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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출신으로 197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학생운동 사건인 오둘둘 사건으로 인해 제적당한다. 그 뒤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대구지검에서 1년 동안 검사로 재직하다 80년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박노해 사건 등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 처장으로 재위하면서 국민생활최저선 운동(1994년), 사법 개혁 운동(1995년), 작은 권리 찾기 우동(1997년), 대기업 소액주주 운동(1998년), 예산감시 정보공개 운동(1999년), 부적절한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공천 반대 및 낙선운동(2000년) 등을 주도하며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오며 한국사회를 변화시켰다.
[편집]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은 서울대학교 우 모 조교가 교수였던 신 모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다. 6년간의 법정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나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우 조교의 변호는 박원순 변호사가 맡았다.
[편집]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으로 재학중이었던 박종철은 1987년 전두환 공안당국에 붙잡혀 취조실로 끌려가게 된다.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철과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박원순은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2]
[편집]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부천서 성고문 사건(富川署性拷問事件)은 당시 부천경찰서(지금의 부천 소사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文貴童)이 조사과정에서 당시 22세이던 대학생 권인숙을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공권력이 추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권력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인한 사법부와 언론의 부도덕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 수단 보도 지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해자 권인숙 씨의 변론은 박원순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