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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를 읽고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서울로 유학 간 친구를 만났다. 그전에도 친구는 만나면 늘 학교 앞 술집에 살다시피 한다는 얘기를 자랑처럼 말했다. 그런 친구가 공장에 들어갔다는 뜬소문도 들려오더니 이번에 만나니 친구는 어느 노동자의 죽음을 들려주었다.
“서울 청계천이라는 곳에 가면 허리를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 사람들이 일을 한단다. 그걸 알리려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분신자살을 했지만, 제대로 신문에 나지도 않았어.”
전태일이라는 그 이름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 눈도 귀도 모두 막혀 있었던 엄혹했던 유신 말기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막연히 진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언론에 분개했다.
작년인가 연말 정산할 때 굳이 연말 정산을 할 필요는 없었으나, 평소 학교에서 거두는 관제, 강제 성금에 비협조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어서 사실은 나도 성금을 내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냥 후원만 하던 전태일 기념 사업회에 연락을 했더니 이후 기관지 ‘사람세상’을 보내왔다.
이번에 책을 읽다보니 공부방 아이들이 ‘태일이’라는 책을 서로 다투어 읽었다는 글이 있기에 호기심에 주문을 하였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읽었다. 읽고서는 뭔가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계속 프리셀을 한다든가 인터넷 사이트 방문을 한다든가 딴전을 피우기만 했다. 몇 시간을 헛보내고 드디어 마음을 잡아 쓰기 시작한다.
사람 세상에서 연재되던 ‘태일이’는 사실 좀 지루했다. 그런데 이렇게 연속된 단행본을 만나니 훨씬 재미있었다. 특히 예전에 읽었던 ‘전태일 평전’에 비해 전태일의 몇 번의 가출 사건과 가족들과 재회라든가, 바보회에서 삼동회로의 전환, 전태일의 고민이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최철호라는 만화가의 힘이 느껴졌다. 물론 글쓴이의 힘도 같이...
삼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해서 마지막 권은 눈물범벅으로 끝냈다. 읽으면서 떠오른 아이가 있었다.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우리 옆집에 살았던 선희라는 아이였다. 선희네는 딸이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아버지 돌아가시고 살기가 어려워져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선가 선희네는 서울로 이사 갔고, 언젠가부터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회사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검사과라는 주소로 선희의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답장을 했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선희가 찾아왔다.
일요일이었는지 아님 방학이었는지 모르지만, 선희와 만남은 참 어색했다. 그 아이의 서울 말씨도 낯설었지만, 사복 입은 모습도 교복 입은 친구만 보다가 보니 무척 서먹했다. 선희도 내가 서먹했던 모양이다. 교복 치마에 흰 줄이 있으니까 왜 그런 줄을 달았는지 궁금해 했고, 그걸 또 내 동생은 언니가 다니는 학교가 일류 학교라 치마에 흰 줄을 단다고 자랑했다. 아무튼 우리는 옆집 남자 동기와 함께 어딘가 함께 구경 갔다가 헤어졌는데, 그 만남으로 상처를 받았는지 선희는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의 제자 중 또 다른 선희가 있었구나. 선희는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를 가정 방문 가서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할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두고 구미 산업체에 간 선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가끔씩 편지를 보냈다.
그러다 한 해가 지나서 나를 찾아왔는데, 웬지 무척 어색했다. 할 얘기도 별로 없어서 의례적인 얘기를 하고 헤어지면서 문득 이 아이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과연 선희와 그렇게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아, 그 아이들이 만화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누가 박정희가 우리를 굶주림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하는가? 저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 내가 일류 학교 교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학교 다닐 때, 로봇마냥 기계마냥 천대 받으면서, 악착같이 일했던 내 또래의 눈물을 먹고 저 6, 70년대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건만... 이제 그 열매마저 그 역사마저 그들에게 빼앗겨 버렸구나!
학교 교사라서 그런가 학교 현장과 자꾸 비교가 되었다. 하루 16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면서, 잠 안 오는 주사를 강제로 맞고, 아차 하면 매를 맞으면서 돈을 벌어야 했던 어린 여자 아이들! 지금 그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너무 지나치게 오래 교실에 남아 있다. 그 아이들은 뭘 배우고 있는 걸까? 그 아이들은 지금 그렇게 머리 속에 넣은 지식으로 점수를 받아 서열을 짓고, 그 서열로 돈을 버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에게 배움의 기쁨은 별로 없다. 청계천 다락방에서 악착같이 올라선 몇몇 만이 사장이 되어, 다시 자기가 배운 그 폭력과 노동자 착취로 돈을 벌 듯, 이 아이들 중 일부만이 꼭대기에 올라 일류 기업에 취업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조금 더 받는 머슴일 뿐, 경쟁에서 처져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친구들보다 그다지 나아가지도 못한다.
입시 경쟁 교육에서 이긴 자들이든 진 자이든 그들은 이미 공부의 세계와는 담을 쌓고 있다. 가장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교사들의 경우에도 좋은 강좌나 연수에 대한 반응이 냉담하고, 그다지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대다수가 공부에 질릴 대로 질린 것 같다.
나는 전교조가 지난 세월동안 너무 소극적으로 교육 운동을 한 게 아닌가 때때로 생각해본다. 국어 교사들의 경우 말귀 잘 알아듣고 제 마음 속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는 게 국어 교육의 목표인 줄 알아도 지식 영역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쪽에 동의한다. 열심히 시험에 나올 문제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누가 말했던가. ‘프랑스의 시험과 한국의 시험이 어려운 건 같다. 그런데, 프랑스 시험은 정답이 없어서 어렵고, 한국의 시험은 모든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어느 날, 문득 이 글의 주제가 왜 ‘조화로운 삶’이 되지? ‘사랑의 기쁨’은 왜 정답이 못되지? 하는 의문을 품는 순간 나는 정답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가 되고 만다.
전교조는 좀더 교육 내용을 중심에 두고 싸웠어야 했다. 진정한 교육이란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 굴리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일에 기쁨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싸웠어야 했다. 그 길에서 피 흘리는 사람이 많아야 했다.
그러나, 나부터 어떠한가? 내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교에서 시달려도 무능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
요즈음 학교는 중학교뿐만 아니라 초등학교까지도 일제고사에 대비한다고 여름 방학 보충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 교장은 개학하면 시험 치자고 교사들이 몇 번이나 회의에서 부결시킨 안을 들고 나와 여전히 조르고 있다. 학교 방침이고, 학부모들이 원하며, 교육청에서 권한다면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그 아이들이 회사에 가서는 늦게까지 야근하는 얌전한 직장인이 된다지...
전태일은 너는 지나치게 비판적이다는 사장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다만 법대로 지켜지기 바랄 뿐입니다.”
내 나이 53, 많은 나이이다. 이미 나의 시대는 흘러가고 있고, 새로운 세대들이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들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과 내가 손잡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공부가 지긋지긋한 게 아니라, 사실은 무척 즐겁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건 미래를 위해 마지못해 지금을 참아내는 투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에서 해야 하는 싸움임을 우리 애들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들은 어찌하든지 학교 밖으로 쫓아내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물론 학교 안에서 열심히 싸워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학교 밖으로 몰려났을 때 어떻게 가르침을 계속할 것인가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1. 그러게요...
'09.7.20 12:54 PM (211.207.xxx.222)이런 훌륭한 글에 댓글이 한개도 없다니...
요즘의 세상이 그렇구나 싶네요.
그래서...슬프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그저 아무도 보기 싫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요즘만큼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는 듯하답니다.
무기력감에 아무 것도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네요.2. ..
'09.7.20 1:01 PM (211.106.xxx.53)원글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차마 뭐라 말을해야할지....
저 역시도 매순간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역사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내 자리에서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건지..
아들녀석이 보는 잡지에 태일이 만화가 연재되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걸 과연 볼까? 싶어서 아무말 안했는데
자기가 이해할수 없는 만화속 사회상들을 곧잘 물어보더군요.
그때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것들이
태일이 같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것이고
우리 역시도 지금의 불합리함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한다고 말해주었어요.
고민하는 만큼 실천도 늘어날거라고 믿습니다.3. 제리
'09.7.20 1:01 PM (125.176.xxx.2)고래가 그랬어 를 통해 알게 된 책입니다.
대학때 읽었던 전태일 평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지요.
아이들도 읽고 감동하는 훌륭한 책
다만....5권이라서 가격 압박이...
그래도 감동으로 읽으면 책값보다 1000배나
값어치가 있는 책.
많은 사람이 사서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일등하는 삶보다 조화롭게 많은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게 하는 추천작이랍니다4. .
'09.7.20 1:32 PM (203.229.xxx.234)ㅠㅠ
5. 서점
'09.7.20 3:01 PM (203.142.xxx.231)찾아 보았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http://www.aladdin.co.kr/shop/common/wbook_talktalk.aspx?ISBN=8971992905&B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