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전에 찔러넣었던 손을 꺼내 벌써 얼어버린 코를 자꾸
부빈다.
우리 구들방만큼이나 위풍이 세다.
하늘엔 언 별이 뎅그랑 뎅그랑 걸려 있다.
바람이 좀더 세게 불면 곧 떨어져 내려와 살얼음깨지듯 깨질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바람을 피해 아주 저만치서 트미하게 박혀 있다.
아버지가 계신 나라에도 첫눈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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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서울갔을 때 들고 갔던 가방을 빨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사진 몇 장이 손에 들어왔다.
선산에 아버지가 묻히는 것을 박은 것이었다.
추석에 언니가 가방 속에 넣어준 것을 모르고 있다 지금 꺼낸 것이다.
그랬다.
그 때 아버지를 그런 모습으로 땅에 묻었었다.
내 아버지는 시골에서 태어나셨지만 도끼질 한 번 변변히 못하는 종가집 맏
아들이었다.
그러니 그 큰 농사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의 몫이었고 아버지는 공무원이
셨다.
여섯인 자식을 완전 스파르타식으로 키우셨다.
우린 재밌게 놀다가도 아버지 퇴근 전까지 각자 맡은 청소구역과 맡은 동물
들의 저녁먹이를 다 완수시켜 놓아야 나중에 점호 때 종아리세례를 면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시골집에 어디 목욕탕이 있으랴.
마당 한 켠에서 덜덜 떨며 씻어
야 했다.
내 아주 어릴 때 기억으로는... 코흘리개...
그러니 꾀를 내서 걸레에 대충 발을 문지르면 점호 때 영낙없이 걸
려 종아리 얻어맞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들 걸레 대주었다고 덤으로 야단
을 맞아야 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오빠를 포함한 남자들은 할아버지 방의 네모진 상에서,
여
자들은 엄마방에서 순서대로 둥근 상에서 먹었고 머슴들은 뒷방에서 먹었
다.
그 잘난 누릉지를 먹을 때도 순서대로 부엌으로 줄서서 가야 했고 손님이
오셔서 인사를 할 때에도 순서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점호 때 또 지적을 받
아야 했다.
그 놈의 순서가 무에 중요한지 그 때는 꼭 그래야 하는줄로 알았다.
옷장도 손수지어주셨다.
책꽂이처럼 되어 있어서 어떤 놈이 제대로 옷을 개놓지 않았는지 당신 스스
로 점검하기
쉽도록 말이다.
그렇게 딸들을 관리하시더니 자식들 머리가 커지면서 그 족쇄도 서서히 풀
어주셨고 단지 자식들 공부 많이 시켜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면서 교복처럼 완전 자율화
되었다.
아버지는 딸들과 장난도 잘 치시고 유모스러우셨으며 가정적이셨다. 나중
에 왜 어릴 때 그러셨냐니 여섯이나 되는 자식 게다가 딸이 다섯이다보니
기본부터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더란다.
그런 아버지가 당뇨병에 걸려 근 15년을 고생하셨다.
병원 입,퇴원을 밥먹듯이 하셨고 좋다는 기계는 다 사서 훈장달 듯 몸에 달
고 다니셨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 귀농 전 당시 읽던 이해인 수녀님의 '꽃삽'을 꺼내
보았다.
그 책 여기 저기에 퍼렇게 박아놓은 사연들이 눈에 서로 달려든다.
1999.10.3.
다른 이들은 어떤 때 비참해지는가?
난 지금 이 순간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다.
몇 시간 후면 한 생명이 예고된 죽음을 맞이한다.
더 이상은 가는 자에게 고문이라는 이유로 죽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도 모른채 중환자실에서 침대 하나 차지하고는 희미한 삶을
부여잡고 계신다.
-여의도 성모병원 계단에서-
1999.10.16.
요즘 사람들은 올 때는 생생하게 왔지만, 털고 갈 때는 겨울도 아닌데 얼려
서 간다.
영안실 냉동실에서 아버지를 꺼냈을 때, 하얀 천 아래로 오른 발이 삐쭉이
나왔었지.
그 색은 크레파스에 씌여 있는 그 살색이 아니라 마네킹색에 가까웠다.
머리도 빗겨지고 15개이던가 세상의 매듭을 가슴에 나란히 박고, 몸보다 훨
씬 큰 옷도 입으시고 버선도 신으신다.
평소에 지니셨던 나무묵주 하나 달랑 갖고 이 생에서의 마지막 단장을 끝내
셨다.
선산에는 몇 년 전에 당신이 겨울에 하늘나라로 가게 되면 땅이 얼어 자식
들 고
생한다고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놓으신 '가묘'가 아버지 키만큼 파여져 있었
다.
아버지는 그 곳에 마춤처럼 스스로 찾아들어가셨고 살아있는 자는 이불덮
어주듯 흙을 덮었다.
그러고 손을 털고 내려오면 그 뿐!
-11층 아파트 한 쪽 구석에서-
그 메모를 보니 그 때의 가슴애림이 전해져 와 파도로 부서진다.
그 파편은
주책 없이 눈으로 들어와 그렁거린다.
일전에 병든 엄마가 오셨었는데 그 때 하신 말씀 생각났다.
막내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들 귀농한다는 얘기 들으시고 마
음 많이 아파하셨다. 그러니 아버지 마음 녹여드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행
복하게 살아야 한다.
신달자 시인의 '임종 앞에서'라는 시 중에는
"워워어어 짐승의 비명만 흘러나왔다.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만 보고 있는 자는
짐승이 되는가 "
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랬다.
살아있는 자는 모두 짐승이 되어 늑대소리만 낼 뿐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그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2001년 12월 1일
까만 밤을 하얗게 새고 싶은 밤에 산골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