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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할 무렵,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회복시켜보겠다는 생각으로 남편은 오히려 한국에 사무실을 내고 사세를 확장시켜보겠다고 했고, 우리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 날짜를 정하고 항공편도 예약을 다 해놓고 날마다 짐을 싸면서 기대감보다는 오히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 8살, 6살, 4살, 그리고 두 돌이 채 안된 아이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여름방학 때 잠깐 다녀온 외갓집에 대한 기억 외에는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었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집은 어떻게 구하고,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면서 들어오는 수입을 정리해서 어떻게 해서든 이사 비용과 집 마련 비용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던 남편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걸 느끼면서도 설마 했는데, 하루는 남편이 도저히 이사 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다면서 난감해했다. 이사 날짜는 다 정해져있고, 집도 처분한 지 오래이고, 큰 이삿짐들은 이미 해외이주 전문회사에 다 보낸 다음이라 살림살이 하나 남아있지 않은 집에서 덩그라니 앉아서 한숨을 쉬어야 했다. 회사에서 받을 돈은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면서 그 돈이 들어올 날이 언제가 될지 알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다니던 학교에 이별을 고하고 아는 친구들 하나 없는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많이 상해있었다. 이제 와서 이사가 취소되었다고 하자니 아이들 보기에도 면목이 없었다. 편안하던 시절, 학령기가 아직 되지 않았던 막내를 제외한 세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만큼 극성을 부리던 나였지만, 당시의 상황은 설사 이사가 취소된다 해도 아이들을 원래 다니던 학교로는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회사의 수입을 기다렸다가 이사를 하자면 당장 사업에도 지장이 생길 상황이었다.
하루 하루 한숨으로 지내고 있는데 다니던 교회에서 같은 구역에 계시던 몇 분이 지나던 길이라며 찾아오셨다. 서둘러 커피를 뽑아 내가려고 하는데 커피 가루를 넣어놓는 통이 텅 비어있었다. 밥은 굶어도 커피는 먹어야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하고 살던 나였다. 혹시나 하고 냉동실을 열어 찾았지만 커피는 찾을 수가 없었다. 찬장을 뒤져보니 꼭 하나 남은 녹차 티백이 나왔다. 억지로 물을 조절해 두 잔을 만들어 내가고 남편과 나는 물을 마시겠다는 핑계를 대고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무슨 얘기인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질 않고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내 처지가 너무 기가 막혀서 눈물을 참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가실 차비를 하시면서 서울로 이사를 하는 거니까 짐이 되지 않을 것으로 선물을 샀다고 내주시는 작은 선물봉지를 손님이 가시고 나서 풀어보다가 나는 참고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봉지 안에는 고다이바 (Godiva) 커피백이 큰 사이즈로 두 개나 들어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다지 감동까지 되지는 않았을 선물이었지만, 나의 마음이 바닥을 치고 있던 그 날은 아무도 모르는 나의 깊은 갈증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여기서 절망하지 말고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보자는 생각이 조금씩 올라왔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남편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우리가 이사할 비용을 구했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사업관계로 알고 지내던 중국 사람 Liu 박사님이란 분이 사무실로 놀러왔다가 왜 그렇게 고민이 있어보이냐고 묻기에 사실대로 털어놓았더니 선뜻 그 자리에서 칠 만불짜리 수표를 써주고 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원래부터 부자인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생활이란 게 형편이 넉넉하면 대부분 투자를 하기에 현금이 그렇게 많기는 어려운데 두 말 없이 써주면서 자기 와이프에게는 비밀이라고 농담까지 하고 갔다는 그 분이 너무나 고마웠다. 같은 동네에서 계속 얼굴을 보고 있을 것도 아니고 당장 짐을 싸서 외국으로 나간다는 사람을 뭘 믿고 그 돈을 빌려주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나같으면 돈이 있다해도 어려웠을 거야. 참 대단한 사람이야."
남편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언제까지 미뤄질지 모를뻔한 이사가 예정대로 진행이 되고 나는 남편에게 그 분에게 종잇조각이긴 할지라도 차용증을 써드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우선은 2 년후에 오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언제 돌아올지 기약을 할 수 없는데 그냥 돈만 받아가지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찾아가서 이자의 액수도 정하고 상환 기한도 정하는 차용증을 쓰자고 말씀을 드렸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싫다고 했다. 자기는 남편의 성품을 그동안 보아왔고 틀림없는 사람임을 믿기 때문에 아무 약속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끼리는 이자를 받는 게 아니니까 받지 않겠지만 정 주고 싶다면 자기가 생각날 때마다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사주라고 했다. 언제 갚을 것인지도 정하지 말고 언제든 우리가 형편이 되면 그 때가 갚을 때라고 생각하라고 하면서 우리가 미리 마련해간 차용증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사간다고 정신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꼭 잊지말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라는 말도 덧붙였다. 남편과는 오래도록 일로 연결이 되었던 사람이었지만 나는 두 어 번 밖에는 만난 일이 없었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나와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으로 받은 칠 만 불을 우리 부부는 서울에 가서 예정했던 이 년이 지나고 또 이 년을 더 있다가 2006년에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갚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왔다. 갈 때에는 꼭 사업을 일으키고 돌아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끼니를 걱정할만큼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원금에는 미치지도 못하는 푼돈 백 불 씩을 생각날 때마다 Liu 박사님에게 보내주는 것이 우리 마음의 전부였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황폐해진 채 돌아온 미국에서 또다시 두 어 해를 더 고생을 할 일이 남아있는 것은 미처 몰랐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내내 그 분과 이메일로 연락을 하며 근황을 알리곤 했지만 그다지 기쁜 소식을 전할 일이 없으니 면목이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마자 집을 정하고 짐을 풀고 제일 먼저 Liu 박사님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와 함께 4년 전에 빌려간 돈을 아직도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송구한 얘기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 갚을 수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부부 두 사람이 아직 둘 다 몸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려는 마음이 서있으니 한 달에 얼마씩이라도 꼭 갚아나가겠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 그랬더니 전과 하나도 다름없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남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면서 그 분이 이렇게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갚고 안 갚고가 아니에요.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친군데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 넷을 데리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내가 왜 돈을 받아요. 더 도와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안됐네요.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동안에도 나는 당신 가정의 성실함을 줄곧 보아왔어요. 그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얼마라도 꼭 보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면서 참 많이 감동했어요. 그냥 소식을 끊고 말아도 되었잖아요. 내게 가져간 돈 칠 만 불은 이제 더이상 빚이 아니에요. 이미 다 갚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사이에서 잊어버립시다. 그저 당신 가정이 앞으로 어떻게 그 예쁜 아이들 넷을 잘 키울 것인지만 생각하세요. 그리고 행여라도 내게 미안하다고 연락 끊지 말고 우리는 항상 친구라는 걸 잊지 말고 소식 전해주세요."
남편도 나도 목이 메어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 분의 사무실을 나와서 집으로 오는 길에도 아무 말도 서로 하질 못했다.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 앞만 보며 눈물을 삼키고 있는 것이 역력했고, 나는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흘러내릴까봐 눈을 크게 뜨면서 침묵 속에 돌아왔다.
우리집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삶에서 감사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스무 가지씩 적게 한다. 아이마다 예쁜 공책을 하나씩 나눠주고 감사의 목록을 적어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자신의 목록을 가족에게 공개하게 하면서 각자가 인생에서 감사하고 자족하는 습관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한다. 얼마 전 가정예배 시간에 감사의 목록을 나누면서 그동안은 어려서 미처 알아듣지 못할 얘기라서 말해주지 못했던 Liu 박사님의 사랑에 관해 나누었더니 어린 마음에도 감동이 되는지 다들 눈시울이 젖었다. 사랑은 준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은 사랑을 남에게 꼭 나누어줘야 한다는 얘기에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한 아저씨의 사랑과 우정에 마음이 움직인 큰 아이 매 달 형편없이 적게 받는 용돈을 아껴서 World Vision 의 한 아프리카 아이를 매 달 일정 액수씩 보내 돕기로 했다. 매주 월요일이면 엄마가 예전에 일하던 가정폭력구조재단에 가서 희생자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돈도 많이 벌고 능력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공중보건의가 되겠다고 진로를 바꾸겠다고 선언을 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의 부모는 우리 부부인데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수많은 것들은 참으로 여러 곳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필요를 기가 막히게 채워주곤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부모로서 무능력하게 느껴질 수많은 순간들마다 어디선지 나타나 우리 부부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다시 한번 기운을 내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우리 부부를 아무 이유 없이 믿어주고 사랑을 보여준 Liu 박사님이 있다.
모든 고난에는 살아있기만 한다면 반드시 끝이 있다고 한다. 작년부터는 그래도 더이상은 바닥을 치지 않을 만큼 가정 경제에도 다소나마 볕이 비치고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인생살이에 우리 부부도,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도 그분처럼 누군가에게 댓가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가 꼭 오길 바래보는 마음이다. 다음 달에 돌아오는 추수감사절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Liu 박사님을 찾아가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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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leome
'09.10.28 9:20 AM이글을 읽으면서
저도 감사하는 마음을 적는 노트를 준비 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평 원망하는 어두운 마음일때
억지로라도 감사할일을 찾아서 감사하다 보면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밝고 맑고 환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지요
베풀며 나누며 아름다운 발자욱을 남기시는 멋있는 분 이야기속에
삶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2. 굿럭
'09.10.28 10:15 AM참 훌륭하신 분이네요. 제3자인 제가 듣기에도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저도 눈물이 나네요.
그런데, 한편으론 사람사이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은것 같아요. 그동안 동경미님 내외분께서 그분께 정말 좋은 사람, 동료이자 친구이셨겠죠. 칠만불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3. 동경미
'09.10.28 12:35 PMkleome님,
감사목록 노트가 저의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주었지요.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고 귀찮아도 습관이 되면 삶의 질이 달라지는 습관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한답니다. 늘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해요.
굿럭님,
정말 인품이 좋으신 분이에요. 저희 부부가 해드린 것에 비하면 그 분이 주신 사랑은 비교도 안되는 거지요.4. 평생감사
'09.10.28 5:45 PM올려주신 동경미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두해전쯤 "평생감사" 책을 읽고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누리고 살았던 소소한 일상 하나 하나 감사로 물들여지더군요.
그이후 평생감사 365 노트를 하나 구입해서 감사목록을 써오고 있는데 다른 분들께도 추천드리고 싶어요.5. 동경미
'09.10.28 9:35 PM평생감사님,
정말 좋은 걸 하시네요.
일상에 대한 감사만큼 좋은 자기성찰은 없지요.6. hap23
'09.10.29 10:41 PM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눈물이 절로 흐르네요...
그리고 감사노트.. 저도 한 번 실천해 봐야 겠습니다.
일상에 감사한다면 가정에 평화가 저절로 찾아올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