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부터 아이들과 내가 모두 지독한 감기가 걸려 앓느라고 아이들은 며칠씩 학교를 못 가고 나도 회사를 쉬며 집에 있어야 했다. 여기저기서 밤낮으로 콜록거리는 기침소리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모처럼 엄마가 일주일이 넘게 집에 같이 있어주니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지난 육개월 동안 엄마의 일때문에 늘 일주일의 반은 엄마가 없이 지냈던 아이들이기에 이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서로가 조금이라도 더 엄마 품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이 이 아이들에게 한치의 차이도 없이 공평하게 나누어지기를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주변에서 부모님의 편애로 인한 상처로 어른이 되어서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고 살았던지라 내 나름대로는 아이들을 언제나 공평하게 사랑해주는 엄마가 되려고 애를 쓰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게 느껴지지만도 않은가 보다. 평상시에는 잘 표현을 안하다가도 교환일기에서나 단 둘이 데이트하는 시간이 되면 마음 속의 얘기들이 슬며시 나오게 된다.
"은선이와 영은이가 늘 나를 빼놓고 더 사이가 좋은 것같아요. 모두 다 나한테 물려받은 옷들을 입는 건데도 그 아이들의 옷이 내 옷보다 더 예쁜 것같아요.엄마가 은선이와 영은이를 나보다 훨씬 더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같아요" 열한살이 되면서 어른과 아이의 중간에서 자라나는 큰 아이 선영이의 불만이다. 늘 듬직하고 제 일은 내가 일일히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말끔히 처리하는 애어른같은 아이라서 걱정을 덜 했던 것이 아이에게는 엄마가 관심을 덜 가지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동생들은 모두 제 옷을 물려입히고 제 옷은 늘 새옷인데도 일단 엄마가 동생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준다고 생각을 하니 헌옷을 입는데도 동생들의 옷이 더 예쁘게 보이나 보다.
"언니가 나보다 뭐든지 더 잘하는 것같아요. 언니는 친구도 나보다 더 많은 것같고 한국말도 나보다 더 잘하고 칭찬도 나보다 더 많이 받아요. 엄마는 영은이나 은영이한테 더 관심이 많은 것같아요. 영은이나 은영이는 뭐든지 엄마가 다 챙겨주고 나는 스스로 하니까요. 아빠도 뭘 사러 갈 때 언니를 더 많이 데리고 가잖아요"
우리 아이들 넷 중에서 가장 모든 일에 불평없이 차분하게 제 일은 조용히 알아서 한다고 남편이 칭찬하는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은선이의 불만이다. 둘째라서 언니에게 치이고 밑의 두 동생들에게 치이다 보니 문득 문득 제 설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나 보다. 하루종일 집에 있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하루종일 책만 읽는 책벌레인데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내가 은영이하고 똑같은 행동을 하면 왜 내가 더 많이 야단을 맞는지 모르겠어요. 은영이가 하면 귀엽다고 엄마 아빠가 웃고 내가 하면 언니가 그러면 안된다고 하니까 정말 속이 상해요. 내가 동생이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가 더 귀여움을 받잖아요."
세째 영은이는 2학년이 되어서도 동생과의 경쟁이 변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엄마 아빠가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면 그대로 불만을 표현하고 뾰로퉁해진다. 잘 놀다가도 하루에 몇번씩 싸움이 나는 애증의 관계이다. 동생이 낮잠을 자거나 유치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면 어김없이 내 무릎에 앉아서 엄마를 독차지해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나는 왜 언니들보다 못하는 게 더 많아요? 나도 언니들처럼 학습지도 하고 싶고 학원도 가고 싶고 걸어서 나혼자 친구 집에도 가고 싶어요. 엄마는 왜 언니들은 다 허락해주고 나만 안된다고 해요?"
여섯살짜리 막내도 나름대로 엄마가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을 한다. 언니들이 누리는 모든 것을 자기도 누리고 싶은데 늘 엄마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한결같이 엄마가 막내를 제일 예뻐한다고 불평을 하지만 막내가 보기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자기가 가장 불이익이 많다고 생각이 드나 보다. 언니들이 하는 모든 것을 자기도 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막내 특유의 어리광작전을 써서라도 엄마 아빠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애를 쓴다.
열 손가락 깨밀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옛말처럼 자식이 많아도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으랴. 하나하나 얼굴을 들여다 보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이 하나마다 그 아이와 나만의 추억이 따로 있고 이야기들이 따로 있기에 아이 각각에 대한 나의 마음은 모두 다르다. 사랑의 양은 꼭 같겠지만 아이들 하나 하나에 대한 내 마음의 색깔이 다르다고나 할까.
아이들에게도 종종 나는 내 마음의 색깔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곤 한다. 큰 아이에 대한 마음은 연보라색, 둘째에 대한 마음은 초록색, 세째는 분홍색, 그리고 막내는 노란색이라고. 아이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색깔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색깔마다 아이들의 기질이 나타나고 그 기질을 기반으로 한 나의 마음이 얽혀있다.
늘 묵묵히 타고난 맏이처럼 엄마 아빠의 빈 곳을 메워가며 엄마 아빠를 걱정시키는 일은 안하려고 애를 쓰는 속깊은 큰 아이는 파스텔 톤의 연보라색이 꼭 어울리는 아이이다. 사춘기랍시고 이따금 어줍잖은 반항을 했다가도 마음이 약해서 반나절을 못 넘기고 슬그머니 다가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를 하는 고마운 딸이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는 큰 아이를 보시면 늘 당신 딸보다도 백배 기특한 딸래미라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하루종일 소리없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책을 읽어대는 책벌레인 둘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흥분하지 않는 차분함의 대가이다. 독서량이 엄청나다 보니 어린아이 수준을 넘어서는 지식을 쌓게 되었고 이따금씩 어른들도 잘 모르는 것들을 책에서 읽었다며 대답해내는 모습이 푸룻푸릇한 새싹같은 초록이 꼭 어울린다. 불평도 많지 않고 하루하루 자기가 계획해놓은 일상이 깨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둘째는 비바람에도 무던하게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인내심과 뚝심의 초록빛 아이이기 때문이다.
개성만점의 세째는 무슨 일이든지 속에 담아놓고 끄끙거리는 법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에게이든지 친구나 엄마 아빠이든지 정면대결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세째는 때로는 당돌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 옳지 않고 자기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는 고집이 있다. 하지만 일단 자기 맘에 맞고 잘해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이 헌신적으로(?) 돌봐주고 아껴주는 꽃분홍빛 애교덩어리이다. 쇠고집처럼 자기주장을 하다가고 마음이 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달려와서 어깨를 주물러주고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온몸을 주물러주고 이부자리를 펴주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언니들에게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네 아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가장 논리정연한 막내는 병아리에게처럼 노란 색깔의 마음을 보낸다. 나이들은 엄마 아빠가 언제나 일 때문에 충분히 많이 시간을 보내주지도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미안함에 늘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그 나이 때 언니들이 보여주었던 것보다 뛰어나게 무엇이든지 논리를 가지고 사물을 따져나가는 모습에 놀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막내라서 그런지 융통성도 더 많고 잘 설명해주면 포기도 빠르다. 언니들과 경쟁이 되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에게 중요한(?) 일을 맡겨만 주면 얼마나 애를 쓰며 열심히 하는지 모른다. 노랑 병아리처럼 집안을 종종거리며 이것저것 자기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의 막내에게는 노란색 사랑을 준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의 색깔이 다르듯이 아이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의 빛깔도 다르다.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기만 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을 기르면서 하루하루 느끼는 것은 내가 주는 사랑의 곱절만큼을 아이들에게 받는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나의 사랑은 아이들의 성과나 행동에 따라 조건부 사랑이 되기도 하는데 반해 아이들은 모자라고 수양이 부족한 엄마에게 하루도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쏟아부우니 분명 내가 받는 사랑의 양이 더 많다고 해야 한다.
나름대로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들의 일기장에 무조건 사과부터 썼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꼭같이 사랑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었구나. 속상한 마음 풀고 다음에도 꼭 얘기해줘. 그래야 고치지. 근데 엄마는 정말로 너희들을 꼭같이 모두다 사랑해. 너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엄마는 못 살아. 너희들이 엄마와 아빠를 꼭같이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마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단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과를 하면 그 순간에 자식의 미래가 열리는 것이라는 얘기를 기억하며 나도 열심히 사과를 하며 산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도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이다.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어도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오해를 풀기 위해 부모가 먼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어린 자식과의 사이에 생겨난 벽은 평생을 가도 허물기가 어렵다. 부모도 사람이데 어찌 늘 맞는 행동만 하겠는가.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인격체라는 생각으로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지점에서부터 부모와 자식은 늘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있다.
상담의 현장에서 수많은 나이 든 자식들이 울부짖으며 부모와의 갈등을 호소하는 부분은 늘 이 '사과'의 부분이다. 단 한번이라도 부모님의 입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어볼 수 있었다면 많은 상처들이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의 유교적 관념에서는 부모의 사과가 거의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것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부모의 권위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부모가 잘못을 했어도 자식된 도리로 이해하고 넘겨야만 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이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부모들의 이러한 경직된 모습은 그저 부조리로만 보일 뿐이기에 이해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깊은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쏟아부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에게 사랑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도 아이만큼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이기에 무조건 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세뇌를 시키기에는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여느 사랑의 법칙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나 보다.
[출처] 꽃밭에서 (72) 사랑의 법칙|http://blog.naver.com/kmchoi84/90064184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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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10-04 05: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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