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어떤 분이 위의 세가지 책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하시고
재미있게 줄거리를 적어주셔서 저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 역시 저 책들이 저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책들이었고
지금도 틈틈히 좋아하는 부분을 읽거나 관련 컨텐츠를 찾아보는 것이 취미입니다.
82에는 저와 같은 취향의 분들이 많으셔서 참 좋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제인에어 양장본 앞에 나온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와 목사관사진을 보거나
"바람에 나부끼는 황야의 히이드 같이"
라는 구절을 읽을 때 도대체 히이드란 식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하고
구릉지대는 어떤 모습일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폈었습니다.
돈피일드 저택과 로체스터씨가 말을 타고 달렸을 황야의 길, 그리고
캐서린의 오두막은 어떤 모습일지, 펨벌리의 숲과 다아시씨의 저택을
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으로 그려보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는 즈음에 더 늙기 전에 제 소녀때의 상상을 만나러
좀 무리를 해서 2년전 영국 중부 잉글랜드 지방을 혼자 여행을 갔었습니다.
먼저 상대적으로 교통편이 편한 오만과 편견 영화의 배경이 된 채스워스저택을
버스를 갈아타고 물어물어 찾아갔었는데
애석하게도 이곳에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씨를 만나기보다는
조지아나공작부인에 대해서만 잔뜩 알고 왔습니다.
영국국왕과 러시아 황제가 손님으로 머물렀던 엄청난 규모의 저택은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과
잘 다듬어진 정원과 그당시 기술로는 놀라웠던 분수가 있는 대연못 등 볼거리가 많았지만
리지와 다아시씨가 같이 거닐던 정원을 느끼고 싶었던 저에게는 아쉬움이 많은 장소였습니다.
당시에 저택에서는 현 데본셔 공작이 자신의 어머니의 생일을 기념한 회고전같은 것이
열리고 있었는데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 본 전공작부인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같은 여자로 태어났는데 인생 참 공평치 못하군하는 쓸데 없는 생각을 했읍죠.
하지만 책에서 리지가 언니 제인에게 펨벌리의 저택을 보고 나니
다아시씨에게 호감이 생기더라 하고 농담으로 웃으며 말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나같아도 그런 대저택에 살면서 나에게 잘해주려고 애쓰고 우울한 인상이지만 지적인 느낌의
날씬하고 키큰 남자라면 없던 호감이 마구마구 생길 것 같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은 정말 어렸을 때부터 가고 싶었던 하워스였습니다.
이곳은 아직도 예전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작은 마을로 가는 교통도 불편했습니다.
마을도 아주 작았고 묵을 곳도 예약이 안되어서 이웃마을의 옛저택을 개조한 유스호스텔에서 잤는데
커다란 저택의 어두운 삐걱거리는 마루, 4개의 이층침대가 있는 커다란 방에 투숙한 사람은 나혼자이고
저녁이 되어 창밖을 보니 불빛하나 안보이는 깜깜한 야경에 혼자 아! 제인에어가
돈피일드 저택에 왔던 첫날 느낌이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며
설마 내가 잠든 와중에 미친 로체스터 부인이 촛불을 들고 내 침대 머리맡를 내려다보진 않을거야
다독이며 잠들었습니다. ^^;;
비가 오락가락하는 음울한 날씨에 하워스 마을의 뒤편 언덕에 있는 교회와
교회뒤의 묘지, 그리고 묘지를 바라보고 서있는 작은 이층의 목사관은
어렸을 적 추운 밤 이불속에 엎드려 책을 보며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브론테자매가 날씨가 나빠 황야를 산책하지 못할때 책의 줄거리를 구상하며 서로 소설속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며 운동삼아 종종 거닐었다는 거실은 터무니 없이 작아 어이가 없는 동시에 왠지 울컥했고
거실의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바깥 풍경은 교회뒤편의 시커먼 묘지뿐이라
샬로트와 에밀리의 소설의 정서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라 공감했습니다.
잔뜩 가라앉은 기분으로 이층에 올라가 샬로트가 머물렀던 침실에서 그녀의 유품을 보다가
당황스럽게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졌는데
그녀가 만들다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신생아용 하얀 보닛 앞에서 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텐데
뱃속의 아이와 함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어렸을 적의 저는 미처 몰랐었고
보닛을 본 그 순간에야 알았기에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았습니다.
목사관 뒤편으로 드디어 제가 꿈에 그리던 히이드가 펼쳐진 넓은 구릉지대로
브론테 자매의 산책로라고 명명되어진 트래킹길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마음이 너무나 센치해져 이 감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데
오가는 사람들은 없고, 양들 뿐이고 참 외롭더군요.
사람들이 있어도 영어가 안되는 한계가 있네요;;
한시간 정도를 걸어 브론테 자매의 이름을 딴 아담한 폭포를 지나 양들이 다니지 못하게 쳐놓은 울타리도 넘고
가끔 양들의 응가도 밟으면서 언덕 위 캐서린의 오두막에 갔습니다.
폐허가 된 그곳은 양 몇 마리만 머물고 있을 뿐 사람이 사는 흔적이 오래전에 끊겼고
그곳 마당의 의자에 앉아 내려다본 구릉 저 아래지대는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폭풍이 치던 밤에 이곳으로 온 히드클리프를 생각하며 점심으로 싸간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고 있는데 저멀리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면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양들은 비를 피해 허물어진 담벼락 밑으로 들어가는데
조그만 우산으로 버티며 오락가락 하는 영국 날씨를 즐겼습니다.
날씨가 개어 캐서린의 오두막을 뒤로 하고 목사관으로 돌아오는데
발길이 안떨어져 가다가 뒤돌아보고 또 조금 가다가 뒤돌아보고...
언덕 위 홀로 페허가 된 집을 돌아봤습니다.
내 생전 언제 또 여기 올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음울한 하워스를 뒤로하고 다음으로 간 곳은 윈더미어 호수지방입니다.
리지와 삼촌부부가 호수지방 여행을 계획했다가 시간이 부족해 방향을 바꾼것이
펨벌리가 있는 더비셔지역인데 저는 호수지방을 보지 못해 실망스럽다는 리지의
발언에 '내가 대신 봐줄께' 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였지요.
과연 리지가 가고 싶을 만한 멋진 풍광을 지닌 베아트릭스 포터와 피터래빗의 고장은
포터의 집도 좋았지만 배에서 내려 포터의 집까지 걸어가는 한시간의 여정이 꿈결같았습니다.
아마도 리지는 다아시부인이 된 후에 그곳을 다아시씨와 여행했을 것 같습니다.
십대초반의 날카롭지만 감성이 하늘을 찔렀던 어린 나와 다시 만난 것 같고,
꿈에 그리던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제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생각나게 해주신 어떤 분의 글에 갑자기 센치해져 이 밤에 이런 말도 안되는 긴글을 적었나 봅니다.
적어놓고 나니 쑥쓰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