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박정희기념관 점거했다 연행된 분들 글입니다
5월 19일 청년좌파 투쟁지침.
방금 5명의 회원이 박정희 기념관 앞에서 신자유주의자의 퇴진, 권력과 이윤 추종 보도 중단 및 공영방송 이사진 사퇴, 선언 동참을 요구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전원 연행됐다. 우리는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외침을 멈출 수 없다.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다. 연행자를 석방하라. 종교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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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우리는 신전을 모독하고 역사에 침을 뱉기 위해 여기에 섰다
우리는 박정희라는 인물이 현 대통령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사실에 일말의 관심도 없으며, 박정희 정권이 소위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따위에 대해 따질 생각도 없다.
우리가 모독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박정희가 아니라 우상으로서의 박정희이며, 이 우상은 신 그 자체도 아니다.
우리가 엎고자 하는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의 신을 섬기는, “생명보다 이윤을”을 교리로 하는 국교(國敎)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경제”라는 주문 앞에서 인권도 생명도 그 무엇도 양보되어야만 했고, 그 어떤 정권도 이 교리를 부정한 바 없다.
인간은 화폐와 마찬가지로 숫자로 취급되어야 했고 심지어는 비용으로 환원되어 왔다.
화려한 건물을 세우기 위해 도시 빈민이 치워지고, 공업입국을 위해 농민이 치워지며, 경제살리기를 위해 노동자가 치워지는 것은 매우 당연한 전통이다.
한 인간의 생명조차도 이제는 “1”이라고 표기하면 충분하다.
여전히 경제논리에 따라 파병은 정당화되며, 여전히 경제발전을 위해 인간의 희생은 감수된다.
그리고 도구이자, 인간을 조구로 삼는 자인 우리들은 “도대체 그럼 누구를 위한 경제발전이냐”는 의혹조차 가지지 못하는 광신도가 되었다.
우리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구해내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무능”에 대해서 굳이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왜냐면 그들은 이윤이 생명보다 중요한 사회를 고집해온 참사 주범들이기 때문이다.
이윤을 위해 안전이 절약당하는 사회를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참사가 일어난 마당에도 “규제 완화” 따위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에 의한)“탄핵”을 주장할 생각도 없다.
왜냐면 국회도, 제1야당도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낸 주범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공무원들의 “부패”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부패가 아니다.
아무것도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교리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우리들 자신은 또 어떠한가? 생명은 이윤보다 소중한가? 진정으로 그러한가? 타인의 생명은 나의 이윤보다 소중한가? 외국인의 생명은 나의 이윤보다 소중한가? 백인은 어떤가? 흑인은 어떤가? 일본인은 어떤가? 히스패닉은 어떤가? 타인의 생명은 이 나라의 경제성장보다 소중한가? 아니, 우리는 당신의 이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신문의 사건사고 소식에 등장하는, 1이라는 숫자에 대해 묻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라크인이라거나, 예를 들면, 이주노동자라거나, 예를 들면, 장애인이라거나, 예를 들면, 우리 집에 전기를 가져다줄 송전탑을 짓기 위해 희생되는 밀양주민들이라거나,
예를 들면, 우리 집에 안전하게 전기를 가져다 주기 위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지어진 핵발전소 주변 주민이라거나, 예를 들면, 25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쌍용차 해고노동자라거나. 세월호 참사를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추모집회에서 “우리 아이들”을 부르짖고, “아이들을 살려내라”고 말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어른과 아이, 한국인과 이주자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희생이 일어났건만 말이다.
우리는 혹시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이 슬펐던 것 아닌가?
나머지는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였던 것 아닌가? 생명은 중요한가? 몇 사람부터?
시대의 화두가 된 “가만히 있으라”는, 단지 부패한 정치인, 무능한 정부를 의미하는 말만은 아니다.
생명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이 신자유주의 체제 신봉을 그만둘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에 답하지 않고, 이 물음은 해결될 수 없다.
오로지 과거로 돌아가는 것으로, 오로지 하나의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경제성장”에 목을 매달기 시작했던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한결같이 걸어왔던 이 길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기 전에는, 우리는 이 “가만히 있으라”는 세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절벽으로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이 열차의 진로를 가만히 둔다면 기관사의 목을 아무리 갈아끼워도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에 불과하다.
기관사는 절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속도를 높이자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고, 승객 중 일부는 전 기관사는 이렇게 예의 없게 운전하진 않았다며 그리워하고 있다.
어떤 기관사 지망생은 자기가 새로운 운전법을 구사할 줄 안다는 말만 3년째 중얼거리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일단 기차 문을 열고 이 망할 사신 같은 놈들을 다 밖으로 내던지는 일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꿔야 할 것은 기관사의 숙련도도, 예의범절도, 운전법도 아니다.
문제는 방향이다.
당신에게 상식이 있다면, 기차를 멈추고 방향을 돌려 절벽 반대쪽으로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방향을 바꾸는 것만은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 숙련도와 예의범절과 운전법에서 해법을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생산성 없는 노력, 이 모든 것들이 곧 “가만히 있으라”는 세상의 명령이다.
그리고 이 명령에 더 이상 따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각 생명 사이의 유대를 끊고, 인간성의 상실을 선언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전을 엎을 수밖에 없다.
엎지 못하더라도, 엎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종교전쟁을 선포한다.
우리의 종교는 “이윤보다 생명을”을 교리로 하며, 어떠한 신도 섬기지 않는다.
우리의 주장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며, 어쩌면 흉측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인 기계가 되기 보다는 비현실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하나, 정계에 요구한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비롯해, 신자유주의자 모두 공직과 역사로부터 퇴진하라
하나, 방송언론계에 요구한다:
권력과 이윤만 추종하는 보도행태 중단하고, 종편만도 못한 공영방송 이사진은 사퇴하라
하나,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한다:
당신이 이윤보다 생명이 진정으로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거리로 나와 선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