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와 가뭄을 예방하고 상수원의 수질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자전거도로와 야외무대, 공원 등을 짓겠다는 4대강사업. 이명박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맞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도시에서 두물머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찾아왔다. ‘자전거면 충분하다’면서도, ‘팔당 농민을 몰아내는 자전거도로 안 돼’ 하는 이들은 두물머리에서 <에코토피아 캠프>를 차리고 농민들의 투쟁에 연대한 바 있다.
2009년 여름, 4대강사업 마스터플랜 발표와 함께, 팔당유역의 하천점용허가가 갑작스레 취소되고 토지가 강제수용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농민들을 대책위를 꾸리고 감정평가를 거부키로 하는 등 공탁을 저지하는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팔당부터 청와대까지 삼보일배 가는 길. 고달픈 여름.
삼보일배로 청와대까지 가겠다던 의지는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삼보일배 행진을 중단하고, 새로운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 농민들뿐 아니라, 시민, 종교인, 생협조합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다.
2009년 가을, 결국 1,000명에 가까운 공권력을 동원한 강제측량이 이뤄지게 된다. 농민들은 사활을 걸고 강제측량을 저지하려 했으나, 결국 측량을 막지는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21명의 연행자가 발생했다.
유기농단지를 짓밟는 공권력의 군홧발. 이 나라의 토건 문화가 어떤 식으로 자행되고 있는 선명하게 보여준다. 약자를 공권력으로 짓밟고, 자본과 권력을 위해 뛰는 모습. 투쟁 기간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강제 철거를 하겠다는 협박만을 앞세우고, 농민을 법정에 세웠으며, 경찰과 검찰에 의해 중대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또한 일부 언론들은 농부들이 편향적인 이념을 가진 이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종교인, 시민 등이 농민들과 합세해 막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힘없는 바리케이트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던 그 날 아침... 일사불란한 경찰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포클레인에 매달린 유영훈 팔당공대위 회장. 절박한 심정과는 무관하게 수 십년을 일궈온 유기농지는 단 몇 분 만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강제연행 당하는 한 여성이 끝까지 저항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 쪽에서는 포클레인에 매달린 이를 끌어내리는 중이다.
<4대강사업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가 두물머리에서 대규모 집중 미사를 봉헌했다. 이 대규모 미사는 1년에 여러 차례, 전국 각지를 돌며 계속 이어졌다. 4대강사업으로 인해 망가진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천주교회가 앞장서겠다는 다짐과 마지막 일각까지 남아서 4대강사업에 맞서겠다는 각오가 어우러진, 경건한 아름다움이었다.
‘4대강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이하 천주교연대)는 4대강 권역을 돌며 수차례 대규모 미사를 봉헌해왔고, 두물머리에서는 2010년 2월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생명평화미사를 이어오고 있다. 또 지난 연말에는 한파주의보 속에서도 4대강 공사 강행에 대비한 9일기도회를 열어 공사를 저지하기도 했다. 그 결과 두물머리의 4대강 공정률은 0%인 상황이다.
보초 서기. 두물머리의 상황이 긴박해질 무렵, 농민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컨테이너 앞에서 보초를 섰다. 두 동의 컨테이너 위에는 망루
가 쌓아 올려져있고, 천주교 사제가 2층에서 잠을 잠을 청했다. 농부들과 사제들은 이곳에서 수 차례 단식 농성을 벌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정부와 경기도의 답신은 '철거계고장'이었다.
인적이 드문 두물머리 강가에는 여전히 많은 철새들이 돌아오고 떠난다. 그러나 산책로가 조성되었거나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진 곳 근방에서는 더 이상 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4대강사업 공정에 돌입하기 전에, 국토해양부는 자체보고서를 통해 21종의 멸종위기종들이 피해를 볼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강변을 가득 메운 ‘4대강 뭥미(米)’의 황금물결. ‘4대강 뭥미(米)’ 4대강사업에 맞서는 농민들과 시민들이 함께 모내기하고, 오리농법으로 키운 순 유기농 쌀이다. 이 해,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이 연평균 1.16㎎/ℓ를 기록, 1.12㎎/ℓ를 기록한 2005년 이후 가장 좋은 수질을 기록했다고 경기도는 밝힌 바 있다. 유기농법이 수질을 오염 시킨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셈.
해질녘, 개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농부. 두물머리가 4대강사업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이곳은 평온 그 자체였다. 11개 농가가 한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고, 금요일마다 모여 축구시합을 하는 등 따뜻하고 평화로운 마을공동체였으나, 2010년 12월에 7농가가 마을을 떠나면서 이 모든 평화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두물머리는 아이들과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뛰어노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옛시절에는 이러한 광경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소에게 풀 주러 가는 소년, 나물 캐는 소녀, 하루 종일 뛰어노는 아이들과 덩달아 신난 마을의 강아지들. 이런 풍경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 두물머리다. 이곳의 아이들은 이제 어디로 떠나야 하는 걸까.
투쟁에 삶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고 말하면서도 농사일을 멈출 수 없는 농부. 농사가 곧 삶이자 투쟁이기 때문이다. 김병인 농부의 투쟁 이유는 단지 "친환경유기농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도시민에게 공급하는 것이 4대강사업보다 더 가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규섭, 최요왕, 김병인, 임인환. 4명의 농부 이름이 또렷이 적힌 ‘4대강사업저지 천주교연대’의 현수막. 서상진 신부는 미사 강론을 통해 마지막 일각까지 두물머리를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고, 윤종일 신부는 사제들과 함께 150일에 가까운 단식 투쟁을 이끌기도 했다. 또한 차가운 컨테이너에서 밤을 지새우며 며 철야기도를 하고, 공권력이 동원되었을 때는 언제나 앞장서는 이들이 바로 천주교연대의 사제들이었다.
앵 두를 수확하는 청년들. 두물머리는 이제 농부들만이 국가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와 아스팔트 속에서 자란 도시의 청년들이 농사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공해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두물머리밭전위원회 소속인 이 청년들은 농사가 불법이라면 차라리 자신들을 고발하라며 위원회 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렸고, 현재 밭전위원의 수는 수백 명에 달한다.
맨 흙을 밟고 선 농부의 맨발. 두물머리의 흙은 40년간 화학비료, 농약, 제초제 등을 사용하지 않아 흙의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지렁이, 거미 등 각종 벌레는 물론이고 두꺼비와 두더지 등도 서식하는 땅이다. 수북한 지렁이의 똥탑들이 흙의 건강함을 증명한다. 맨발로 농사지을 수 있는 것도 흙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흙을 보면서도, 경기도는 한 때 유기농이 발암물질을 일으킨다고 주장했으며, 현재는 수질을 오염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질의 오염은 각종 농약과 비료 등이 범벅된 토양의 오염에서 시작되며, 오히려 선진국에서는 강의 수질 정화를 위해 유기농을 장려하고 있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양수리(두물머리) | 작성자 봄눈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