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다음에 크면 엄마가 되고 싶어요." 하고 싶은 말은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막내가 뜬금없이 던지는 한마디가 칭찬인지 불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어?" 농담으로 받아주며 물었다.
"엄마처럼 편한 게 없잖아요. 우리한테 다 시키고 엄마는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제 방을 치우고 자기가 맡은 집안 일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로 옮기는 일과 집안의 모든 거울 닦기)을 하다가 힘이 들었는지 오랫만에 볼멘 소리가 나온 것이었다.
우리집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 일을 나눠 분담하게 가르쳐왔다. 나이에 맞게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많은 일들도 척척 감당해가게끔 버릇을 들여왔다. 대식구의 집안일을 혼자 하는 것이 힘든 것도 이유이지만 그보다도 받는 것에만 익숙하지 않고 자신들도 우리 집이 돌아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잇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시작이 되었다. 올해 10학년(한국의 고2)이 되는 큰 아이는 진공 청소기 돌리는 일과 빨래 개는 일, 그리고 설겆이를 담당한다. 8학년(한국의 중3)이 되는 둘째는 재활용 쓰레기 및 각종 쓰레기통을 책임지고 개켜진 빨래를 각 방 및 적소에 배달하는 일, 6학년이 되는 세째는 대걸레질과 세탁기 돌리기, 그리고 4학년이 되는 막내는 거울과 빨래 건조기 담당이다. 그외 뒷마당 청소와 욕실은 일주일에 한번씩 함께 하고 둘씩 함께 쓰는 방의 청소는 수시로 하게 되어있다.
서너 살이 될 무렵부터 욕실에 벗어놓은 빨래를 세탁실로 내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식탁 닦는 일, 식탁에 수저와 냅킨 내놓는 일, 현관 앞 신발 정리 등등 그 나이에 걸맞게 수많은 일들을 섭렵해온 아이들은 사실 왠만한 새댁 이상으로 집안 일을 척척 해내는 수준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빼고 불평을 하던 아이들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고 일하는 엄마라는 오랜 핑계로 밀어부치기도 하면서 이제는 당연지사기 되었다. 덕택에 6식구 살림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사람 사는 집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같다.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이 있으니 내가 어지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자기의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덜 어지르고 쓰레기를 덜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재택 근무를 하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래도 각 처마다 인원 감소로 업무량이 만만치 않은 공무원인지라 몸은 집에 있어도 일일히 보살펴주지 못하는 때가 많다.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은 해주면서도 막상 집에 데리고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받거나 이메일 체크를 하느라 제대로 얘기를 들어주지 못하거나 관심을 가져주지도 못한다. 그래도 저희들끼리 간식을 꺼내 챙겨 먹고 먹은 자리도 치울 줄 알고 알아서 숙제 모드로 들어가주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남들은 홈메이드 간식을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엄마 밑에서 크는데 나는 그저 늘 분주하게 뛰는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안절부절한 때도 많았다. 이따금씩 엄마가 바빠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딴 짓 (숙제를 다 하기 전에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는 것)을 하다가 들키기도 하지만 그래도 원칙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니 그정도의 일탈은 아이다운 것이라는 생각이다.
청소와 빨래의 기본적인 부분을 아이들이 나눠 맡아주고 남편도 틈틈히 아이들의 보조(?)로 도와주니 사실상 내 몫은 요리와 장보기 그리고 아이들 교육 (이 부분이야 남편과 공유하는 영역이나 나만의 일은 아니다) 인데 그 많은 부분을 빼주어도 여전히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이 실정이다. 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가 먹고 자는 것만 신경쓰고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전에는 나의 이런 마음에까지도 죄책감을 느꼈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나는 엄마 자격이 부족한가 보다...이러면서.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도 건강한 마음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아이들이 매순간 이쁘기만 하고 집안일이 즐겁고 엄마/아내라는 직분이 좋기만 하겠는가. 싫어도, 미워도, 부담스러워도 도망가지 않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내 자리에 이렇게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큰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한다.
아이들에게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열어보인다. 숙제를 하기 싫어할 때, 맡은 집안 일을 하기 싫어할 때, 피아노 연습을 귀찮아 할 때, 언니나 동생에게 하기 싫은 사과를 해야 할 때, 아이들에게 내 맘을 보여주며 예를 들어준다. 위로 세 아이들은 엄마의 술수를 이미 파악해서 예가 필요 없어도 막내는 늘 나와 신경전을 하며 어떻게서든 빠져나가보려고 한다.
"정말 하기 싫지? 사실은 지금 TV보고 싶지? 엄마 그거 충분히 알아."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엄마도 지금 사실은 일하기 싫거든. 밥도 하기 싫고 방 청소도 하기 싫고 너희들 숙제 검사도 오늘은 안하고 싶어."
"그럼 뭐하고 싶은데요?"
"나가서 친구들 만나서 팥빙수 사 먹고 영화 보고 바닷가에 놀러가서 재밌게 놀다가 늦게 들어오고 싶어"
"그럼 우리 밥은 누가 해줘요? 나 내일 수학 시험인데 엄마가 가르쳐주기로 했잖아요!"
"그러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다는 얘기야.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누구나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하는 것도 있고 하고 싶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얘기야. 지금 꼭 해야 할 일을 다 한 사람만이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란다. 그래서 엄마도 지금 놀러가지 않고 밥할거야. 일도 다 마칠 거고 네 수학도 도와줄 거고 엄마 방 청소도 할 거야. 이렇게 해야 할 것들을 다 해나가야 나중에 하고 싶은 것도 할 기회가 오거든."
제가 하기 싫은 일이 있었던 것은 잊고 엄마가 놀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물을 마시러갔다가 저희들끼리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여 보니 막내가 의기양양하게 언니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도 우리랑 똑같은가봐. 일하기 싫고 놀러가고 싶대. 엄마는 노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친구랑 놀러가서 아주 늦게 오고 싶대. 우리 밥도 안하고. 그래도 참고 열심히 하는 거래. 그것도 모르고 난 엄마되려고 그랬는데." 제 딴에는 그게 그리도 재미있게 들렸는지 까르륵 거리며 얘기하는 막내가 천진난만하다.
엄마 노릇과 아내 노릇처럼 힘든 게 있을까. 세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졌지만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을 지키는 일은 여전히 큰 일이고 어려운 일이다. 기술의 발달로 부엌 살림이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예전에 없었던 고민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문제들이 날마다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니 실제적으로는 더 어려워졌다는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치며 알뜰하게 살림을 해도 늘 모자란 살림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도 눈에 보이는 성적 향상이 안 보이면 엄마의 공과 아내로서의 노력은 눈에 띄지 않는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도 가정을 지키는 것은 여자라는 말에 위안을 삼아본다. 남자는 가정을 세우고 일구는 일을 하고 여자는 세워진 가정을 잘 지키고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게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한다. 오늘도 우리 막내가 걱정하지 않게 나는 놀러나가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밥하고 숙제 검사 꼼꼼히 하며 우리 가정을 잘 지켜봐야겠다.
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 엄마 노릇 아내 노릇
동경미 |
조회수 : 2,401 |
추천수 : 154
작성일 : 2009-07-31 05: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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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82cook
'09.8.10 8:30 AM82cook 관리자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글이라서 글 제목에 ★표 붙여두었습니다.2. 수늬
'09.9.11 10:02 PM뒤늦게야 몇개 동경미님 글 접하고 오늘 찾아 검색해 읽어보네요...
감사히 읽습니다...별표주신 관리자님도 고맙습니다...3. 수늬
'09.9.11 10:08 PM우리아인 아직 좀 통하지 않을 나이라서 제가 그렇게는 못해봤는데요...
어느날..기억이 안나는데..82어느글중 어느님 댓글에서...제가 뚕 했습니다...
'엄마도 똑같이 사람이고 놀고싶고 쉬고싶은거 자식들이 알아야한다는 내용을
우아하게 쓰셨던 어느분 글에 제가 '아하~~'하고 감탄을 했어요...
모든것 다 해주다보니 힘들어서 지칠즈음이었죠...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는데...남편만 동조해준다면 좋겠어요...
남편은 다 큰 어른이라 더 힘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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