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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사춘기 주의보

| 조회수 : 2,310 | 추천수 : 149
작성일 : 2009-10-16 03:39:39
7학년에 들어간 어느 날, 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더니 저멀리 걸어오는 아이의 입술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가까이 왔을 때에 보니 립글로스를 발랐는지 손바닥만한 얼굴에 입술만 보이는 것같았다. 한 소리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모른 척 했다. 아이도 제 눈에만 보이는 립글로스를 바른 양 아무 내색도 없었다. 어디서 났나 궁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집까지는 입을 다물고 왔다.

내 방으로 와서 화장대를 들쳐보니 얼마 전 선물로 받은 립글로스가 안보였다. 모른 척 아이들 화장실로 가서 서랍을 열어보니 내가 한번도 쓰지 않고 모셔놓은 립글로스가 거기가 제 자리인듯이 모셔져 있었다. 말도 안하고 가져가서 쓴 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갔다가 숨겨놓지도 않고, 숨어서 바르지도 않고 대놓고 바르고 나타나는 아이의 순진함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라면 엄마 몰래 감춰놓는 것은 기본이고, 엄마가 안 볼 때에만 바르고 다닐텐데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느새 이렇게 자랐나 싶기도 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 아이들은 발육이 빨라서 생리도 엄마 세대보다 빨리 한다니까 생리를 시작했을 때에도 사실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는데, 립글로스에 욕심이 난 딸아이를 보니 그제서야 아이가 자란다는 실감이 났다. 얼굴은 아직도 젖살이 남아있어 한없이 풋풋한 애기 얼굴인데 그 위에 립글로스를 바르니 마치 애어른처럼 보이는 딸의 얼굴이 아쉽게만 느껴지던 그 날을 시작으로 우리 딸의 사춘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침 6시면 일어나는 우리 네 딸들의 전쟁은 누가 먼저 어느 목욕탕을 차지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누가 먼저 헤어 드라이를 쓸 것인지, 누가 먼저 헤어 스트레이트너를 쓸 것인지, 누가 헤어 컬러 (curler)를 쓸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나이 순서도 아니고 순서를 미리 정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그 날 제일 일찍 일어나 동작이 민첩한 사람에게 첫 순서가 돌아가게 마련이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순서도 그리 만만한 요행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며칠에 한번은 목욕탕 세 군데에서 비명 소리, 볼멘 소리, 그리고 울음 섞인 애원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전쟁이 벌어지고 서로 제 편을 들어달라고 달려오는 때도 허다하다. 물론 엄마 아빠는 중립이고 철저히 무개입주의로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보니 이제는 아예 서로 일어나는 시간을 조절해서 아침 시간의 혼란을 어느 정도 해결하는 듯 하다.

목욕탕 전쟁이 끝나면 다음에는 옷 쟁탈전이 벌어진다. 4학년 막내만 제외하고는 10학년, 8학년, 6학년의 세 아이들이 키만 조금씩 다르지 덩치가 비슷하다 보니 서로 언니와 동생의 옷을 탐을 낸다. 남의 떡만 커보이는 것이 안라 남의 옷도 좋아보이게 마련인가 보다. 날마다 싸우는 게 일과가 되더니 자기들끼리 어떻게 의논을 했는지 올해부터는 아예 싸우지 않고 다 같이 공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며 평화가 찾아왔다.

7학년과 8학년을 립글로스 탐험으로 보내던 큰 아이가 작년에 9학년이 되어서는 아예 아무 화장품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기에 속으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중학교에만 들어가도 눈화장에 화운데이션, 마스카라와 립스틱까지 화장을 다 하고 오는 아이들도 많이 있는데, 우리 아이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던 차였다.

몇 주 전, 내가 안쓰고 썩히게 되어 버리려고 한 쪽에 놓은 파우더와 마스카라, 그리고 속눈썹 컬러가 안보여서 아침 내내 찾았다. 아무리 뒤져도 못 찾겠어서 혹시나 하고 또 큰 아이의 소지품 함을 열어보았다. 절반 넘게 다 쓰고 버리려고 내놓은 아이라인용 펜슬을 비롯하여 마스카라, 파우더, 속눈썹 컬러 등등 내 골동품 화장품들이 고스란히 아이의 물품함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목욕탕에서 대문으로 직행하며 후다닥 뛰어나가던 아이의 눈 언저리가 거무스름했던 것도 같다. 엄마 눈을 피하느라 그렇게 서둘러 뛰어나간걸까.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온 남편에게 물으니 알지도 못한다. 혹시 아이를 덮어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가 싶어 몇 번 더 캐물었지만 남자라서 그런지 뭘 발랐다는 것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듯했다.

방과 후 아이를 데리러 가 차를 대고 서있으니 저쪽에서 큰 아이가 걸어오는 게 보였는데,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이 나왔다. 마스카라와 검은 아이라인 펜슬이 섞여 눈 언저리가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른 채 큰 아이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오는 것이었다. 내가 숨도 못쉬고 웃으니 그제서야 거을을 보더니 웃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저도 웃음보가 터졌다. 둘째와 셋째, 막내도 언니의 눈을 보더니 다들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깔깔거렸다.
"너 왜 엄마 꺼를 말도 없이 가져가서 쓰니? 그냥 쓰고 갔다 놓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제 것처럼 모셔놓았던데?"
제 딴에도 겸연쩍은지 미소만 짓고 말을 못한다.
"필요하면 엄마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몰래 쓰니까 이렇게 부작용이 생기는 거야. 그리고 그런 건 다른 사람과 같이 쓰는 게 아니야."
그 길로 집에 와서 한번도 안 쓴 마스카라 한 개와 아이라인 펜슬, 그리고 속눈썹 컬러를 아예 네 것으로 가지라고 주었더니 얼마나 좋았던지 고맙다는 소리를 수 십번은 하는가 싶다.

중학교만 가도 화장들을 하고 고등학교를 가면 데이트 쯤은 당연히 생각하는 미국 중고등학교 풍조 속에서 그래도 엄마 아빠가 한국식인 것을 고려해주는 것인지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겠다고 고집 한 번 안부려본 착한 우리 큰 딸이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것에 불만도 한 번 제대로 말 안하면서 엄마가 돈이 모자라서 쩔쩔 맬 때에는 슬그머니 제 용돈을 모은 것을 가져와 빌려주는 거라고 내놓고가는 너무나 미안하게 철이 들어버린 우리 큰 딸이 점점 여자가 되어가는 것이 왜 이렇게 아쉬울까. 제 친구들 따라서 주말마다 쇼핑몰도 누비고 다녀보고 싶고 제가 사고 싶은 것을 사들이고도 싶을 나이인데, 고작 엄마가 쓰던 아이라인 펜슬 한개와 마스카라를 고이 모셔놓고 써보는 아이의 마음에 오늘도 엄마는 가슴이 짠하다.
"우리 딸 엄마가 미처 몰랐는데 많이 컸나 보다. 앞으로 엄마가 화장품 사러 갈 때에는 우리 큰 딸이랑 같이 가야겠다!"
"정말???"

나도 이십년 전 대학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분홍색 립스틱 하나를 사서 집으로 가면서 다음날 학교에 바르고 갈 기대감에 가슴이 뛰던 생각이 난다. 형편이 어려워 엄마에게는 말도 못 꺼내고 벼르고 별러 마련한 립스틱을 몽당연필처럼 다 닳을 때까지 얼마나 아껴서 썼었던가. 내 딸이 벌써 그런 마음이 생기는 나이인데도 무심한 엄마는 그저 책만 사다 주는 센스 꽝 엄마였나 보다. 다음 날 아이의 점심가방에 메모를 해서 붙여 주었다.
"큰 딸, 엄마가 미처 못 챙겨줘서 미안해! 우리 딸이 이제는 아가씨가 되어가는구나...그런데 눈화장하면 눈 비비거나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것은 하지 말아줘. 엄만 우리 딸 옷을 입은 귀여운 너구리인 줄 알았다니까 ^o^"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말랭이
    '09.10.16 11:55 AM

    님 글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져오고 뭉클한게 늘 눈물을 글썽이게 됩니다
    저도 한템포 참아주고 웃어주시는 여유를 딸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꼭 한마디 질러
    놓고 후회하네요 유익한글 늘 감사합니다

  • 2. 동경미
    '09.10.16 12:03 PM

    말랭이님,
    감사합니다.
    저도 늘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보고 말하려고 애를 쓰는데 잘 안될 때가 더 많아요.
    말하고 나서 사과하고, 또 그러고...
    아이들더러는 왜 한 번 얘기하면 말을 안듣냐고 하면서 저도 그러고 있더라구요^^

  • 3. 화창한 봄날
    '09.10.20 1:54 PM

    저희 딸도 사춘기네요.
    요즈음 제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래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딸을 많이 이해해줘야겠어요.
    자꾸 저희 때와 비교했더니 속에서 울화통이...ㅋㅋㅋ

  • 4. 동경미
    '09.10.21 12:54 AM

    화창한 봄날님,
    화날 일 정말 많지요.
    그래도 사춘기때 보이는 감정의 고저현상을 잘 지나간 아이들이 청년기와 장년기에도 정서가 안정된다고 하네요.
    엄마가 많이 참아줘야 하는데 저도 늘 힘들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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