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글 저런질문 최근 많이 읽은 글
이런글 저런질문
즐거운 수다,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
그리스에서 휴가를 3 - 홀로 벌판을 헤매다(끝)
우리나라 제주도를 연상케할만큼 커다란 남단의 크레타섬에서도 유명한 곳만을 찾아다녔으니 관광 맞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도저히 잊혀지지 못할것 같은 돌발사태가 발생했으니 우리 가족이 허허벌판에 버려진 일이었죠.
지금은 `그 맛에 여행했다'고 합니다만 그때는 몸 떨리게 무서웠습니다. 애들 앞이라 내색도 못하고.....
크레타 이야기는 햇살에서 시작됩니다.
소도시 공항만한 헤라클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한 저희는 한여름의 동해안보다 훨씬 밝고 찬란하고 형광빛이라도 도는 것 같은 그런 햇살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크레타 볼 것 없다'는 `카더라 통신'이나 `크레타는 뭐뭐뭐 빼면 콘크리트 도시'라는 얘기는 가보니까 수긍이 가더군요.
불과 10분 떨어진 호텔까지 10유로를 주기로 흥정하고 올라탄 택시 창밖은
날씨만 화창하되 이미 썰렁해진 비수기 해변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사방팔방 재개발 공사 중인 건물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죠.
옛날 물건이나 유적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도 "하이고, 돈 날렸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노소스(Knosos) 궁전이나 말리야(Malia) 궁전은 외관상 그냥 돌무더기이되, 저에게는 돌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면서 다니게 만들었던, 유적 이상으로 시대정신을 엿보여줬던 타임머신이었답니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감동이나 전율은.....
크노소스 없는 크레타는 흔한말로 앙꼬없는 찐빵입니다.
이것은 아테네에 널려있는 우유빛 대리석 유적과는 완전히 다른, 그보다 1천년쯤 앞선 기원전 20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미노아 문명의 잔재입니다.
둥그스름한 구릉을 파들어가기 시작하자 곧바로 벽화와, 곡물.포도주.기름을 저장한듯한 대형 항아리 수백개, 꼬불꼬불한 미로의 궁전이 드러나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문명이 존재하던 그 시절에 유럽에도 이런 문명이 있었다는게 입증된 셈이었다죠. 이렇게 발굴됐거나, 지금도 발굴중인 미노아의 주요 궁전이 크레타섬에 무려 4곳입니다.
그리스 2위의 이곳 고고학박물관에는 발굴에서 나온 인형, 그릇, 항아리, 장신구 등등이 가득하고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로 가득한 돌판이나, 금뿔이 달린 황소머리 앞에 서면 정말이지 몸이 부르르 떨리는듯 합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헤라클리온 중심부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갑니다.
론리플래닛 지도의 버스타는 정거장은 지금 도보공사중이라 버스가 없구요, 제가 물어물어가니
중심가인 1821거리(재래시장 옆 거리입니다)에 정류장이 있습디다.
여기서 아침에 꽤 번잡한 시내버스를 낑겨타고 교외의 크노소스로 떠났습니다.
외국서 버스타기의 최대 고민은 타기는 탔는데 내리는 곳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노소스라면 맘 놓으셔도 됩니다. 종점이 임박한 분위기가 되면 버스에는 첫 눈에도 그리스인과는 영판 다른
서양 관광객만 남구요, 그러다가 버스가 털컥 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버스운전사가
"크노소스 뭐라뭐라뭐라....." 알수없는 그리스말로 떠들면 승객들 무리에 묻어내리시면 됩니다.
영어가 좀 되신다면 크노소스궁 입구에서 각국 언어의 가이드들이 포진해 있으니까 한분 예약하시면 될 것 같네요.
제대로 둘러보는데 족히 4시간은 걸린다는데, 저는 사전지식을 많이는 못 가져갔는데도 설렁설렁 2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붉은 기둥 등으로 궁전을 좀더 궁전답게 `재건축'한 흔적들이 있지만
어쨌든 돌무더기는 돌무더기입니다. 이걸 보시고도 펄펄 뛰시면서 좋아하셔야 크노소스에서 건지는게 있는 거지요.
이튿날, 박물관을 둘러보던 우리 아이들이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면서(아이들 박물관을 아주 지겨워합니다)
또 크노소스에 가잡니다.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던지라 저도 그럴까....하다가 기왕이면 새로운 궁전터를 하나더 개척해보자 하고
대담하게 리무진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30분 떨어진 말리야 궁전터까지 나가면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영화같은데 보면 유럽.미국인들이 수영복 하나 걸치고 맨발벗고 조그만 소도시를 막 돌아다니거나 웃통벗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그런 휴양지 나오지요? 말리야가 그런 곳이라길래 아주 안심하고 떠났더랬습니다.
그랬더니 버스 차장이(신기하게도 이 버스에는 옛날에 우리 '오라이'하는 것 같은 남자 차장이 있습디다)
말리야 궁전이라며 아주 허허벌판에 우리를 내려주더이다.
"아저씨, 궁전 어딨어요? 안보이네" 내려서 그렇게 외쳤더니
"건너가서 걸어가세요" 그러고는 횅하니 떠나버렸습니다.
`말리야 고고학 유적지'라고 쓴 녹슨 간판 하나. 그나마 영어라 다행일까요? (크레타에는 그리스어로만된 이정표가 태반입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2차선 국도를 뒤로 하고 낮은 관목숲 사이로 난 아스팔트길을 10분여 총총히 걸어들어가는데
`이거 뭔가 잘못됐다. 내가 사고를 치긴 친거여~~' 이런 불안감 뿐이었습니다.
유적을 신나게 보긴 봤는데, 보면서도 호텔로 돌아갈 걱정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왠지 일이 자꾸 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있잖아요.
예감이 딱 들어맞아 정말로 꼬입디다.
어찌 긴장했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후 4시10분에 다시 국도상으로 나왔으나 30분만에 한번꼴로 온다는 리무진 시외버스는 20분을 기다려도 오지도 않지요,
그래서 4시45분에 궁전터 주차장까지 들어온다는 버스를 타려고 다시 걸어들어왔는데 이 버스 역시 감감무소식이죠.
주변은 관광객이 드문드문한데 죄다 렌트카해서 온 유럽인이라 아무도 내 편이 되 줄 것 같지도 않고,
북적북적하다는 말리야 시내가 저멀리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하게 보이긴 하는데, 거기까지 아이들 데불고 걸어가야 하나...어쩌나.....이러다가 해 떨어지면 나는 끝장이다~~
주저앉고 싶은게 아니라 덜썩 주차장 옆길에 주저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놀고 있고.
그렇게 퍼질러 앉아 핸드폰으로 그리스 장거리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돌렸습니다.
일이 꼬인다고 그리스말로 뭐라뭐라 하더니 뚝 끊어지더군요. 팍*!!!! 이거 왜 영어로 안하는거야!
머릿속에는 해가 떨어져 인적없는 산과 벌판은 캄캄해졌는데 나 혼자 아이들 데불고 헤메는 영상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기 멀리서 택시 한대가 꾸역꾸역 들어오더군요. 무조건 달려가게 됩디다.
예약한거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헤라클리온까지 얼마에 가겠냐고 하니까 30유로 달래요. 운전사가 인자하고 믿음직해보이기까지 하더군요.
그 휑한 벌판인데도 이 택시 누가 뺏어가랴 싶어 그냥 아이들 밀어넣고 올라탔습니다. 100유로 달래도 탔을 꺼예요.
택시는 해안을 낀 도로를 시속 120km로 달리고 옆으로는 어디서나 옷벗고 들어가면 될것 같은
에머랄드빛 바다와 모래해변이 줄줄이 이어지는데도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긴장의 여파로.
그래도 40분쯤 달려와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1층 프론트에서 인사하는 직원에게 아무일 없었다는 듯
"좋은 여행이었어요" 하면서 미소지을 여유는 생겼어요.
물론 방으로 올라와서는 큰 대자로 뻗었지만서도.
크레타는 좋은 경관 못지않게 실질적인 여행의 교훈을 주었습니다.
1. 유사시를 대비해 반드시 핸드폰 로밍해서 갈 것(택시회사에 전화라도 해야하니까)
2. 론리플래닛을 너무 믿지 말자 . 책에만 영어면 뭐합니까 길거리 간판들이 영어가 아닌데....
3. 인적이 드문 곳에는 어른이더라도 무리지어서 갈 것.
4.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여행할 것. 어쨌든 남들이 다 렌트해서 가는 곳을 나 혼자 버스로 간 셈이니까.
그래도 크레타는 참 좋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시내의 중심가는 웬만한 명품숍들이 줄지어있는 거리도 구경을 잘 했지요. 헤라클리온은 그리스 5위의 팽창하는 도시랍니다.
잘 생기고 늘씬늘씬한 백인 청년들이 싹싹하게 서빙하는 `물 좋은 식당'에 갔다가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여유를 보여야할 것 같아 "I like your burgers"하고 음식맛 칭찬까지 해줬습니다.
한봉지에 1천800원짜리 말린 토마토. 2만원쯤 주고 산 여름용 가죽 쪼리. 크레타 전통이라며 권해준 정어리 튀김....
그리고 16세기에 크레타를 22년간 터키의 침략에서 지켜준 베네치아 성벽. 나중에 크레타 저항세력을 잡아둔 터키의 감옥으로 쓰여서인지 정말 으스스하고 차가운 기운이 도는 중세건물입니다.
그래도 저는 돌들이 제일 좋았습니다. 4000년 가까이 살아숨쉬는 미노아 궁전의 성벽들이.....
20년전 처음 유럽을 배낭여행할때 "다음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오리라" 다짐했었죠.
크레타에서도 그런 다짐을 남겼습니다.
"다음에는 렌트카를 해서 운전하고 다니며 못보던 궁전터를 둘러보고, 전혀 가보지도 못한 섬의 서쪽도 여행하겠으며,
택시 창밖으로 흘려버린 지중해의 비치에서 하루종일 수영과 일광욕도 하겠다고....."
그리고 그때는 "나는 그리스인"이라기보다 "나는 크레타인"이라고 말하고 그리스 본토와 늘 분리되는
정신세계를 가져온 크레타 사람들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 [요리물음표] 술꾼들의 야식??? 6 2008-04-21
- [요리물음표] 한숨..얼마나 많은 고.. 3 2007-09-06
- [요리물음표] 대략 난감...와인안주.. 11 2007-02-14
- [요리물음표] 동네 망년회 메뉴 봐주.. 1 2006-12-16
1. 곰돌이
'06.11.8 1:03 AM크레타도 이젠 많이 번잡해졌나 보네요. 가이드들까지...? 담에 가시면 카잔차키스 생가(?)도 들러보세요. 거기까지 가는 길이 일품입니다...
2. 늦여름
'06.11.8 1:14 AM곰돌이님, 가보셨군요.
호텔이 있는 해변은 "유럽 맞나" 싶을만큼 변변치가 않은데요,
중심가 사자머리 분수(모르시니 분수) 주변에서 한블럭 내려간 도심은 까무러치게 번화하더구만요.
그리고 깨끗하고 부티나는 유럽 20-30대들이 완전히 뒷골목의 물좋은 식당와 바들을 점령하고 있었어요.
전체적으로 뭐랄까...몇년쯤 뒤에 가면 호텔개조.리모델링.재건축 이런거 다 되서
지금보다 훨씬 화려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 들어요.
카잔차키스 생가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좋다는거 알고 있었는데도 못 갔지요.
애들과 함께가는 여행의 한계랄까요....^^3. 로이스
'06.11.8 1:34 AM와~ 드디어 3탄이 올라왔다.
제가 워낙 여행기를 좋아해서....늦여름님 글을 아껴가며 천천히 정독했는데..
끝이라니 너무 아쉽네요.
저도 배낭여행한다고 국경을 건너다 인적이 없는 숲길을 혼자 터벅터벅 걷다가
갑자기 무서워진 적이 있어서 늦여름님께서 느끼셨을 순간적인 공포를 이해해요. ㅎㅎㅎ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마치 그리스를 다녀온듯 해요.4. 승희맘
'06.11.8 11:34 AM너무 좋네요.. 한적한 공포.. 그러면서도 느껴지는 스릴..
배낭여행족 만이 느낄 수 있는 서스펜스 아닌가요?
에고 타임머신 타고 15년 전으로 다녀와 봤읍니다..
(저는 15년전 터키에서 담에 돈많이 벌어서 또 오리 하고 주먹 불끈 쥐었더랍니다)5. 향수
'06.11.9 5:33 PM늦여름님의 여행기를 읽다 보니 글을 아니 남길수 없군요
세세한 느낌과 과정이 너무 생생해서 작가 이상이세요
열정이 컴퓨터에서 마구마구 튀여 나와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저도 내년에 유럽에 머물러야 하는데 꼭 가고 파요 그리스에
그런데 영어가 딸려서 어쩌지요 딸들이고 어려서 님과 같은 여정은
무리겠지요
감동 감동 끝이라서 아쉽네요 성격도 열정적이시고 멋질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