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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교환일기

| 조회수 : 2,067 | 추천수 : 175
작성일 : 2009-10-19 23:55:52
넷째 아이를 낳고 육개월 정도를 호되게 산후우울증을 앓았었다. 밥을 먹고 있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지는 일이 잦아졌고, 늦여름에 아이를 낳았는데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같았다. 산후조리를 하느라 일을 쉬고 있었던 때라서 하루 하루를 네 아이를 끌어안고 숨찬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했지만, 단순하게 육아로 인한 피로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상담을 받으며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음을 추스리려하다가도 고만고만한 여섯 살, 네 살, 두 살, 그리고 갓 태어난 막내를 보고 있으면 내가 과연 이 아이들을 잘 키워낼 능력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또 밀려왔다. 어쩌다 남편에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던지며 화를 내고 나면 아내로서도 나는 크게 실패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쏟아지는 것같았다.

그러던 무렵 남편이 어느 날 저녁 무지개빛 털실로 짜여진 하드 커버의 노트를 한 권 내 앞에 내밀었다.
"우리 교환일기 한번 해보자!"
그렇게 시작해서 생각나는 대로 서로의 마음에 있는 여러가지 얘기들을 털어놓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니 우리 부부에게는 유용한 마음의 통로가 되어주었다.  

일기장을 앞에 놓고 보니 일하는 엄마로서 일과 육아, 아내로서의 역할에 치여 미처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던 기간 동안 가슴에 응어리진 서운함도 나름대로 쌓여있었다. 자기 계발은 물론이고 좋은 엄마나 아내와도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남편에게 하소연했지만 건성으로 듣는 듯했다. 나중에 물으면 남편은 아무리 열심히 들어주어도 딴 생각하면서 듣는 것 같다 하고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며 화를 내더라며 억울한 마음을 내보였다.

그 날부터 남편이 사다준 무지개 색깔의 일기장에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냐며 조목조목 불평하는 나와 아내의 마음이 한 길 물속보다 알기 힘들다는 것을 새로 알아가는 남편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구나. 당신과 나의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무엇보다 내가 먼저 변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받아들일거라고 생각했어. 나에게는 엄마이고 당신에게는 시어머니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지 못했어. 나와 당신이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되나보다."
"당신에게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고 수많은 다른 것들 뒤에 아내는 언제나 2등이라는 게 너무나 슬프다."
"나는 엄마이고 아내인 것만이 아니라 나도 여자인데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남편과 말이 아닌 글을 나누게 되니까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말보다 생각을 정리해 쓰는 글이기에 오해를 불러올 위험이 적었고 말로 하면 쑥스러운 얘기도 글로 쓰니 좋았다. "미안하다""고맙다"는 말도 목소리로 전할 때는 '인사'로 취급받았지만 글로 표현하니 감동이 되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교환일기를 써가면서 우울증을 앓는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과 하루 속히 회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도 아물어가기 시작했고, 산후 휴가를 마칠 무렵에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아도 가슴이 무너지던 마음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의 병이 조금씩 나아가면서 아이들에게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큰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였기에 큰 아이를 선두로  해서 아이들 하나 하나와 교환일기를 써나갔다. 남편과 했던 것처럼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예쁜 노트를 한 권 고르게 해서 아이와 번갈아가며 그 날 그 날의 일상과 생각을 적어 나누었다. 일기 형식도 좋고, 편지도 좋고, 시간이 없을 때는 짧은 한 마이라도 괜찮다고 했는데,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들 편지를 선호하는 눈치였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엄마 사랑해요를 비뚤거리는 글씨로 써온 것만도 감격스러웠고, 조금씩 자라면서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 엄마에 대한 불만, 친구와의 갈등, 그리고 자기만의 고민까지 다양한 얘기들을 써서 답장을 간절히 바라면서 가져왔다. 나이가 어릴수록 짧은 내용을 매일도 모자라서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이어쓰기를 하듯이 가져왔고, 나이가 들어가니 며칠에 한번으로 횟수는 줄지만 내용이 늘어나고 깊어졌다.

'엄마, 엄마가 동생들을 더 예뻐하는 것 같아 일부러 말을 안 들었어요. 그러면 엄마의 관심을 더 많이 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 (큰 아이)
'선영아, 때때로 엄마가 인내심이 부족해서 동생들이 셋이나 있는 너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 하지만 그런 실수들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어. 엄마는 모두 다 꼭같이 사랑하는데 그 사랑의 빛깔이 다를 뿐이거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엄마가 미안해'

'엄마, 나는 언니보다 뭐든지 못하는 것같아요. 그래서 언니가 미워요. 나도 언니처럼 잘하는 게 많으면 좋겠는데 잘 되지를 않아요' (둘째 아이)
'은선아, 우리는 모두 다 다르단다. 언니가 잘하는 게 있으면 은선이가 잘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야.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찾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다. 엄마에게는 은선이가 잘하는 것들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시간 내서 같이 찾아볼까?'

'엄마, 나는 키가 더 크고 싶은데 아무리 재어봐도 자라지를 않는 것같아서 화가 나요. 이대로 안 자라고 멈추면 어떡하죠? 백인 친구들과 같이 서면 모두들 나보다 커요.' (셋째 아이)
'영은아, 한참 키가 자랄 때에 나보다 키가 큰 친구들이 많으면 속상하지? 엄마도 어렸을 때 그랬기 때문에 그 맘 알것같아. 오늘부터 줄넘기도 해보고 아빠가 맥스와 산책을 나갈 때 같이 나가서 걷기 운동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엄마는 우리 영은이가 키가 자라듯이 마음도 넓고 크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엄마, 나는 언니들이 싫어요. 자기들끼리만 얘기를 한다고 하고 나에게는 같이 나누려고 하지 않아요.요. 나만 초등학생이라고 끼워주질 않아요.' (막내)
'은영아, 언니들이 은영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구나. 나만 빼고 뭔가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속상한 일이야. 엄마도 그런 경험 있거든. 그런데 언니들이 너에 관해 험담하는 얘기가 아니고 자기들만의 친구나 학교 얘기일 수도 있어. 사람은 누구나가 남과 나누고 싶지 않은 얘기들도 있고 누구와 나누고 싶은지도 그때 그때 다르잖아. 그게 네가 아니라고 해서 언니가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언니들이 사춘기니까 은영이도 피곤하지? 우리 사춘기 언니들이 이 때를 잘 지나가게 좀 도와주자. 은영이는 엄마의 조수야!'

회사 일로 분주하게 다니다가 돌아오니 내 책상 위에 이번 주 안에 처리해서 보내야 하는 회사 서류더미들 위로 아이들이 저마다의 얘기를 써서 가져온 교환일기가 보인다. 각자의 개성대로 겉표지의 모양도 다르고 그 안에 내용들도 다르지만 엄마의 24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보다 더 많은 양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들의 마음만은 꼭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긴 답장으로, 때로는 한 줄의 말로라도 내 아이들의 마음에 차곡차곡 사랑의 벽돌을 쌓아가고 싶다.

___저희 집의 교환일기에 대해 궁금해서 질문해오신 분들이 댓글과 쪽지로 몇 분 계셨기에 글로 답을 드립니다.
답이 될만큼 상세한지 모르겠네요.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그레이마샤
    '09.10.20 2:01 AM

    앗...ㅎㅎ 사춘기시절 짝사랑 하는 ## 와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교환일기.. 남편에게도 해볼까요? 초등 4학년인 딸래미하고는 되겠지만...아직 글을 못쓰는 6살 4살 남자아이들과도 과연 가능할까요? 당장 노트 하나 꺼내서 딸래미에게 글 써야겠어요..

  • 2. 동경미
    '09.10.20 2:12 AM

    그레이마샤님,
    꼭 써보세요.
    남편과도 딸 아이와도, 그리고 아들들과도 다 좋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어릴수록 더 효과적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아이들이 글을 익히기 전에는 그림으로 그려오게 했어요.
    그리고 나서 해석을 부탁하는 거지요^^

  • 3. phua
    '09.10.20 10:24 AM

    잠은 잘 자셨는지요???
    " 온니들아~~ "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불편하다고 쪽지를 보내신
    회원님이 있어서, 맘을 주체하지 못해서 도토리를 며칠간 줏으러 다녔다는
    키톡의 스타~~ 순덕엄마가 생각이 났답니다. 어제 자게에 있는 동경미님의 댓글들을 보고서...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대한민국은 독재자들이 정치를 할 때보다
    더 험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질의 미국소고기를 먹기 싫다고 유모차에 아이를 데리고 나간 엄마들에게
    줄줄이 소환장이 날아 들고, 지난16일에는 법원까지 갔다 오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나라가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빌어먹을....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면 욱~~ 하는 것이 욕이 먼저 나오게 되는
    상황이어서 동경미님의 글에 그 많은 댓글이 달린 것 같습니다.
    상담을 전공하시는 분이라서 차분히 대처 하시는 모습이 좋았다는 것...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자주 만나요^^~~

  • 4. 김아리
    '09.10.20 11:24 AM

    아이들과의 교환일기를 읽는데 저는 왜 마음이 짠해지면서 훌쩍대고 있는걸까요.
    마음이 짠...하네요.
    나에게도 이런 어린시절이. 이런 엄마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5. 동경미
    '09.10.20 11:30 AM

    phua님,
    감사해요.저도 순덕엄마 생각 했네요^^
    저는 도토리는 못 줍고 오늘 밀린 빨래 다 했지요^^
    여러가지로 감사드립니다.

    김아리님,
    우리 시대 엄마들은 이런 걸 하실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네요.
    이제는 아리님이 아이들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주면 되지요.
    꼭 해보세요.

  • 6. 화창한 봄날
    '09.10.20 1:46 PM

    항상 글을 읽으면서 늘 감동 받았던 사람입니다.
    비슷한 연배이면서 저보다 한 두살 언니일 것 같은데
    늘 주옥 같은 글을 보며 닮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댓글들 상처 받지 마시고 많은 좋은 글 올려주세요...
    늘 저를 돌아보게 하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게 해 주는
    소중한 글들 ... 접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 7. 앙칼진마눌
    '09.10.21 11:31 PM

    제목보고 헉 하고 들어왔다가...남편분과 쓰셨다는 내용에...아...그렇구나 싶다가 아이들과도 썼다는 내용에...다시 헉! 이거야 합니다 ㅋㅋㅋ

    딸내미가 7살인데 똑소리가 나도록 FM스타일인데 일기 쓰기를 여러번 권해봤지만 영...쓸 생각을 안합니다
    저는 나름...딸아이가 유아시절에 집이 갑자기 기울면서 아이가 받았을 충격과 동시에 동생이 생기고 생활고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면서 겪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가끔 욱하며 화를 내는것도 일종에 한이 쌓여서 그것을 알아달라는 자기 아프다는 싸인으로 보일때가 있습니다
    일기를 쓰다보면 딸아이의 마음도 읽을수 있겠다 싶고 나중에 학교가서도 도움이 될듯해서 권유를 해도 막무가내...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며칠전 잠자려고 누웠다가 교환일기를 생각해봤습니다
    저도 일기를 잘 안쓰는...비문학적인 사람이라 일기쓰기가 힘들겠지만 딸아이랑 서로 일기를 교환해서 쓰다보면 아이의 마음에도 다가가고 일기를 쓰게 하려는 제 생각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내용이 글로 있으니 읽고 깜짝 놀란것이죠 ^^;;;;;
    방법을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이번에도 많이 얻어서 갑니다 *^^*

  • 8. 동경미
    '09.10.21 11:55 PM

    화창한 봄날님,
    감사합니다.
    비슷한 연배이시군요. 반갑네요.
    열심히 써볼께요.

    앙칼진 마눌님,
    닉이 너무 귀엽네요^^
    저는 창의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실명을 쓰는데, 닉들을 보면 다들 참 기발하시고 재미있으세요^^
    아이들이 혼자서 일기를 쓰라고 하면 잘들 안쓰려고 해요.
    엄마가 답장식으로 같이 하다보면 답장 읽어보는 맛에 좀 재미를 붙이더라구요.
    긴 내용으로 하라고 하지 마시고 단 한 줄이나 한 단어라도 괜찮다고 하시면서 시작해보세요.
    글로 쓰는 게 귀찮으면 그림을 그려도 좋고요.
    글의 내용에 무엇이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엄마가 나를 위해 나와 단 둘이서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좋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아이들에게 큰 선물이 되더라구요.
    저희 큰 아이가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지금도 자기가 초등학교 내내 저와 썼던 일기를 신주단지처럼 보관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시집 갈 때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겠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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