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기사인데요
어제 타운홀미팅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희년(주빌리, 주빌레)을 언급하는 것을 보고 검색해보니
성남시장 때 이미 주빌리은행을 설립해서
빚 탕감 프로젝트를 해왔네요.
정말 알면 알수록 귀한 분입니다.
교회가 이재명을 버렸습니다. 아니, 이재명이 교회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설교를 통해 이재명을 자기 교인이 아니라고 탄핵함으로써 이재명은 교회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그것은 분당 우리교회와 이찬수라는 개교회 목사를 통해 한국 개신교회가 벌인 이재명 추방 퍼포먼스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신조와 교리를 중심으로 모인 종교 집단의 일원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제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을 양성하는 종교단체입니다.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이란 말은 바르나바가 사울과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사람들을 가르쳐 예수의 제자로 삼았을 때, 그들에게 처음 붙여진 이름입니다(사도행전 11,26).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지금처럼 교리와 의식이 복잡하게 얽힌, 종교 체제가 갖추어지기 이전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그의 삶을 따르는 것으로 신앙의 꽃을 피웠습니다. 제도종교로써의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예수의 원시적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종교적 이상이나 신조에 의해 규정당하지 않고, 오직 예수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사는 원시적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제도 종교가 만들어지고 신학 논쟁이 가열되면서 그것으로 대립과 갈등, 분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는 신학의 언어와 논리로 재편집됐습니다. 예수는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값싼 위로의 말씀으로 각색되기도 하고 심판의 두려움으로 교인들을 결속시키기도 하며 교회 제도를 강화시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에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인만 남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척박한 교회 역사에도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꽃피우곤 했습니다. 하느님은 역사의 고비마다 그리스도인들을 남겨 두고 썩어가는 이 세상에 새 생명을 피워내곤 하였습니다. 이재명의 인생사에서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봅니다.
그는 지난 대선 기간에 CBS 라디오 방송연설을 통해 자신은 “아내를 통해 2005년에 주님을 영접했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이면 그가 성남시에서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성남시에 종합병원인 인하병원이 폐업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병원 하나 없던 성남시에 시민 1만여 명과 함께 발의해서 성남의료원 설립을 추진했지만 당시 한나라당의 저지로 무산됐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소요를 일으켰고 이재명은 성남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숨어듭니다. 기도실 피신 과정에서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것과 같은 시기에 그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접한 주님은 제도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가르친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고 그것을 따를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 이전부터 그의 심성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어렵고 불행하면 열등감이 커지고 대결과 승리를 통해 보상받으려 합니다. 이 때문에 건강한 정신과 윤리의식이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재명은 자신이 겪은 불행한 삶을 타자를 보는 시선으로 바꿉니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그가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고사를 보았을 때,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주는 중앙대에 간 것은 가족의 부양을 위해서였습니다. 판검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았지만 그는 인권변호사로 개업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그에게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의 예수가 내재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성남시장 재직시절 펼쳤던 복지정책은 자신의 가난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가난 경험이 열등감으로 흐르지 않고 타자를 위한 배려와 포용의 정책으로 흐른 것은 그 안에 예수의 심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대선 공약으로 내놓은 ‘기본사회’ 개념은 건강한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왔던 예수의 가르침이며 구약성서의 이상입니다. 그는 천상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고,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정책 중 하나가 주빌리은행(Jubilee Bank)입니다. 그가 성남시장 시절인 2015년 설립한 이 은행은 장기부실채권을 헐값에 매입하여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주거나 줄여주는 게 목적입니다. 이것이 이재명의 ‘빚 탕감 프로젝트’입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빚을 못 갚아 가정이 파탄나고 삶이 무너져 자살에까지 이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약탈적인 금융사회 구조에 짓밟혀 죽는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정책입니다. 주빌리(Jubilee)라는 말 그대로 희년의 대사면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많은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희년 정신을 책으로 내고 세미나를 열고 수도 없이 설교를 하지만 이재명의 희년 정책만큼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장의 자유를 마치 정치적 자유인 것처럼 숭상하고 떠받드는 보수 정치인과 이에 동조하는 교회들 입장에서 보면 그는 공산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재명이 공산주의자라면 예수 역시 공산주의자이고 성서는 공산주의 경전이러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서가 외치는 하느님의 정의와 공의는 이재명이 공약으로 내 건 기본사회 개념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본사회’ 개념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이상에 터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재명이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재명을 버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교회 체제와 신조에 순종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의심을 제거한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의심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생각 없는 종교적 열심을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진실을 마주보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은 나의 평안과 안식과 축복을 기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우리와 사회에 하느님의 공의가 행해지기를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은 나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실패한 이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것이 기도가 되게 합니다.
이재명은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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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