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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저에게 날카로운 ㅇㅇㅇ의 추억이란

안녕 조회수 : 1,285
작성일 : 2023-09-23 09:10:27

좀 길어요 ^^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예요

제목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쓰려다가 키스 얘기도 없는데 낚시라고 하실까봐 고건 뺐어요 ㅎㅎ

'날카로운 추억'이란 표현이 딱 제가 하고 싶은 말이예요

아침에 할 일 끝내고 커피를 마시다 떠오른 생생한 추억을 계기로 문득 사람의 경험과 기억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멋진 추억이든 잊지못할 기억이든 없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어둠 속에서 성냥불 켜듯 유난히 날카롭게 번쩍하고 추억을 비춰주는 일상의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 보통의 아침처럼 커피를 내리며 커피향을 맡으며 잔도 받침도 두터운 커피잔에 담아 한모금 마시니 순식간에 머리 속에서 '순간이동'이 일어납니다 

여행갔던 도시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2019년 가을의 나로...

저는 그곳에서 투박하고 묵직한 커피잔의 입술에 닿는 촉감에 흐뭇해하며 진하다 못해 크레용 잘게 부셔서 녹인듯 텁텁함이 매력인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어요 

밖에는 아침을 시작하는 현지인들이 바쁘게 자기 갈 길 가고 있고 카페 안에는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커피를 만들고 주문한 고객의 이름을 부르고 커피향 가득한게 활기가 넘쳐요 

그때의 그곳의 느낌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한 10초간 시간을 거슬러 후다닥 바다건너 여행을 합니다 

하루에도 몇잔씩 커피를 마시고 수많은 카페에도 갔었는데 오늘 콕찝어 '그곳'이 떠오른게 신기해요  

제 몸이 커피잔의 촉감과 커피의 맛과 그 커피를 마실 때의 날씨 등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 모든 것이 가장 비슷하게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그 기억을 소환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어느날 귀가하다가 유리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어요 

집앞에 공사를 하느라 자잘한 소음들이 있거든요

순간 그 유리와 쇠가 낸 소리는 귀를 뚫고 뇌를 지나가 어릴 때의 저를 불러냅니다

7-8살때쯤, 제가 무슨 일인지 아파서 끙끙거리며 누워있는데 겨울이었는지 방안에는 기름넣고 천으로 된 심지에 불붙여 작동하던 난로가 있고 옆에서 아빠가 제 이마에 수건을 갈아주고 계시네요 

제 남동생은 난로 옆에서 파랗고 빨간 무늬가 들어간 푸르스름한 유리구슬로 구슬치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다 그 유리구슬이 툭 튀어 난로의 가장자리 둥근 홈에 들어가 또르르 굴러갑니다

꽤나 아파서 정신 못차리던 저에겐 그 소리가 칠판에 분필을 잘못 긁었을 때 나는 소리만큼 괴로운 소리로 새겨졌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팔에 소름이..)

그 이후 그 기억은 유리와 쇠가 긁히는 소리를 들을 때 불쑥 떠오르고 그럴때면 저도 모르게 몸이 아픈 것처럼 느낍니다 

 

 

- 최근에 길을 가다가 훅~하고 코를 건드리는 냄새가 있었는데 그 냄새를 맡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중얼중얼

"앗 이거슨 고등학교때 학교 앞 ㅇㅇ분식 알감자 냄새다 ~ ㅎㅎ"

에그샐러드 샌드위치와 알감자 볶음으로 유명했던 그 집은 뭔가 다른 1%가 있어서 옆동네 학교 학생들도 몰려와서 먹던 유명한 집이었죠 

그 분식집 주인 아주머니가 거봉 포도알 크기의 기름에 굴려 번들번들한 알감자를 굵은 소금과 함께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 우리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나던 바로 그 냄새를 맡은거죠

그때부터 저는 길을 걸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그 분식집으로 날아가 친구들과 조잘거리며 샌드위치도 먹고 알감자도 한입에 쏙쏙 넣으며 역쉬~ 이맛이야!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아.. 행복해요 ^^

요즘 널리고 널린 버거집에 가도 감자튀김 냄새를 얼마든지 맡을 수 있는데 희한하게 학창시절 그 분식집 알감자 냄새는 아니예요 

 

 

 

이렇듯 저의 기억을 소환하는데는 정확한 비율과 조합의 레시피가 있는게 분명해요 

그 레시피가 정확할수록 기억 혹은 추억은 날카로워요 

하지만 어떤 추억들은 날카롭게 기억하고 싶은데 아직 레시피를 못 만났어요 

제 아이가 아가 때 제 배에 안겨 짧고 통통하고 보드라운 팔로 제 목을 감싸고 또닥이던 온기와 촉감..

치매에 걸리셔서 지금은 나눌 수 없는, 엄마의 또랑또랑 밝고 유쾌한 목소리로 시간가는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나누던 대화..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저를 볼 때마다 "고맙다~" "사랑한다 우리딸~" 하시며 아기처럼 웃으시던 아빠의 목소리와 환한 미소....

날카로운 추억이 건드려질 때마다 행복할 때도 많지만 때론 아쉽기도 합니다 

컴퓨터 파일 목록에서 최근 클릭한 것들은 제일 위에 뜨고 오랫동안 클릭하지 않은 것들은 자꾸 뒤로 밀려나듯 그 기억들이 나중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될까봐 

 

 

 

 

IP : 59.6.xxx.68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23.9.23 9:30 AM (219.248.xxx.133)

    한편의 수필이네요. 주말아침 잔잔한 감성 채우게해주셔서 감사해요. 글로 표현을 참 잘하시네요.

  • 2. ...
    '23.9.23 9:30 AM (112.156.xxx.249)

    묘사력이 남다르십니다.
    전 음악이나 냄새에 추억이 소환됩니다.
    그때 그당시의 상황이 훅 들어오죠.

  • 3. 추억의 단상
    '23.9.23 9:47 AM (49.171.xxx.187)

    추억속 그 무엇

  • 4. 그린
    '23.9.23 10:07 AM (220.125.xxx.200)

    안녕님과 같은기억에의 복귀는 누구에게나 가끔일어나는 일이지만, 대부분은 낡아서 잘 가릴수없는 흑백사진 이야기처럼 뿌옇고 흐리멍텅하고 이런듯저런듯
    소환의 실체가 모호하기 마련이고 더구나 제3자한테 전해질땐 더 아득해질 뿐인데, 안녕님은 천연색 동영상처럼 읽는이들을 같이옆에 있는것처럼 느낌을나눠주시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그 호롱을 살짝들고 심지에 불이붙게끔 적셔주던 석유를 사러 친구와 대두병을 들고 철길을 따라 십리길을석유사러가던 때를 생각나게 하시네요.
    불과 60년대중반 서울변두리대부분은 호롱불을키고 19공탄 연탄이 보급되기전 장작을 땔때입니다.
    불과 저도 공감가는 10년아래위의 세대시네요.
    혹 작품명이 있으시다면 공개해주세요
    서가에 올려놓고 가끔 번뜩이거나 날카로운 금속성의소음이 어땧는지 같이그려보고 싶네요...

  • 5. 계절이
    '23.9.23 10:29 AM (59.6.xxx.68)

    바뀌긴 했나봐요
    더위에 눌려 정신 못차리고 힘들어하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파래지니 슬슬 이 생각 저 생각이 나니 말이죠
    맞습니다
    보통은 그랬었지.. 하며 아주 짧게 지나가곤 하는데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순간 어질.. (원글에 순간이동을 느낀 시점)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제가 그 기억 속 장소에 간 착각이 들어서 신기해서 써봤어요
    얼마나 강렬하고 선명하고 현실적이던지..
    그렇게 추억소환 공식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일이 흔치는 않겠죠
    그러다보니 예전 기억도 떠오르긴 하는데 선명하진 않아서 갈증도 생기고…
    아이들 다 키운 부모들이 종종 얘기하잖아요
    아기들 꼬물대던 때, 혹은 엄마 껌딱지로 재롱피우던 그 시절로 하루만 돌아가보고 싶다고..

    난로 얘기는…
    요즘 사람들은 모르겠죠? ㅎㅎ
    저도 국민학교 시절, 아빠가 기름통에 기름을 담아 오시면 가운데 솔방울 모양의 빨간 손잡이가 있었고 튜브 두개가 ㅅ 자로 갈라져서 하나는 기름통에 하나는 난로의 연료통 입구에 담그고 손잡이를 뿍뿍 누르면 기름통에서 난로로 기름이 옮겨가던 기억이 나요
    그 난로에 주전자 올려놓고 겨울이면 귤껍질 넣어 귤차도 만들어 마시고 (지금 귤냄새가 기억 속에서 살아나네요 ㅎㅎ) 설 즈음엔 가래떡 썰어서 난로 위에 올려놓고 빠방하게 부풀어오르면 조청에 찍어먹으며 행복해하던 시절이죠
    이제는 더이상 기름도 없이 난로 위에 구운 가래떡 정도로는 그만큼의 충만을 느끼기 어려운 시절이 되버린 것 같아요
    획기적이고 기발한 것들이 훨씬 많은데, 몸도 그 시절보다 훨씬 편한데도요
    시끄럽고 신경이 곤두서는 사회가 되서인가 자잘한 일상의 기억들을 자꾸 끄집어내고 싶어집니다

  • 6. 그린
    '23.9.23 1:29 PM (220.125.xxx.200)

    지금도 그호스는 철물점 에서 팔고있을정도로 유용한도구인데요~
    석유난로를 쓰섰다면 지역이 서울이라도 70말이나 80년대초이겠네요.
    저의 집이 문화혜택을 못받았는지는 몰라도 60년대에는 석유 난로나 곤로를 못봤네요
    제가 아로있는 82의 성향상많은 공감댓글이 달릴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요.
    내가 잘못알고있는건지...
    그럼에도 전 이번글 너무 좋습니다.
    마치 써 놓으신 글이 많을것같아서요...

  • 7. 그린님
    '23.9.23 5:54 PM (59.6.xxx.68) - 삭제된댓글

    괜찮으시면 저에게 82 쪽지 주시겠어요?
    공감할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래 링크 클릭하시면 82 줌인줌아웃 글이 나오는데 거기 작성자인 ilovedkh 클릭하시면 쪽지보내기가 뜨니 그걸 이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7&num=3710013&page=1

  • 8. 기억의 집
    '23.9.23 11:09 PM (58.123.xxx.226) - 삭제된댓글

    최근 기억은 돌아서면 잊어버라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히려 선명합니다.그때에 난 그냥 '나'이기만 해도 되니까. 순도높은 시절이어서 그랬을까요.

  • 9.
    '23.9.23 11:43 PM (59.6.xxx.68)

    기억의 집님 댓글이 와닿네요
    새 종이는 그 위에 뭘 그려도 선명하고 뚜렷하고 눈에 들어오지만 물에도 젖었다 마르고 닳기도 하고 이미 다른 낙서가 이미 가득한 종이에 덧쓰는 글씨나 그림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고 의도한 형태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나이기만 해도 되는 시절을 생각해보니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요

  • 10. ..
    '23.9.24 2:01 AM (110.45.xxx.201)

    아... 이 글을 읽는데... 눈물이 납니다. 저도 님처럼 나의 가억에 멋진 표현을 할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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