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파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스토리로 저를 낳으셨어요.
번듯한 외모의 남자가 시골 출신 처녀를 꼬여내 연애하면서
임신과 낙태를 수차례 시키고
그러면서도 남자 쪽에서 결혼을 반대해서 계속 결혼하지 못하다
결국 제가 태어나고 몇 년 뒤 정식으로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저는 태어난 지 3년 뒤까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구요.
(성인이 된 이후에 주민등록초본 떼다 알게 됐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엄마의 시집살이는 심했어요.
할머니와 고모들의 구박이 심했고 엄마는 거기에 대항할 자존감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새로 구성한 가족보다 원가족이 더 중요했고,
가족의 방어막이 전혀 되어주지 못했구요.
저는 항상 아버지 쪽 식구들을 만날 때마다 부적절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아서
원래도 내성적인 성격에 어린시절 항상 좀 위축되어 있었어요.
게다가 아버지는 항상 바람을 피웠고 엄마가 매달리는 쪽이어서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의 불안과 히스테리로 가득 차 있었고
그걸 지켜보는 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겠죠.
항상 저를 붙잡고 울거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어요.
일종의 감정 쓰레기통이었겠죠.
저 뿐만이 아니라 엄마는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과 슬픔을 하소연하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루종일 전화를 붙잡고 울면서 얘기했구요.
제가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건 말건,
그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었고
저는 엄마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그게 스트레스였어요.
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얘기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제가 국민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음주운전을 해서 교통사고를 냈을 때에요.
본인도 거의 죽을 뻔 했죠. 수술도 엄청 많이 하구요.
저희 엄마는 그때 제 동생을 임신중이어서 엄청 힘들었구요.
당연히 병원에 아버지 식구들이 왔는데
고모들이 와서는 저를 보고
'저 년이 죽었어야 했는데 우리 동생이 이런 사고를 당했다'라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 집 식구들이 매사 그런 식이었어요.
그 얘기를 저한테 직접 한 건 아니고 엄마 있는 데서 했는데,
저희 엄마가 나중에 그걸 또 누구한테 하소연하면서 얘기하는 걸 제가 옆에서 다 들었다는 거죠.
그땐 어릴 때라 고모들이 미웠는데,
좀 커서 생각해보니
왜 우리 엄마는 그런 얘길 여기저기 떠들면서 내가 그 얘기를 알도록 했지?
왜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런 얘기를 그냥 듣고 있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도 미워졌어요.
물론 엄마는 그때 아버지 식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죠.
두번째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면서 말하길,
점쟁이한테 점을 보러 갔더니
첫째(저)는 부부 사이를 갈라놓는 존재지만,
이 다음에 애를 낳으면 그 애로 인해서 부부 사이가 좋아질거라고 했다고,
그래서 제 동생을 낳았다고 얘기하는 거였어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열 한 살 정도였는데 엄마가 너무 미웠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입밖으로 내는 것도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엄마한테도 이 얘기를 해본 적은 없어요.
자라면서 엄마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자라면서 엄마에게 무시의 감정이 들기도 했고,
거기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거에요.
당연히 아버지가 미웠지만 또 엄마가 실제로 밉기도 했고
집안의 권력이 아버지에게 있으니 거기에 편승하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이었어요.
아버지는 사고 여파도 있고 본인 기질도 있고 해서
한 직장을 진득하게 다니지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 옮기 다니면서
식구들을 고생시켰고 이혼하기 직전까지 바람을 피웠어요.
결국 이혼도 아버지가 요구했고 엄마는 위자료도 못받았구요.
자식들이 자기 편을 들지 않자 머리를 빡빡 깎고 와서 죽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두분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그 이후 재혼했어요.
나름 대학도 나왔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멀쩡히 잘 살고 있지만
저는 제 뿌리가 썪어있다고 느껴요.
어린 시절에 행복했던 기억이 단 한순간도 없고
항상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살았고,
지금도 신경증과 강박이 있어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멘탈이 나갈 것 같아요.
20대는 어찌어찌 밝게 지냈는데,
30대 후반이 되고 체력과 에너지도 떨어지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면서 힘들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아요.
문제는 두분 다 저랑 가깝게 지내고 싶어하시는데,
저는 그게 너무 버겁고 싫어요.
머리로는 항상 이 모든 것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해요.
나는 사실은 엄마도 싫고 아버지도 싫은 거다.
그리고 나의 원망은 어쩌면 엄마에게 더 강한데,
엄마는 상대적으로 약자이고 혼자 살고 본능적으로 엄마를 부정하는 건 할 수 없으니
그 원망을 아버지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비겁한 일이다.
엄마는 그때 너무 약했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없는 상태였으니 나를 보호할 수 없었다.
부모의 일이기는 하나 동시에 남녀의 문제이니
내가 이렇다저렇다 하게 평가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으며,
밥을 굶기거나 신체적 학대를 한 건 아니었고
대학까지 교육도 시켰으니 부모로서 역할은 다 한 것이지 않은가...
이런 자기분석과는 별개로 그냥 싫어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예전에 가졌던 원망이나 옛날에 나한테 왜 그랬나 하는 의문 따위도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싫어요.
실제로 연락도 저는 전혀 하지 않고 전화가 와도 잘 받지는 않는데,
한번씩 연락이 오면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하던 일도 다 놓아버리고 싶어요.
그냥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저희 아이 얘기를 하면서 보고싶다, 만나고 싶다,
옷을 사주고 싶다라고 이야기하거나
먹을 것을 들고 불쑥 찾아오니 미칠 노릇이구요.
심할 때는 왜 내가 아이를 낳아서 이런 일을 겪나 싶기도 하고
제 아이도 싫어질 때도 있어요.
이러다 아이를 상대로 상처를 주겠구나 싶을 때도 있구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치사하지만 구구절절히 하고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게 저한테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더 후회하게 될까요?
쓰고보니 너무 기네요.
울고 싶기도 하고,
울면 바보같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이 해묵은 감정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