게 다듬어 리드(reed)를 만들면 훌륭한 버들피리가 됩니다.
겨울을 이겨낸 동네 꼬마들에게 버들피리는 훌륭한 야외 놀이기구가 되죠.
삐이~~하는 보리피리는 목관악기 중 최고 음역인 피콜로(작은 플룻 뜻) 소리와 비슷하지만
버들피리는 원시적이라도 리드가 있어 부드럽고 울림 있는 오보에 비슷한게 됩니다.
경험들 있으시죠??
등산로 변 현호색(胡索)~
이른 봄 군락으로 피어 길손을 반기죠
뭐로 보이시나요?
서양에선 노래하는 종달새로 보았여요.
마치 종달새 머리와 비슷하다 해서 속명이 그리스어로 종달새를 뜻하는 코리달리스(Corydalis).
나에겐 어미에게 먹이 달라 보채는 아기새들의 주둥이 합창으로 보이고,또 들립니다.
갑사에서 20분 거리 아담한 용문폭포~~
폭포 앞에 전망대까지 설치되어 있는데도 한잔 걸치시며 저러고들 있네요.
이제 귀가길~~
미처 못본 몇곳을 들렀다 갑니다.
우측으로 승탑(부도)들이 보이네요.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잘들지내고 있고.
갑사 사적비(史蹟碑)~~
18세기 후반에 세운 것으로 갑사 이력서.
비의 전체 높이는 337㎝, 비신 높이 225㎝, 너비 133㎝, 두께 50㎝~~
비명은 전서체로 '공주계룡산갑사사적비명'(公州鷄龍山岬寺事蹟碑銘)이라 새겼네요.
문장은 여주목사 이지천이 짓고 공주목사 이기징이 썼는데 문장이 아름답답니다.
그런데 비명을 보니 甲寺가 아니고 岬寺네요.갑(岬)은 산허리 뜻.
현재의 갑사(甲寺)는 18세기에 이르러 불린 이름.
그러고 보니 1500년대 중반에 주조된 동종엔 甲士寺로 새겨져 있으니
甲士寺에서 岬寺로 다시 甲寺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측면에 좀 특이한게 보이네요.
사적비 전체 글자 수가 3,710자라고 자수까지 밝혔다는.
왜 그랬을까요?
특이하게도 공사 실명제를~~~
시주자,제작에 관련된 스님들 명단을 새겼는데,이는 흔히 볼수 있는 거라 중요치 않고.
우측 하단을 보시죠??
석공(石工),각공 (刻工) ,야장( 冶匠 )의 명단도 새겼다는.
석공 4명 ,각공 4명,야장 2명의 이름 이 보이는데 석공,각공은 승명 인데 반해 야공은 일반인.
석공은 원석에서 비석을 뽑아내고,각공(刻工)은 글자를 새겼겠죠.야장(冶匠)은 대장장이를 말합니다.
금강산 등 명산의 암반에는 갖은 각자(刻字)가 즐비한데 글자를 새긴 각공들은 바로 인근 사찰 스님이였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수있습니다.
일주문 나서 주차장으로~~~
秋甲寺,가을에 한번 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