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양심을 팔고사는 걸스로봇 이진주
권 선배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분이어서요. 모처럼 돌아온 그의 글을 읽자니 어떤 동의나 비판에 앞서, 그냥 마음에 내내 얹혀있던 십년 전 편집국의 풍경이 그려지고야 말았습니다.
*
십 년 전 저는 중앙일보 기자였습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서 시위대 반대편에 서고, 용산 참사 유족 분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 씨를 취재했습니다.
나이 서른에, 메이저 언론사로는 아마도 처음으로 애엄마 수습기자로 들어가, 조직에 충성하고 선배들의 사랑을 받고자, 제 손에 여러 번 피를 묻혔습니다.
죄송합니다.
*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분노해서 시위대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성난 시민들이 “조중동 아웃” “개와 조중동은 출입금지”를 외치던 2008년 초,
저는 중앙일보 44기 공채 기자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하나 낳고 나이까지 서른이 꽉 차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었기에, 저를 뽑아준 조직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지금은 “기레기”라고 싸잡아 욕을 먹지만, 사실은 선배들도 동료들도 정말 좋았습니다. 삼성도 다녀보고, 국회도 구경했으나, 그처럼 우아하고 유능하며 지적인 이들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직을 믿고, 사람들을 믿었습니다.
성난 시위대 속에서 동기들이 고립되고, 매일 밤 거리에서 날 선 말들이 오갈 때, 일개 수습기자의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함께 취재에 나선 데스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 취한 시위대가 어린 기자들을 향해 소리지르면, “잘못했다” “죄송하다”고 대신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나왔습니다.
아직까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어린 것들이, 조직의 이름 때문에 한꺼번에 싸잡아 욕먹을 때는, 저희도 조금은 억울했습니다.
저희는 단지, 시험을 봐서 회사에 들어간 것뿐인데. 개중에는 시를 쓰는 친구도 있었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친구도 있었고, 그저 안정된 직장이 필요한 친구도 있었는데요. “왜 우리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느냐” “왜 대화의 기회조차 주지 않느냐”고 항변하려 들 때마다 그 데스크는 우리를 달래 끌고 나왔습니다.
“다치면 안돼. 여기서 누구도 다치면 안된다.”
그는 한 때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이였습니다. 누구보다 우직하게 조직에 충성했지만,”업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앵커를 했고, 지금은 아주 뜨거운 현역에서는 물러났습니다. 일년에 한 번이나 연락을 드릴까 말까 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 밤 그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고등학생 시위대라는 어린 친구들과 촛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새벽까지 토론을 했습니다. 어차피 집에는 못가고, 남대문경찰서 기자실은 돼지우리고, 저는 사우나 티켓을 끊어 겨우 씻던 시절입니다.
그 중 유독 이론이 풍부하고 화술이 대범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헤어질 무렵, 그 친구가 제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 이념 동아리에서 나온 친구였습니다.
당혹감이 지나간 뒤에는 배반감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왜 했을까.”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고민하다 당시 시경 캡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역시 제가 신뢰하고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캡이라는 위치는 현장의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선별하고 아젠다를 만드는 역을 했습니다. 조중동 데스크였던 그는 제게 “쓰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이걸 쓰면, 너무 많은 어린 친구들이 다친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기레기라고 비난받는 걸 보며, 그래도 누구 한 사람은 변호를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아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기레기인 사람은 오히려 드물 겁니다. 그는 제게 좋은 기자였습니다. 연락도 한 번 못해 보고, 개인의 능력이나 성정을 뛰어넘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만 여겼습니다.
수습을 시작하고 조금 지나 저에게는 경찰과 시위대의 정보가 동시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과는 유독 다른, 기이한 어떤 특성이란 게 있을 텐데요, 제게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상반된 성향의 사람들이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종류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보거나 들으려 하는 게 아닌데, 어쩌면 그것은 무당과도 비슷한 일일 겝니다.
그렇게 지위고하를 막론한 양측의 핵심 정보원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를 그러쥐고 있으면, 때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이중간첩 같은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사실은 제 존재부터가 그랬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온갖 것들이 뒤섞인 “키메라”라고, 정체를 모르는 “혼종”에 “잡종”이라고, 오래 생각해왔습니다.
*
저는 결혼을 통해 상위 중산층의 삶으로 본격적으로 편입했으나, 사실은 공부만 잘하는 “천출”이었고, 사춘기 시절 기생충의 “반지하방”을 오래 경험했으니 “로얄” 같은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조중동 기자가 되기 전에는 꼴보수 아버지를 뺀 온 가족이 “노빠”였습니다. 저는 노무현 탄핵에 폭주해 대학원을 작파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실에 들어간 뒤, 총선 승리를 지켜보곤 미련 없이 물러나와 석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산층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전라도 광주의 가난한 정치 낭인의 딸이었고, 무학에다, 교사에 의한 미성년 성폭력의 생존자이기도 했습니다.
외가는 당연히 모두가 김대중의 사람들이었고, 저도 자연스럽게 노무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근본 없음”이 닮았으니까요. 제 외사촌 오라비는 노무현 당시 최연소 청와대 행정관이었고, 지금도 정권 실세 누군가의 친구라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로얄로 신분 상승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력서에 올라가거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펙들은, 저의 본질을, 비밀을, 우울을, 그림자를, 그러니까 달의 뒷면을, 섬세하게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늘 무언가를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는 듯,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때론 지주보다 더한 마름처럼 앞장서 위악을 떨기도 했습니다.
진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 건, 마흔을 넘겨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입니다. 제 마음이 부대껴 더는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근본을, 제 계급을, 제 자신을 배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씻을 수 없는 업보가 되었습니다.
*
용산의 정보를 받은 것은 한 형사로부터였습니다.
저는 사람의 목숨값을 돈으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게 어느 쪽에서 어떤 목적으로 생산된 정보인지를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지면 판형을 바꾸고 특종 한 방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좋아하고 따르는 워킹맘 선배들이 아름다운 교육정책 기사를 기획했지만, 조직은 스트레이트를 원했습니다.
그때 데스크는 아까와는 다른 분이었는데요, 저는 그 데스크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습니다. 그가 기죽어 있는 게 싫었습니다. 저를 신뢰하는 그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용산의 비극을 쓰면서는 다시금 분열을 느꼈습니다. 저희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편 중에는 개포동 구룡마을의 “하꼬방”이 있었습니다. 재개발이란 말을 듣자마자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이 떠올라 괴로워졌습니다.
그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엄마는 무리를 해서 저와 동생을 영어 수학 보습학원에 보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학원 차가 구룡마을까지 들어오는 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엄마는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실용적이고 안전하게 다니는 걸 바랐을 뿐.
별 같은 눈빛을 가진 남자아이가 저를 위해서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던 저녁이었습니다.
허름하고 다닥다닥한 “난쟁이”들의 집에, 학원 차가 우리 남매를 내려놓자, 남자아이 하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습니다.
“허, 진주 너 여기 살았어? 공주인 줄 알았는데 그지였구나.”
저는 그 때 제 동생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응, 나 여기 살아. 그래서 뭐? 우리 집안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너희 집안은 너로 인해 끝날 거야. 똑똑히 기억해 두길 바래.”
그리고는 더 이상 그 학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별 같은 눈의 소년은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용산의 기사가 나간 뒤, 유족들의 편에 섰던 대학 선배 하나가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조각 같은 미모로 유명했던 법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어 탄성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 종류의 사람이었고요.
사시를 보지 않고 여태 빈민운동을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박하게 나이들었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제게 짧게 물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만, 사과할 때를 놓쳤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용산의 비극을 다룬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읽고, 온통 불에 타는 악몽을 꾸며, 다시금 알았습니다. 이 손이 쓰지 말아야 할 것을 썼다는 것을.
며칠 전, 그 트라우마로 돌아가신 분의 기사를 읽고 다시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일부가 된 건,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하느님의 실수 같습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이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일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십 년이 되어도 이 일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평생 그럴 겁니다.
어느 날, 데스크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
가방에는 여권이 있었고, 저는 일을 잘했고, 모든 것이 남들보다 조금씩 빨랐습니다. 저보다 훨씬 유능했던 선배도 구하지 못했다는 표를 구하고, 남편과 아이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아침에 출근했던 그 차림으로 건너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노건호 씨를 취재하라”고.
제게는 마침 스탠포드의 친구들이 있었고, LG의 친구들이 있었고, 국정원과 검찰과 경찰의 모든 곳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저밖에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저를 아끼던 데스크가 만약에 진짜 제 모습을 알았다면, 결코 시키지 않았을 일이었기도 했습니다.
팔로알토에서 저는 서른 명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노건호 씨의 집, 회사, 자동차, 투자, 여행, 골프 모든 사소한 것들을 탈탈 털어 말해주었습니다. 언제 어느 비행기를 타고 누구와 어디를 다녀왔는지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대통령의 아들과 다투어 어울렸던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모두 다 말씀드릴게요. 제 이름은 빼주세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망하고도 슬펐습니다. 사자의 새끼가 고작 이런 자들과 어울렸다니. 그의 아비는 우리 가족의, 저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의, 우상이었는데, 그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아 참담했습니다.
술에 취한 그의 아들을 인터뷰하고, 며느리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로 불이 났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은 타사의 선배와 동료들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진보 거물 기자 하나는 “휴, 잘했다.”라며 비난, 격려, 아쉬움, 안타까움,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한숨을 쉬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숭배하는 꼴보수 아버지가, 어느 날 미국까지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거, 그만 해라. 시골서 밀짚모자 쓰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 보기 좋더라. 이제 그만 해라.”
“아버지, 알아요. 근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전화기를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 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저의 데스크들도 모두 알았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사는 그렇게 나갔습니다.
제가 쓴 것들과 제가 쓰지 않은 것들로 세상의 모든 비난을 들었습니다. 목숨까지 위협받을 때, 친구들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진주야, 제발 네가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해.”
“내가 댓글을 달까? 너 그런 사람 아니라고 내가 댓글을 달까?”
그 때 저는 말했습니다.
“아냐, 내 이름이니까, 내가 함부로 내 이름을 빌려주었으니까, 대가를 치를게. 괜찮아. 너까지 다치지 말고, 그냥 내가 다 받을게.”
그 때도 우리 선배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사람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진보는 부패의 크기가 아니라, 부패했다는 사실 자체로 무너진다.”
그 말들이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지향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을 적은, 익명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들은 무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몇 번은 침묵했지만 저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저도 유산을 하였다고.
그 계정으로 다시는 메일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하혈이라고만 밝혀왔지만, 그 때 저는 아마도 아이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 달 내내 하혈을 하면서 아이가 사라진 것을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제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참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퇴사를 고하고 한 달 동안 집에 누워있는데, 매일처럼 저희 집에 들러 죽을 사주며 함께 울었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죽어버릴까 봐, 데스크가 선배를 저희 집으로 출근시켰던 겁니다. 그 선배가 요즘 그럽니다.
“진주씨, 십 년 전이랑 똑같구나. 내가 죽 사주고 싶다.”
저는 온 국민의 우상을 제 손으로 무너뜨렸고, 매일, 매순간, 그의 죽음을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제 손에 묻은 피를 다 닦아내지 못할 것을 압니다. 몇 번 이 일을 고백한 바 있지만, 평생 동안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죄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서른 살의 죄가 마흔 살의 죄로 다시 돌아온 지금, 그 죄를 부인할 마음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역사의 죄인이며, 그 트라우마를 안고 어떤 방법으로든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
시간이 흘러 조직을 떠나고 보니, 조금 더 선명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기사를 쓰는 일부 후배 기자들을 볼 때 저는 안타까웠습니다. 시를 쓰고, 세상을 바꾸고 싶고, 그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은 어린 친구들이, 조직 속에서, 조직의 좋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죄를 지을 때, 십 년 뒤 저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만큼은 아니어도, 평생 그 이름과 살아가야 하는 친구들 때문에 슬펐습니다. 그들은 꼭 과거의 저 같았기 때문입니다.
노회찬 때도, 김용균 때도 그랬습니다. 슬펐습니다.
그 때도 제 미래를 조금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판사 한 분이 저를 불러 말씀하셨죠.
“앞장 서 칼을 휘두르다 화살받이가 되지 마세요. 로얄들은 손에 피 안 묻혀요. 어쩌려고 그래요?”
*
광우병과 용산과 노무현을 거치며, 사람이란 얼마나 모순적이고 오류가 많으며, 가슴 아픈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죄가 얼마나 큰지도 새록새록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조직 때문에, 사람 때문에, 스스로에게 거슬리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교사에 의한 성폭력 생존자의 딸이어서, 이 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웅크려 유예된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1. 관심없다
'19.7.9 8:39 AM (82.43.xxx.96)이진주 노이즈마케팅인가요?
누가 이진주 인생사를 궁금해한다고 이리 자기 피알을 할까요.
우리 그냥 신경 ㅁ끊어줍시다.
딱 두가지에요.
세탁하고 정치 입문, 자유당이면 이리 세탁시도 할리가 없죠.
비영리단체 설립해 후원.
그냥 무시하는게 장땡2. 양심고백은무슨
'19.7.9 8:40 AM (175.223.xxx.218)가난했던 자신의 어린시절 읊음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동질감을 주고, 지금의 자기 위치는 생존본능이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미화하고 있는 인간, 순간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나는 늘 고민해왔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안고 살고 있다며 면죄부를 얻으려는 얄팍한 속내, 당신은 중앙일보 기자일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양심팔이에 불과하다.
3. 일리있는말
'19.7.9 8:44 AM (175.223.xxx.218)첫댓글님 말씀도 일리있네요. 이 글은 쓴 건 양심고백이란 헤드라인 때문이었어요. 헤드라인만 읽은 분들을 위해서요. 그리고 페북에 남기면 기록이 되니까요. 이진주의 본래 의도를 간파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꼭 있어야겠다 싶어 썼습니다. 양심팔이 소녀라는 기록이요.
4. ㅎ
'19.7.9 9:02 AM (123.212.xxx.56)진지하게 읽지도 않앟지만,
뭐 이런 신파에
진정성이라곤 1도 없는 교활한 뱀같은 글은 뭐죠.
아~
뭔가 기분 더럽다.5. ...
'19.7.9 9:22 AM (175.223.xxx.31)중앙일보 이진주. 이게 본문이군요
이따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6. 뭐야
'19.7.9 9:35 AM (219.92.xxx.6)그래서 깊게 참회를 한다는 얘긴가요 자긴 잘못 없단 얘긴가요. 참 구구절절
7. ㅇㅇ
'19.7.9 10:36 AM (14.32.xxx.252)반성은 남들이 볼수 있는 일기장에 감성팔이 고백을 하는걸로 그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참회는 피해자나 그 남은 가족 앞에가서 무릎끓고 사죄드리고,
그 가해자 조직이 아니라고 발뺌할때 남은 증거를 가지고 나서서
역사의 심판대위에 그들을 낱낱이 까발리는 겁니다.
지금처럼 자기연민에 가득찬 글로 반성중이라고 표시하며 사람들오 부터 자신이 위로받으려한다면 어느누구도 그 반성을 이해해주지 않을 겁니다. 나도 노통의 서거로 상처입은 피해자이고 이진주 당신의 소위 ‘반성같지 않은 반성’에 분노를 느끼고 있거든요.8. ^^
'19.7.9 9:52 PM (119.70.xxx.103)졸지에 맹자엄마가 된 저와 ‘스칸디 대디’를 꿈꾸며 제주행을 주도한 남편 ‘곰돌씨(휴대전화 코드명: 곰도리)’는 모두 ‘강남키드’였습니다. 영화 의 얄미운 강남 선배 기억나시죠? 서울 강남의 동네 몇을 묶어 ‘압서방(압구정동ㆍ서초동ㆍ방배동)’이라고 불렀잖아요. 소나타를 몰고 다니며 ‘게스’ 짝퉁 티셔츠를 입은 남자 주인공을 비웃기도 했고요. 저희 부부 역시 압서방 출신이었습니다. 압구정동ㆍ청담동의 진골ㆍ성골까진 아니었지만, 서초동ㆍ방배동에서 비교적 곱게(?) 자랐지요. 방배동 카페골목이 청담동 가로수길 못잖은 핫플레이스일 때 얘깁니다.
저희 때만 해도 대치동이 지금 같은 지위를 누리진 않았습니다. 학원 뺑뺑이란 말도 없었고요. 대치동 학원 뺑뺑이는 몰라도 동네 영어ㆍ수학학원 정도는 다녔고, 대학생 과외도 친구들만큼은 받아봤어요. 둘 다 재수를 하긴 했지만 무사히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 저는 신문기자, 남편은 안과의사가 됐습니다. 저희가 누려온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조건이었죠. 얼마 전까지는 그런 삶이 당연한 걸로만 생각했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저희가 자라온대로, 적당히 일하며 아이 키우면 되는 줄 알았던 거죠.
아이 제주국제학교 보내시면서 반지하 학생됐다가 강남키드도 됐다... 때에따라 글에서 부자도 됐다 가난한자도 되시니... 참... 소설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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