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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검단산에서 미사리 & 팔당댐 두물머리

| 조회수 : 965 | 추천수 : 3
작성일 : 2021-06-14 17:28:06



토요일 10시 하남 검단산역 도착.

상일동이 종점이던 5호선이 올해 초 하남시까지 연장되었네요.

검단산은 서울 근교 명산,하지만 지하철 연결이 없어 접근이 쉽지는 않았던 곳.

결국 검단산역 개통 기념산행.

 


전철역서 10분 걸으니 등산로 초입.

에니메이션 고등학교 인근입니다.

일대는 창우동.

 




등산로 정비가 정말 잘되어있어요.

하남시장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

야자수 매트가 깔렸고.



20여분 지나니 유길준 가족 묘소가 나오고.

오늘 등산 코스를 이곳으로 잡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묘소 거쳐 정상,그리고 팔당댐 쪽 배알미동으로 하산합니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

학교서 배운 지식으로는 최초 일본과 미국 국비유학생.

미국,유럽,동남아 여행 후 최초의 국한문혼용체로 쓴 여행기 '서유견문'의 저자.

국어 문법서 대한문전(大韓文典)의 저자.

그리고 김홍집 내각 외무대신 정도네요.

산행길에서 만난 인연인데 이것만 알고 간다면 억울하겠죠.

  인문학에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명제,'아는 만큼 보인다!'

이 명제의 원조가 창애 유한준(1732~1811),창애는 바로 유길준의 고조부가 됩니다.

이 명제를 대중화 한 '나의문화답사기'의 유홍준도 기계유씨.

그는 답사기 1편에서 이리~~

"사랑하면 알게 되고,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는 선대 유한준까지 올라가는데, 그 시대를 보면 역동적인 시대상을 엿볼수 있다는.

 

예술품 수장가로 최근의 삼성가(?),일제강점기의 간송 전형필이 있었다면

조선 후기엔 김광국(金光國)이 있었습니다.

조선 영정조 시기 최고 컬렉터 석농(石農) 김광국(1727~1797)!!

그는 의관 출신으로 축적한 부를 통해

연암  박지원,현재 심사정,겸재 정선 등과 교류하면서 예술적 소양을 길렀습니다.

특히 50세 부터는 작품 수집가로 변신.

죽기 1년 전인 70세에는 전설적인 화첩으로 통하는 석농화원(石農畵苑) 완성했죠.

여기엔 정선 18점,심사정 14점,이정 6점, 윤두서 5점, 김홍도 3점, 네덜란드 동판화 등

화가 101명의 그림을 포함해 총 267폭이 수록되어 있고.

물론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작품이 많이 들어있는 것은 둘이 당대 최고였기 때문.

화첩 속 그림에는 당대의 문사들이 짓고 쓴 화제(畵題)와 화평(畵評)이 붙어있는데

이 화제,화평 속에 재밋는 스토리가 많이 숨겨있다는.

 

연암 박지원,홍석주(정조 사위)는 서문을 썼는데,연암이 쓴 서문을 한번 보죠.

“석농은 연경에 들어가서 천주당의 여러 그림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가 조선으로 돌아오면 전에 모았던 우리 그림들을 모두 불태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도리어 날이 갈수록 우리 그림 수집에 열을 올렸으니 무슨 까닭일까.”

청에 비해 조선의 그림 수준이 낮아 절망할줄 알았는데 석농은 수집에 더 열을 올렸다는 얘기.

이는 석농의 겸재 정선에 대한 평을 보면 저간의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조선 그림은 명수라 하더라도 만약 중국에 보낸다면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근래의 겸재 정선만은 송,원나라의 작품과 견주어도 많이 양보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네덜란드 동판화에 붙힌 석농의 촌평이 재밋어요.

“이 그림은 바로 태서(泰西)의 판각본(동판화)이다.

그냥 보면 단지 거미줄 같고, 자세히 보면 또 파리똥 같은데,

현미경을 가지고 살펴보면 곧장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하다 소리치게 만든다.

....아 신묘하도다.기술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그리고 그리고,

창애 유한준의 저암집에는 석농화원에 붙인 발문이 실려있으니,

여기에 바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의 원조격의 촌평이 보입니다.

知則爲眞愛,愛則爲眞看,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이어지죠.

故妙不在三者之皮粕而在乎知

"그러므로 그림의 묘는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

이 세가지의 껍데기에 있지 않고, 잘 아는 데 있다"

풀어서 살을 붙이면,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사랑하는 자,보는 자,모으는 자가 있다.

한갓 쌓아두는 것이라면 잘 본다고 할 수 없고,

본다고 해도 칠해진 것밖에 분별하지 못하면 아직 사랑한다고는 할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도 오직 채색과 형태만을 추구한다면 아직 안다고 할수 없다.

안다는 것은 화법은 물론이고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오묘한 이치와 정신까지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미는 잘 안다는 데 있으며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한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줄 요약으로,'아는 만큼 보인다!'

 

석농화원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둘이 보이네요.

연암 박지원과 창애 유한준.

둘은 5살 차이로 유한준은 고문(古文)의 대가.

유한준은 '향후 백년간 이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이라는 찬사를 들었을 정도.

다만 발군의 연암과 동시대인이라는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

창강 김택영(1850~1927)은 연암을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작가’라고 칭송하고는,

'열하일기' 중 ‘夜出古北口記(야출고북구기)’는 '5천년 이래 최고의 문장'이라 찬탄했네요.

 

문인상경(文人相輕)!

‘문인들은 서로 상대를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

역사서하면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후한시대 그 반고(班固)는 부의(傅毅)와 문장으로 시대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라이벌은 은근히 상대방을 헐뜯게 되었던 것.

조선에도 그런 ‘문인상경’이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1737~1805) vs 창애 유한준(1732~1811)

젊은 시절 둘은 친한 사이로 문우(文友)이자 학문의 도반(道伴)이었습니다.

하늘 아래 지존은 둘일수 없다는 건지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문장으로 상대를 공격합니다.

연암이 창애에게 보낸 편지는 연암집(燕巖集)에 9개가 실려 있는데 창애 문장을 비난하는 내용.

그런데 그 내용이 누가 봐도 심하다 할 정도로 창애를 탈탈 털어버려요.

“땔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 사라고 외친다면 온종일 돌아다녀도 나무 한짐 팔지 못할 것입니다”

소금인지 땔나무인지도 모르고 글을 쓰냐는 모독.

심지여 창애 글을,

못 생긴 여인이 월나라 미녀 서시(西施)를 흉내 내 얼굴을 찡그리는,

이른바 효빈(效顰)과 같다는 말도 합니다.

이런 편지를 받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요.

나이도 5살 적고 평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 더.

앙심을 품은 창애도 기회가 있으면 공격을 합니다.

 

연암 43세 때인 1780년에 쓴 청나라 여행기,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정조도 읽은 정도로 당대 베스트 셀러.

연암이 청(淸)을 흠모한 나머지 오랑캐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창애는 이를 기화로 열하일기의 문장까지 문제 삼으며 공격수로 앞장을 섭니다.

노호지고(虜號之稿) !

'열하일기는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이라며 비방한 것.

후에 연암의 차남 박종채는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창애가 뒤에서 사주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연암이 66세 때 묘자리 분규가 일어나요.

연암이 조부 산소를 포천으로 옮기고 아버지도 이장하려 할 때,

창애는 그곳이 자기 선조 묘의 정자터였다며 묘를 파헤치고는,

요절한 손자의 관을 박필균의 묘 뒤에 옮겨 놓았다네요.

결국 연암은 시비를 피해 양주로 묘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 박종채는 연암의 행장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에서 이리 분노합니다.

嗚呼險矣 此吾家百世之讐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우리 집안과 100대의 원수다”

 

그러나 역사는 반전은 있는 법.

기계 유씨(杞溪 兪氏) vs 반남 박씨(潘南 朴氏)

100년이 흐른 1871년에 두 집안은 극적 화해를 하게 되는데 이 또한 장안의 화제가 됩니다.

박지원 손자인 환재 박규수(1807~1877) vs 유한준 고손자인 구당 유길준(1856~1914) 

박규수(朴珪壽, 1807~1877)

평양감사 때 미국 무장 상선 제너널셔면호가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온갓 행패를 부리자 직접 나서 불태워 버린 장본인.

이후 영의정까지 올라 개화를 강조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죠.

그러나 문호 개방 요청이 대원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양반층 자제 중심의 신진 개혁세력을 교육하며 결국 그들의 대부가 됩니다.

당시 박규수의 가회동 집(현 헌법재판소)의 사랑방은 그들의 아지트.

이중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김윤식, 서광범, 홍영식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이 되요.

따라서 갑신정변은 10여 년 전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잉태되었다고 볼수도 있는.

그 혁명이 성공했다면 박규수는 조선근대화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을 겁니다.

 

그런 박규수가 1871년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박규수는 향시(鄕試)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는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들여요.

바로 16세의 소년 유길준!

그런데 그는 박규수 조부 박지원과 원수지간이였던 유한준의 고손이라는 사실.

이때 박규수는 유길준을 격려하고 자신의 사랑방을 찾아오라고 합니다.

선조가 쌓은 구원(舊怨)이 봄눈 녹듯 풀리는 순간이죠.

이후 유길준은 박규수의 사랑방을 찾았고,

‘해국도지’ 한 질을 받고는 김옥균과 박영효가 그랬던 것처럼 개화사상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연암 박지원 vs 창애 유한준

100년 후,

환재 박규수 vs 구당 유길준

그런 유길준 묘입니다.

많이 머물렀으니 서둘러야죠.



팔당댐 바로 아래로 팔당대교.

방금 올라온 산 아래는 하남시 창우동.

조정경기장 보이고.

미사리 카페촌은 스타필드 등이 들어서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네요.

강 건너 아파트 군이 덕소.

팔당대교 너머 우측 긴 건물이 팔당역...귀가는 저 팔당역에서 할 예정입니다.

창우동(倉隅洞)?

창고가 있던 동네라는 뜻.검단산 유래의 여러 설 중,

이곳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의 집산지 였기에

창고를 짓고는 '검사하고 단속하였다'하여 검단산.



미사리(渼沙里) & 미호(渼湖)

 

시점1...검단산서 미사리 

 아름다운 모래톱에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이겠죠.

강폭이 넓고 아름다워 일대 한강을 미호라 불렀고 드넓은 모래톱 지대를 미사리라 불렀습니다.

미사리(渼沙里)의 유래가 되는 거죠.

지금은 사라진 미사리 카페촌들,,,추억 돋나요?

서강과 난지도 일대를 서호(西湖),행주산성 앞을 행호(杏湖),

압구정 앞을 동호(동호대교 유래) 불렀듯이 미호는 미호강(渼湖江)이라 불리기도.

 

사진을 보면 미사리 일대가 넓은 충적토와 모래 삼각주로 이뤄진 이유가 분명해 보이네요.

팔당대교~팔당댐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를 두미강,두미협이라 불렀죠.

우측 팔당 협곡을 쏜살로 내려오던 물길이 팔당대교 즈음서 갑자기 유역이 넓어지면서

물길은 느려지고 실려온 토사들이 하상에 쌓인 것.

더욱기 동쪽,구리시에서 왕숙천이 직각으로 흘러내려 부딛치니, 물길은 더욱 느려지고.

쌓이는 퇴적물로 하상이 높아지고 강 유역은 더욱 넓어져 가며 강같은 호수,호수같은 강이 형성된 것.

미사리 앞은 70년대 까지만 해도 섬으로 남아있어 ‘미사섬’으로 불렸네요.
하지만 88올림픽으로 샛강을 막아 조정경기장(사진)이 들어서면서 섬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고.
그리고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많은 역사의 층위가 쌓인 곳.

한눈에도 고대인에게 탐나는 곳이였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고.

결국 한성 백제도 한강 상류인 이곳 일대에 첫수도를 세웁니다.

 

시점 2...겸재의 미사리서 석실서원 

미호 일대는 아름다운 풍경이라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네요.

겸재 정선은 미호 서쪽인 미사리 방향서 석실서원(현 구리시 토평) 쪽을 바라보면

그림 두점을 그렸으니 작품 이름이 '渼湖1,2'

정확한 위치는 사진에서 보이듯 강 건너 덕소 아파트 군 바로 아래 한강변.


 ‘미호(渼湖)1'


배를 타고 가는 시점서 석실서원(石室書院)을 향해 그린 것.

왼쪽 끝 지점에 왕숙천이 흐르겠네요.우측은 덕소 방향.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에 의해 시작된 진경산수화.
역사든 사람이든 계기 중요하죠.

진경산수라는 조선 화풍을 개척한 겸재 정선이 우리 산천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친구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만남이죠.

이병연은 1710년 금강산 초입에 있는 금화 현감으로 부임했어요.

이듬해 스승 김창협과 친구 정선을 초대합니다.

이때 겸재는 생애 첫 금강산 여행을 하는데 그 감동으로 조선의 산천을 화폭에 담기 시작해요.

이후 일생 동안 겸재는 진경산수화에 매진.

김창협은 집권 노론 출신으로,

이후 겸재는 노론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그만의 화풍을 펼친 것.
단원 김홍도가 50세 때, 겸재는 60대에 절정.

바로 이 시기(60대 후반)에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경교명승첩은 말 그대로 서울 근교의 명승을 유람하며 그린 화첩.

상류 두물머리~하류 행주산성에 이르는 한강변 풍경을 33폭의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저 미호의 주 배경은 석실서원.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 우주머리 김상용과 김상헌을,

이후에는 겸제의 스승이기도 한 김창협까지 제향하는 사당으로 노론들의 중심 서원.

(남인은 도봉산의 도봉서원)

겸재가 석실서원을 배경으로 하고 그림에도 넣은 이유가 스승 김창협 때문일 터.

 구리시 왕숙천과 덕소 사이 한강변인 미호의 배경지는 지금은 음식점과 카페촌으로 변했고.



미호2

 

석실서원 옆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을 그린 것.

三洲三山閣?

말 그대로 마을 앞으로 3개의 넓은 모래톱이 있었고,그 모래톱 위에 지은 집의 당호가 삼각산.

집주인이 바로 스승인 농암(農巖) 김창협으로 그가 여기에 은거했다는.

미호가 워낙 유명했고,

특히 겸재의 후원 세력인 노론의 김창협이 은거한 곳이라 이렇게 두점이나.

그림을 그린 겸재의 위치는 강 건너 미사리로 지금의 강동구 강일동.

가운데 배 3척은 어선,돗을 달고 있는 배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나룻배.

돗이 모두 바람을 맞고 있는 형태로 보아 팔당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고.

원근의 좌측은 수락,불암산이고 우측은 천마산.

지금 일대는 행정구역으로 구리시 수석동.

수석동은 수석토성이 있어서 생긴 지명.

수석토성은 백제 때 지은 토성.

강 건너가 한성백제의 왕궁 지역이라 수도를 방어하는 강 너머 외성 역할을 한 거네요.

임진강 일대에도 백제 시대 토성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더 오르니 우측 예봉산이 선명하네요.

덕소(아파트 단지) 너머로 멀리 구리시가 보이고.

덕소 앞으로 서울~양양 고속도로의 미사대교는 희미하게.

앞 팔당대교 너머 긴 건물이 팔당역입니다.



좌 예봉산(禮峰山 679m),우 예빈산.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 4키로 긴 협곡(두미협) 상류에 팔당댐을 건설한 것.

중앙선과 6번 국도가 예빈산 발목을 붙잡고 지나가고 있네요.

 

시점 3....예빈산에서 검단산

그럼 앞 예빈산에서 보는 이곳 검단산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래 사진!


하남시,그리고 건너 롯데 타워가 보이네요.

난 지금 저 검단산 사선 능선길 중간 즈음 움푹한 곳에 서 있고.

  저 일대가 바로 백제 초기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 즉 한성이 있던 곳.

딱 봐도 검단산은 한성의 진산,숭산임을 알수 있고.

왕성에서 보자면 검단산은 해가 떠오르는 곳.

롯데타워 앞으로 길게 흘러내린 산줄기(춘궁동,이성산성)를 타고 오르면 남한산성에 이릅니다.

한성의 그림이 선명히 그려지네요.

풍납토성,몽촌토성을 왕궁으로 하고 앞 한강은 거대한 북방 차단막.

한강 건너 아차산성(워커힐 호텔),수석동 토성등은 한강 너머의 외성.

뒤쪽인 이성산성,남한산성이 후방기지.

검단산 정상은 왕조와 주신을 모시는 사당.





여기서 부터 정상까진 능선길 따라 20분.



정상이 보이고



검단산(黔丹山,657)

 

하남시 진산으로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은거한 데서 유래.

검단선사는 백제 대표적인 승려로 고창 선운사를 창건한 인물.

유명 선사이다 보니 그 족적이 지역 이름으로 많이 남아있어요.

남한산성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있는 산도 검단산.

외에도 인천 검단지구도 있네요.

검단산을 단군왕검과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정상에선 예전 한성백제 시절 동명왕에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조 땐 봉수대가 있었다는.

 




시점 4....정상에서 한성백제

 

정상서 바라본 북서쪽.

앞으로 중부고속도로 하남 나들목이 보이고.

앞에 길게 보이는 산줄기 '둘' 보이시죠.

앞이 객산,뒤가 이성산(200) 줄기입니다.이성산에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고.

이성산 너머에 한국 천주교의 종조 광암 이벽이 태어났네요.

판교~하남 고속도로 상에 있는 광암터널 유래.

객산과 이성산 사이로 길게 늘어선 동네가 하남시 춘궁동(궁이 있었다는 뜻).

춘궁동에서 골짜기 따라 올라가 보시죠?

좌측으로 그 끝이 남한산성이 있는 남한산입니다.

롯데타워는 미니어쳐 처럼 보이고.

롯데타워 왼쪽이 청계산,그 너머로 관악산.



보이는 일대가 바로 하남 위례성,즉 한성백제의 수도!!

 

서기 전 18년~475년까지 493년 간 백제의 수도,이 시기를 '한성 백제' 시대라 합니다.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된 뒤 백제는 웅진, 지금의 공주로 천도.

그리고 성왕은 538년 백제 부흥을 꿈꾸며 다시 사비(부여)로 천도 후 660년에 멸망합니다.
백제 680년 역사 중 웅진과 사비 시대는 각각 64년,123년에 불과.

백제의 진짜는 보이는 저 한성에 있을지도.

괜히 강남이 아니네요,2000년 역사의 강남입니다.

그럼 왜 백제하면 공주,부여만 연상되는 걸가?

물론 한성엔 비주얼한 유적이 없어서겠죠.

그렇다고 하남 위례성에 한성의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롯데 타워 인근 올림픽 공원의 몽촌토성,천호대교 남단의 풍납토성,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이성산의 이성산성 등등.

그러나 강남 일대가 70년대 급작스럽게 개발되면서 있던 유적들도 다 파해쳐 사라졌고.

풍남토성도 애걸복걸해 겨우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아마 지금 마인드라면 한성 시대 유적도 많이 살아 남았고,유물들은 수습되었겠죠.

 

검단산 정상은 상당히 넓어요.

그런데 특이한 건 등산객 대부분이 동쪽에서 서성인다는.

동쪽의 팔당댐이 만들어낸 북한강,남한강 유장한 물줄기를 즐기는 것이죠.

반대편 서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바로 한성 백제 고토.

산 정상에 서면 많은 게 보이고 쉽게 연계된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나는 지금 백제 초기 역사를 한 눈에 꿰뚤고 있으니까요.

아주 오래 전 남한산성에 올랐을 때여요.

산성 내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 숭열전이 있었고.

(영조,정조는 여주시의 세종과 효종 왕릉을 참배하곤 했는데 귀궁 때는 늘 남한산성을 들렀는데

영조는 수어장대, 정조는 숭열전이라는 편액을 내립니다)

그때는 남한산성의 시초가 온조왕이 지은 산성에서 출발했다는 얘기와

그리고 온조 사당이 있는 이유가 납득이 안되었죠.

이 험한 곳에 산성을 쌓을 여력이나 있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그런데 오늘 한성 백제를 지리적인 전체 그림으로 보니 많은 게 이해가 됩니다.

 

길게 늘어선 춘궁동 마을 보이시죠?

春宮洞.....궁이 있던 곳이라는 뜻으로 '고골'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

왕궁 사찰터로 추정되는 동사(桐寺·同寺) 터가 저기에 있습니다.

사진 우측 중앙 둥근 산등성이가 이성산(200)으로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여기에.

이성산성은 왕궁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몽촌토성의 외성(外城)으로

이성산 산줄기를 따라 남으로 오르면 남한산성에 이릅니다.

그리고 왕궁에서 보면 해가 떠오르는 곳이 동쪽인 이곳 검단산이 되죠.

삼국사기에서 동쪽 산에 왕이 제사를 지냈다 했으니,정약용 말대로 동쪽산은 분명 검단산 일터.

조선조 땐 봉수대가 있었고.

예전 정상엔 동명왕에 제사를 지내는 터가 있었는데 군 헬기장 만들 때 밀어버렸다네요.

그리고 정상의 군시설은 아래 팔당댐을 지키는 부대였겠죠.

정리하면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왕성,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은 외성으로 기능.

검단산은 해가 뜨는 신성 구역으로 신과 왕조에 제사지내는 곳.

방이동,석촌동,가락동에 있는 고분군 지역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사후 세계 터.

그리고 예전엔 저 일대 모두가 광주목(군)이였습니다.

광진구의 광진나루는 바로 광주목으로 들어가는 나루라는 뜻.





시점5...검단산서 예빈산,예봉산&수종사

 

이제 동쪽을 스캔해 보죠!

앞 산줄기 중 왼쪽이 예봉산,우측이 예빈산으로 둘은 등줄기가 연결.

그리고 예빈산 줄기 끄트머리가 정약용 생가 마재.

예빈산 뒤쪽 중앙으로 검게 보이는 산이 운길산(610).수종사는 운길산 8부 능선에.

따라서 마재 뒷길을 따라 오르면 예빈산~예봉산~운길산~수종사에 연결됩니다.

운길산 앞으로 북한강이 흐르고.

예전 부터 멋진 보름 달맞이 장소로 정평이 난 곳.

수종사서 보는 보름달은 하늘에 하나,북한강에 또 하나.

禮峯山...예를 차리는 봉우리라는.

남한강,북한강서 내려오다 멀리 예봉산 봉우리가 보이면 지척이 한강이라,

미리 임금에 예를 갖췄다는 데서 유래.

예봉산은 뱃사공에겐 등대 역할.

 

예빈산은 태종 이방원의 사냥터로도 유명.

예빈산이란 이름은 바로 예빈시(禮賓省)의 땔감 공급을 담당했기에.
예빈시란 종친들,삼정승 식사,그리고 궁중연회 주관부서.

검단산은 군기시(軍器寺)의 땔감을 공급했네요.

군기시란 고려~조선시대에 병장기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



시점 6...정상 동쪽으로 팔당댐&두물머리

 

팔당댐 없는 서울을 생각하긴 힘들죠.

1976년 완공,애초엔 수력발전과 홍수예방이 목적이였으나 지금은 수도권 식수원이 주목적.

댐 아래 마을이 배알미동입니다.

수도권 2500만명의 식수을 취수하는 팔당취수장이 여기에...그리고 댐 바로 위쪽에도.

취수된 물은 이곳 검단산 땅 속을 통과합니다.

사진에서 보듯 좌측으로 설악산과 금강산서 발원한 북한강이 흘러오고.

정면으론 오대산 그리고 태백산 줄기 검룡소서 발원한 남한강이.

그리고 사이로 남한강,북한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양수리)가 보이네요.

그 뒤로 멀리 양평 용문산(1,157m)~가평 명지산(1.252m)~연인산(1.068m)로 이어지는 등줄기.

두물머리 앞 작은 섬이 철새의 천국 족자섬.

족자섬 앞으로 길게 한강으로 드러누운 땅끝이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라고 묻힌 마재.

한눈에 봐도 살기좋은 동네 맞네요.

중앙일보 홍 회장댁 별장이 마재 왼쪽 보이는 다리 바로 아래에.

마재는 조선시대엔 광주목(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겸제 정선은 두물머리 당산나무 시점(세미원)에서 

족자섬과 마재를 근경,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과 예봉산을 원경으로 하는 독백탄이란 그림을 남겼고.

그리고 그 독백탄은 홍회장 댁에 있다는 얘기가...이해 오시나요?

강 건너 우측 산자락이 남종면 분원리와 금사리.

우측 더 가면 퇴촌면...더 더 가면 한국 천주교의 탯줄 천짐암이 있는 앵자봉.

우측 강줄기는 용인서 발원해 광주시를 가로질러온 경안천(우천).

이렇게 북한강,남한강,경안천이 만나는 '세물머리'에 댐을 지으니 팔당호가 되었네요.

그리고 팔당호는 산자락을 빙둘러 곳곳에 강변 도로를 만들어 내니,

이는 8,90년대 서울 인근 최고 인기 드라이브 길.

요즘은 산자락 곳곳에 별장,세컨하우스들이 들어섰습니다.

이렇게 3개의 강이 만들어 낸 일대 풍광은 어떠했을까요?

조선조 때도 많은 시인묵객들이 일대를 찾았어요.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에 실린 33점 중 3점이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녹우탄,독백탄,우천.


우측 강 건너 분원리 보이시죠?

붕어찜,매운탕으로 유명한 그곳.

분원리,금사리,퇴촌면 그리고 천지암 위치 확인 위해 자료 사진 소환!

아래 사진은 팔당댐 건너 예빈산에서 바라보는 시점.

 

시점7.....예빈산 정상에서 마재,퇴촌&경안천


강 건너가 조선 분청사기의 고향이요,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족자섬이 보이고.앞으로 길게 마재,강 건너 분원리,분원리 너머 멀리 천진암의 앵자봉.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한 한강은 다시 경안천을 보듬고..

우측 멀리 경안천 강줄기 위로 광주시가 보이고,더 들어가면 에버랜드 지나 용인시청.

교각 아래 작은 길이 예전 양평~홍천~설악산 가던 6번 국도.

교각 우측 팔당호 따라 난 길이 옛 중앙선 철도(현 자전거길)

 

강 건너는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금사리.

그리고 뒤쪽 흰점들 보이시죠? 퇴촌사거리(경안천 가까이)로 일대는 퇴촌면.

뒤쪽 멀리 두 완만한 능선 중 좌측이 양자산,우측이 천진암의 앵자봉.

천진암은 퇴촌 사거리서 남으로 9키로 지점.

궁중,관청의 그릇이나 도자기를 담당하던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있던 곳이라 분원리라는 지명이.

분원에서 광주 일대의 자기 생산을 관리한 것이죠.

우리가 아는 국보 달항아리 백자 대부분은 금사리 산이네요.

앵자봉 너머 이천시까지 일대는 조선 백자의 산지.

분원리를 중심으로 광주시,이천시,양평 일대서 260 여개 가마터가 발견되었네요.

그러니 실재로는 훨씬 많았겠죠.

가마들은 10년여를 주기로 땔나무 찾아 일대를 돌고돌았습니다.

 

도자기 생산 조건 셋....백토,땔나무,수로.

땔나무 찾아 가마터를 옮기다 보니 광주,이천 일대가 도자기 생산지가 됐고.

당시 물류 수송은 강이 핵심으로 광주 일대 도자기 생산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게 수로였다는.

부족한 땔나무는 한강 따라 실어날랐고.

또 부족 땔감은 영월,정선 등에서 내려온 땟목에 1/10 세금을 붙혀 해결했는데

이게 불만인 뱃사공들이 분원리 관청에 들이닥쳐 항의 농성을 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자기 재료인 백토(白土)도 수로를 따라 이천,영월,충주 등에서 실어왔고.

완성된 자기는 한강 따라 궁으로.

분원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의 분원초등학교가 들어섰네요.

교내엔 당시 책임 관료들의 선정비들이 세워져있습니다.

야산을 파보면 자기 파편들이 나오고,일대는 지금 매운탕의 고향에 붕어찜 일번지가 되었습니다.


더욱 가까이 보면,

앞 구중앙선의 자전거길이 선명하고.

자전거 길따라 좌측 중앙 붉은 건물들이 봉주르.

강건너  분원리와 그 뒤쪽으로 퇴촌 사거리,

다시 그 뒤로 천진암 앵자봉,우측으로 경안천과 광주시도 선명.

광주시 우측으로 분당,좌측으로 이천~여주시가 이어지는데 이들은 경강선 전철이 동서로 연결.

그럼 검단산을 하산해서 저 분원리서 바라본 팔당댐은 어떤 모습일까요?

 

시점7.......분원리에서 팔당댐,마재&두물머리

팔당댐이 보이고

강 건너 바로 앞이 마재

좌가 검단산(현재의 나),우측이 예빈산(예봉산),우측 끝 운길산은 등줄기로 예봉산과 연결.



앞으로 마재,우측으로 양수면.

가운데 운길산 8부 능선 흰점이 수종사.

수초들 아래는 옛 소내리가 팔당댐으로 수몰되었네요.


다시 검단산으로 돌아와,

강 건너(분원리) 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물길 보이시나요?

물안개공원(남종면 귀여리)으로 팔당 인근 비장의 가족 단위 휴식처.

팔당호를 빙돌아 우회하기에 접근성이 떨어져 덜 알려졌을뿐.

 

시점 8.........'물안개 공원'에서 검단산,예봉산&두물머리.


귀여리에서 팔당호 쪽으로 다리를 건너 들어오면 수십만평 섬같은 휴식 공간이 나옵니다.

 

7월이면 건너편 세미원 보다 더한 연꽃 세상이 펼쳐지고.


길게 뻗은 산책길이 그렇게 아득할 수가 없어요.

좌측 예봉산,우측 운길산.


건너는 두물머리와 세미원.

좌측 운길산 자락(흰점)에 수종사가 보이고.


왼쪽 검단산,우측 예빈산~예봉산(정상에 강우 측정 레이더 기지)

두 산 사이에 팔당댐...바로 앞이 마재.

그러나 예빈산 자락 아래로 보이는 천주교 공원 묘지는 정서적으로 일대 풍광을 망치는 지점.

 

다시 검단산 정상 원점으로 돌아와~~

 

저 물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던 많은 역사가 있었으니,

1.한성 백제 시절 개루왕 때 도미부인은 눈먼 남편 도미를 찾아

지금의 파주까지 배타고 내려가 고구려로 망명했고(도미설화).

2.고려 공양왕은 개경의 예성강 벽란도에서 배를 탄 후 한강을 거슬러 올라 삼척으로 귀양했고.

3.삼촌에 왕 위를 빼앗긴 단종은 광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올라 이포나루서 내린 후 뭍으로 영월까지.

4.그리고 5년 후 단종의 삼촌인 세조는 금강산을 구경하고는 동해를 따라 남하한 후

낙산사~대관령~오대산 상원사를 들렀는데 환궁 길도 저 남한강 물길 따라 내려갔습니다.

5.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1831~1904)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비숍은 무려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는데,

마포나루를 출발해 남한강 물길 타고 팔당~양평~여주~충주~청풍,단양 거쳐 영춘까지.

그리고 영월 못미쳐 온달산성 앞 영춘서 내려 나귀 타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네요.

6.죽령을 넘은 수많은 조선 선비들도 단양서 배를 탄 후 저 물길 따라 한양으로 내렸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봉산 앞에 이르러서는 한양의 임금에 예를 갖췄을 터.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 물길은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놀이터!!

 

15세 약용은 한양 홍화보(洪和輔) 집으로 장가들던 날,

계부(막내 숙부)와 배를 타고 물길 따라 내려갔네요.

23세 때는 큰형수(이벽의 누이)의 제사를 지낸 후 이벽과 배를 타고 한양으로 귀경 길에

이벽으로 부터 천주교 선상 설교를 듣기도.

해배 후에는 남한강을 올라 충주 선산에 다녀왔고.

또 단양까지 남한강을 거슬러 오른 후 '단양산수기'를 썼네요.

1820년,23년에는 북한강을 타고 올라 춘천 소양강과 화천에 닿았고.

그리고 남긴 글이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산수(汕水)는 북한강 옛이름.

 

仁者樂山 知者樂水(인자요산 지자요수)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

논어(論語)의 옹야(翁也) 편에 나오는 얘기.

태생이 물가였고 '水'를 사랑했던 정약용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자(知者)일 터.

그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열수(洌水,한강)을 사랑했어요.

다산이라는 호보다 열수(洌水)라는 호를 더 좋아했으니.

그는 지인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마재 앞 두물머리에 배를 띄웠죠.

1823년 손자(학연 아들) 장가들 때를 맞춰,

아들 학연,학유와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 소양정 거쳐 청평사에 이름니다.

그가 얼마나 강을 좋아했는 지는 당시 손수 꾸민 배를 보면 알수 있어요.

집처럼 꾸몄는데,지붕을 얹고 산수록재(山水綠齋)라는 편액까지 걸었죠.

아들 배는 '물 위를 떠다니는 살림 집'이라는 뜻으로 부가범택(浮家汎宅),

그리고 수숙풍찬(水宿風餐)이라.물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라.

 

그는 어떤 경험치에 이르면 자신만의 논리로 글을 남겼습니다.

평생 500여 권을 썼지만(거의가 유배기간에) 자신의 의지,사유가 들어가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

어떤 고전도 그를 거치면 늘 다산 버전으로 재탄생.

이러한 학구적 취향은 결국 실학,서학을 거쳐 서교에 경도될 수밖에.

두번이나 북한강을 타고 올랐는 데 기록의 제왕,다산이 가만있을 리가요.

그는 북한강 여행 후에는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썼습니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조선열전(朝鮮傳)에 따르면,

조선(고조선)에는 산수(汕水),습수(濕水) 그리고 둘이 만나 열수(洌水)가 있다고 했죠.

실학의 집대성자 답게 다산은 이를 고증도 할겸 북한강에 오르고 '산수심원기'를 쓴 것.

다산은 산수(汕水)는 북한강,습수(濕水)는 남한강,열수(洌水)는 한강이라 여겼나 봅니다.


다시 맞은편 예빈산 정상으로 순간 이동!!

시점 9...예빈산에서 마재,분원리,엥자봉 천진암,경안천,광주시

 

앞 마재는 예빈산 줄기 끄트머리임을 알수 있네요.

다산은 형 약전 함께 앞 고향집 마재에서 이곳 예빈산을 올랐네요.

마재 뒤로 연결된 능선을 타고 오르면 예빈산 거쳐 예봉산에 이르죠.

예봉산 능선은 다시 수종사 운길산 까지 연결되고.

예봉산 정상 옆으로 문철봉이 있는데 약용과 약전은 틈틈이 올랐기에 붙혀진 이름.

형제가 학문을 닦던 곳이라 문철봉(文喆峯).

형제는 성년이 되고서는 앵자봉 향해 집앞 열수(한강)을 건넜습니다.

앵자봉 자락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천진암이.

이곳에 이벽,권철신,권일신,이승훈,정약종 5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죠.

한국 천주교 시발점은 1784년 이승훈(李承薰,1756~1801,베드로)이 북경 천주당에서 영세 받은 해.

이보다 5년 전 1779년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성호 이익을 사사하거나 사숙한 일군의 남인계열 학자들이 강학회를 열기 시작해요.

이들 강학회는 실학에서 시작해 서학을 거쳐 결국 서교(西敎)로 발전.

이 강학회 주요 멤버들이 권철신 권일신 형제,이벽,이승훈,정약전.

강학회 핵심인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 길에 영세를 받게하니 이벽은 한국 천주교 성조(聖祖)가 됩니다.

한참 연배인 권철신과 이승훈을 입교하게 한 인물이 바로 이벽(李蘗,1754~1786).

그러나 이벽은 집안의 압박을 못 이기고 32세의 나이로 대들보에 목을 걸었고.

가문의 화를 우려한 타살 가능성이.

천진암으로 이장을 위해 이벽 무덤을 팠는데 치아가 검게 나왔다네요,독살 간접 증거.

이렇게 정약용 형제들은 마재,이승훈은 양평,이벽은 광주(현 하남시)로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은 죄다 두물머리로 엮어졌네요.

약용도 약전,약종 형과 함께 마재에서 배 타고

분원리로 건넌 후 천진암으로 들어가곤 했고.결국 셋은 영세까지.

 

다음은 다산이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 남긴 당시의 천진암 강학회 대한 회고.

/선형(先兄) 약전이 공(권철신)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 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 하였는데.../

당시 권철신은 멤버 중 가장 연장자로 강학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근래 다산 연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정민(한양대) 교수는 

더 나아가 약용과 약전이 신부였다고 주장하고 있네요.

당시 몇년 간은 신자들 끼리 임의로 신부를 임명했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시대로

당시 북경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이 10명에 신부 서품을 줬다는 것.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다산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과 해남 윤씨에서 4남 2녀 중 4남.

(15세 때 장가든 다산은 홍씨 부인과 사이에 6남3녀를 낳았으나 '三之二'가 요절해 2남1녀만)

약현은 첫부인에서,약전.약종.약용은 두번째 부인 해남윤씨에서.

해남 윤씨는 공제 윤두서의 손녀.

평소 다산은 자신의 외모,성정은 외가(外家)로 부터 왔다고 말하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

(사암(俟菴)은 다산이 즐겨쓰던 호로 '다음 세대를 기다린다'로 시대에 치인 심사가 들어있음)

1921년 다산의 4대 손 정구영(학연의 증손자)이 편찬한 다산의 일대기로

해배 후 다산 연보를 세우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그는 다산이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조부가 고산 윤선도)를 닮았다 했어요.

물론 이는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유추한 것.

약용 8세 때 어머니 해남 윤씨가 죽자 큰 형수는 약용을 친모처럼 돌보는데,

다산은 해배 후엔 그런 형수를 기리며 '서모김씨묘지명'을 짓죠.

당시 여성이 묘지명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더 나아가 며느리 묘지명도 씁니다.

결국 총 32개의 묘지명을 썼는 데, 아마 조선 신기록 일 터.

 

그런데 혼인으로 맺여진 친인척들의 면면을 보면 다산 집안이야말로 한국 천주교의 대종가!

이승훈,이벽,황사영,윤지충,홍낙민.......이들은 태동기 한국 천주교의 상징 인물들.

이벽 누이는 큰 형인 약현에 시집을 가니 약용엔 사돈.

황사영은 약현의 사위.

그리고 이승훈은 약용의 누이와 혼인하니 둘은 처남 매부 사이.

최초의 천주교 탄압으로 기록된 진산사건 때 처형된 윤지충은 다산의 외종사촌.

정약종과 함께 처형된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은 약현의 셋째 사위로 황사영과는 동서지간.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 거부로 천주교 관련 첫 처형자 윤지충.

(황사영 처럼 그도 다산 형제들로 부터 처음 천주교 접함)

한국 천주교 성조 이벽,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그리고 황사영 백서의 황사영까지 혼인으로 엮여있다는.

이렇게 초기 천주교의 핵심 인물들은 다산에 와닿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

여기에 약종,그리고1839년 순교한 약종의 아들 정철상,정하상,딸 정정혜.

마재는 이렇게 천주교 성지가 되었습니다.

다산 4형제 중 악현만 제외하고 셋은 천주교 핵심 그룹.

약종은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지만 약전과 약용은 배교 후 진보(?) 유학자로 원점 회귀!

 

당시 서학과 천주교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남인들에게 정치적 기호식품 같은 것.

남인의 정치적 후원자 정조가 1800년 붕어합니다.

이때 약용은 사교 주동자라며 꼬리를 무는 탄핵에 마재서 은거 중이였고.

이는 '스스로 삼간다'는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건 데서도 알수 있네요.

5개월 간의 정조 국상이 끝나자 순정왕후(영조 계비)과 노론벽파의 공세가 몰아칩니다.

표면적인 것은 사교 척결이였지만 실제로는 정헌 이가환,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의 제거가 목표.

1799년에 세상을 뜬 정승 채제공의 관작을 먼저 추탈해버리죠.

특히 정조 의중에 채제공(남인 영수) 이후 정승 1순위 였던

희대의 천재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제1 타킷이 됩니다.

사교 소탕 속 정약종의 책롱(冊籠,책을 넣어 두는 농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 발각.

책롱 속엔 천주서적,성물,다산이 황사영에 보낸 편지,약종 일기장,주문모 신부 서신이 들어있었고.

특히 6년여 체포망을 뚫고 선교 중인 주문모 신부 편지는 결정적.

드디여 천주교 초기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잡혀오고 추국이 시작됩니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이끌었던 최연장자로 좌장인 녹암 권철신(1736~1801)이 먼저 옥사하고,

이가환(李家煥,1742~1801)은 장살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다산의 리얼한 생존투쟁이 벌어지는데~~~.

여기서 완전체 대학자 다산의 빈틈을 보게 됩니다.

다음은 정민 교수(한양대)의 한국일보 연제 '정민의 다산독본'(66호)의 내 버전.

추국 때 다산은 이리 말합니다.

“1799년 형조에 근무할 때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지어 임금께 바치려 했습니다.

이제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천주학을 하는 자는 제게 원수입니다.

 제게 열흘을 주시고 포교와 함께 나가게 해 주신다면,사학의 소굴을 체포해 바치겠습니다.”

나아가 다산은 최창현(崔昌顯,1759년~1801,당시 카톨릭 총회장)을 고발했고,

조카 사위 황사영은 죽어도 변치 않을 인물,원수라 진술합니다.

또 천주교 우두머리로 김백순과 홍교만을 지목 후,천주교도를 체포해 신문하는 방법을 말하기도.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거처까지도 알렸다는.

이같은 내용은 당시 ‘추안급국안’의 추국 기록에 다 나온 얘기네요.

위기 모면의 기지도 발휘하는데,

한 추국관은 편지 속에 나오는 정약망(丁若望) 이라는 이름을 발견해요.

당연 추국관은 丁若望이 바로 丁若鏞이라 여기고 쾌제를 부르죠.

그러나 다산은 대담하게 부정.

“저희 일가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약망은 바로 다산의 세례명.

심문관은 '약망'이 세례명 '요한'의 한자 표기인 줄 몰랐던 것.

돌림자인 약(若)자 항렬의 이름인 줄로 알고 속아넘어갔네요.

이 정도면 다산에겐 천운!!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1756~1801,베드로)의 생존 투쟁도 마찬가지~~.

이승훈도 같은 날 국문장에 끌려 나왔습니다.

이때 다산은 집안이 이승훈 때문에 천주학에 빠지게 되었다며 이승훈을 원수라 말합니다.

이승훈은 이리 답했네요.

“지금 정약용이 저를 원수로 여긴다면 저 또한 그를 원수로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가 오가는 길목에선 처남 매부의 정리도 별도리가 없었다는.

삶에 대한 집착으로 이승훈은 끝내 배교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배교자로 죽었고,그의 시신은 집으로 운구 되었지만 맞은이 없었고.

이 땅에 천주교의 첫 씨앗을 심었던(그래서 베드로) 이승훈의 최후가 이랬다는.

(이상은 '정민의 다산독본'의 내 버전)

이렇게 신유박해로 권철신,이가환은 옥에서 맞아죽고

이승훈,최필공,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정약종,주문모신부 등 7명은 2월에 참수.

그리고 황사영은 11월 처형.

약종의 두아들 철상,하상에 아내,딸 정혜도 1839년 순교하니 약종은 완벽하게 절손합니다.

정약종(1760~1801)은

최초 평신도협회 명도회장(明道會長)에다 최초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저자.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선택한 것도

아우구스티노가 젊은 시절 자신처럼 많은 방황을 했던 인물이였기에.

실제로 약종은 동생 약용보다 훨씬 늦게 천주교에 입문합니다.

황사영 백서엔 약종이 죽음을 맞이한 당시 광경이 장엄하게 묘사되어 나와요.

  서대문 밖에서 참수된 약종 시신은 한강을 타고 올라 마재로 보내졌는데,

약현이 수습을 거부해(?) 마재 가까운 검단산 배알미동에 뭍혔다는.

약종의 자식 철상,하상,정혜는 다산의 마재 집에서 돌봤고.

하상은 성년 후 한양으로 떠나 정식 천주교에 입교합니다.

결국 맏형 약현만이 천주교를 멀리하면서 겨우겨우 집안을 건사했고.

그러나 처남이 이벽이요,첫사위가 황사영이니 이또한 아이러니.

 

이렇게 1801년의 신유박해는 외 관은 사교 척결이였지만,

정약종의 책롱 발각이 도화선 되어 권력을 쥔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남인 공서파(攻西派)를 이용해 정조의 비호로 막혔던 남인 채제공 세력을 제거하는 게 진짜 목적.

공서파(攻西派)요?

정조가 즉위 후 노론을 견제할 목적으로 남인 시파(時派)를 비호 육성하자

노론 벽파(僻派)에 붙은 남인 벽파의 무리를 말합니다.(정조 아버지 사도세자가 남인 입장)

반대로 신서파(信西派)는 남인 중 서학을 신봉하거나 두둔하던 세력 .

1801년 신유박해의 살육장에서 다산은 검거 협조 대가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약종이 처형되고 이틀 후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다산은 경상도 장기현(포항시 장기곳)으로 유배.

당시 장기현서 다산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배향하는 죽림서원을 찾습니다.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촛불을 들고 서원을 들어갔어요.

그러나 서원측의 반대로 되돌아 왔다는.

노론의 성역에 남인의 유배객을 받을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

여기서 많은 게 읽히네요.권력자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같은 것.

당시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도 당파에 따라 철저한 갈등합니다.

남인 계열은 퇴계 이황만이,노론계는 우암 송시열만이 진리.

 

장기현에서도 다산이라는 사람의 원대함을 엿볼수 있다는.

그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마음을 다잡고 전진합니다...포기란 게 없는!

장기현에서 병으로 고생하는 데도 국사급 유배객을 누가 치료해주겠어요?

그는 의학서를 뒤지고 연구해 스스로를 치료합니다.

"내가 장기에 온지 몇달만에 집 아이가 의서 수십권과 약초 한상자를 보내왔다

병들었을 때도 보내준 약만으로 치료해야했다"

그러나 다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촌병흑치'라는 의서를 씁니다.

유배 3년 전인 1798년에도 그는 천연두 치료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썼었으니.

다산은 호가 삼미자(三眉者)이기도 한데 어려서 천연두 후유증으로 한쪽 눈썹이 셋으로 갈렸기 때문.

그래서 눈섭이 3개인 三眉者.


시점 10......예빈산에서 두물머리,마재.

푸른 북한강과 장마 후 황토물의 남한강의 대비가 이채롭고.

 

그러나 다산 형제는 죽음의 문턱을 아직 완전히 넘지는 못했으니~~.

그해 가을 황사영 백서가 탄로나며 두 형제는 한양 추국장으로 다시 압송.

황사영은 마포의 애오개(아현동)에 살았는데 주문모 신부도 여러 번 황사영 집에 들렀고.

신유박해가 시작된 뒤 다산은 추국장에서 천주교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황사영을 지목해요.

조카사위 황사영은 '황사영 백서'에서 다산을 이리 언급합니다.

“그는 전부터 천주를 믿었으나 목숨을 훔쳐 배교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비록 천주교를 해쳤으나 속마음에는 아직도 죽은 신앙이 있습니다”

배교는 했지만 신앙의 잔존물은 있다는 것. 

집권세력들은 황사영을 처형하고 서둘러 상황들을 종료합니다.

주문모가 청나라 사람인지라 불똥이 황제로 튈까 우려한 것.

황사영 처형 후 3일 만에 약전과 약용은 다시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

형제는 나주 율정점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약용은 영암 거쳐 강진으로,형은 영산포서 배 타고 흑산도로.

이로써 정조가 정략적으로 후원한 남인들은 완벽히 제거되고

1801년 이후에는 완벽한 노론벽파의 세상으로 완결.

그러나 유일한 예외 인물이 있었으니 정약용!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약용은 어려서 카리스마의 약전과 늘 함께 다녔고 의지했는 데 유배길도 함께.

정조는 "약전의 뛰어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 보다 낫다"고 했었죠.

다산도 '선중씨(약전)묘지명'에서 형 약전을 이리 말합니다.

'幼而不羈, 長而桀'

/어려서부터 거침이 없었고, 자라서는 호걸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1785년 성호학파의 후계자인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이 서학에 빠진 것을 격렬히 나무란 적이 있었어요.

정약전은 이를 두고 "이 노인네가 참 가련하다(此丈可憐)" 했을 정도.

이때 안정복은 명실상부한 성호 이익의 후계자로서 이 말은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갔고 큰 충격을 줬다는.

그런 호걸 형이였기에 다산을 약전을 늘 의지하고 따랐겠죠.

그는 강진 유배 때는 자신의 글을 흑산도로 보내 형의 평가와 자문을 구했습니다.

 해배 2년 전 형이 '자산어보' 집필 이후 소흑산도(우이도)서 사망하자 동생은 상여를 보내 형을 운구하게 합니다.

그런데 왜 다산의 죄가 훨씬 클 법한데 약전을 힘든 흑산도로 보냈을까?

노론벽파들은 다산을 강진이라는 호구(虎口)로 집어 넣은 것.

강진 현감 이안묵이 수차례 사교 척결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다산에 개인적 악감정까지 지닌 인물이었기에.

정조는 그가 올린 다산 탄핵 상소들이 터무니 없다며 그를 좌천시키기도 했습니다.

 

다산을 두고 천주교 신자니 아니니 하는 해묵은 논란이 있어요.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秋曹란 '형별이 가을 서리와 같다'는 뜻으로 형조의 별칭.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용,권철신 등이

역관 김범우의 명동 집에 모여 집회를 갖다가 형조 관원에게 적발된 최초 천주교 사건.

다산은 지방관으로 좌천될 때마다 교인들을 유학으로 교화시키고,

사교와 손을 떼었음을 정조에게 그리고 노론벽파에 증명하려 했는데

이 사건도 정조의 아량으로 넘어갑니다.

2년 후에는 1787년 '정미반회사건'이 발생하네요.

정미년 1787년 반촌(泮村,성균관 인근)에서 이승훈과 정약용등이 천주교 서적을 공부한 것이 발각된 사건.

이처럼 천주교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다산은 늘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조는 번번히 지방관으로 내 보내는 방식으로 다산을 살려내니 벽파 노론에겐 눈엣가시.

정미반회를 폭로한 홍낙안이 박장설에게 이리 말할 정도.

“1천 인을 죽여도 아무개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매 한가지요.”

그럴수 밖에 없는 게 다산이 지방관으로 나가면 선정을 펼치니 정조는 기뻤고 백성들에겐 인기.

다산이 천주교 관계 전말을 고백한 '동부승지를 사양한 상소문'을 보면 처절하기 까지합니다.

결국 정조 붕어 직전,낙향하고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달고 마재서 칩거.

여유당이라는 당호야 말로 당시 그의 급박한 심사를 대변하네요.

노자(老子)의 도덕경엔 이리~~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한마디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다산의 다짐.

여기서 잠시 한눈좀 팔죠!!!

 

황사영(黃嗣永,1775~1801).

다산의 큰 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의 남편.

16세에 진사시에 22세 때 생원시에 급제한 천재.

정조가 16세 황사영을 불러 손목을 잡고서 말했어요.

“20세 되거든 다시 오거라.너를 중히 쓰겠다.”

이후 그는 정조 손길이 닿았던 손목에 명주천을 감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황사영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도 다산 집안 때문.

황사영 백서(帛書)...... 한국인이라면 본능적으로 거품을 물며 분노하죠.

가로 62㎝,세로 38㎝의 명주천에 쓴 1만3,384자의 깨알 글씨.

1791년 진산사건의 신해박해에서 1801년 신유박해까지

천주교회 탄압 사례와 해결책을 제시하고 주문모를 처형했음을 알리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명주천 편지를 북경 주교에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

그동안 황사영이 서양배 수백척과 수만명의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한 걸로 배웠네요.

그런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황사영 백서는 두개가 존재하니 하나는 원본(바티칸 소재)이요,또 하나는 편집본.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은 편집본에 실린 것.

아니, 편집본이 뭐란말인가요?

1801년 신유박해 때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처형 후 조정은 사실을 청에 숨기고 있었어요.

그러나 황사영 백서가 터지면서 더 이상 감출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조선에 유리하게 편집한 편집본을 황제에 보냅니다.

원본에는 큰 서양배 한척을 조선에 보내 압박해 달라는 것으로 나와요...큰 서양배 한척!

만약 거부되면 청나라 신부 처형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면 될거라 했고.

원본하고는 천양지차!

 


시점 11....마재 다산 생가&다산 유택.

 

생가 뒤쪽에 약용과 약현의 유택지가 있고.

다산은 1801년 시작해 18년 간 강진서 유배.

1818년 해배 후 고향 마재서 18년을 더 살다가 1836년에 죽죠.

58세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회갑을 맞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묘지명(墓誌銘)을 씁니다.

해배 후 마재서 흠흠신서와 아언각비를 완성한 후에는 주로 묘지명을 쓰며 유유자적.

유배 18년 vs 해배 후 18년.

다산에 있어 강진 18년 유배가 얼마나 중요한 학문적 성취였는지는 극명합니다.

다산의 저작물 90% 이상이 유배 기간에.

제주도 9년 추사 김정희 & 강진 18년 다산 정약용.

이렇게 둘은 유배문학의 위대함을 증거.

 

다산은 18년 전 억울하게 죽어간 권철신,이가환,이기양,오석충의 묘지명을 짓기 시작합니다.

사헌부 계사나 국청 기록을 통한 일방적인 평가가 아닌,

자신의 기록으로 먼 훗날 새로운 평가에 보탬을 삼으려는 것.

그러나 문제의 약종,이승훈 묘지명은 쓰지 않았네요.

숙부,약현,약전에 이어 약전의 아들 학초(다산이 학문적 후계자로 삼으려 함),

다산의 막내 농아,자신을 길러준 서모김씨,학연의 부인까지.

이렇게 큰형수에 며느리 묘지명도...총 32개.

 

자신의 묘지명도 썼으니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묘지명(墓誌銘)이란 誌의 산문과 銘의 운문으로 구성.

자신의 삶을 편년으로 정리하고는 말미에는 시(詩) 한 수로 뜬구름같은 인생을 축약하죠.

이때 다산은 묘지명을 둘을 써요....집중본(集中本)과 광중본(壙中本).

집중본은 자신의 문집(文集)에 실리고,광중본은 말 그대로 무덤 속에 넣는 거라 축약본.

다산 12년의 공직 생활 또한 파란만장.무려 6번의 유배를 갔네요.

(유배란 게 며칠을 상징적으로 보낸 후 1주일만에 돌아오기도)

그러나 해배 후에도 여전히 정적 노론벽파의 칼날이 겨누어져 있었어요.

다시 단죄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틈틈히 올라오고 있었으니.

그 상황서 다산은 묘지명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변론하고 방어하는 자서전을 써야했던 것.

묘지명은 일반적으로 지인의 유명인이 쓰는 게 일반적.

그러다 보니 내용은 없고 찬양 일변조로 고인의 실제적 삶하곤 동떨어진다는.

후대가 읽어도 그 어떤 감동도 없고.

반작용으로 조선 후기엔 스스로 묘지명을 쓰는 유행이 일고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자찬 묘지명을 남긴이가 퇴계 이황,유척기,표암 강세왕,박세당 등등.

자신의 평생을 스스로 정리하는 마당에 어찌 심사가 특별하지 않겠어요.

해배 후에도 호구(虎口) 앞의 삶이였으니 다산의 자찬 묘지명은 집안에서도 쉬쉬한 금서!

서서히 다산의 방대한 저술이 추사 김정희,홍현주,자하 신위 등등 식자층에 알려집니다.

1883년 고종은 다산의 글을 필사해 오라고 명하죠.

어람용(御覽用) '어유당 전서(與猶堂全書)'가 이렇게 탄생합니다.

이는 내각(內閣,규장각의 별칭)에 보관하도록 했는데 소실.

어람용이니 당연 정치적으로 미묘한 자찬묘지명은 빠졌겠죠.

천주교 관련 순교자인 이가환,권철신 묘지명도.

최초의 활자본은 1934년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로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발행.

편자는 외현손 김성진(金誠鎭), 교열은 정인보(鄭寅普)와 안재홍(安在鴻).

이게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여유당전서'의 시초가 됩니다.

 

시점 12...예빈산에서 두물머리,용문산&양평

 

푸른 물길은 북한강,황토 물길은 남한강.

우측 멀리 양평.멀리 용문산이 드높고.


시점 13....운길산 수종사에서 바라본 두물머리(2009년 사진)

 

앞에서 부터 중앙선 철교,구 철교(현 자전거 도로),양수대교,신양수대교.

중앙선 철교 우측이 운길산역,강 건너가 양수역.

양수역~구철교~능내역(다산유적지)~팔당댐~팔당역 까지 12키로.

단언컨데 서울 근교 최고 걷기 좋은 곳!

특히 철교로 위로 북한강을 건너는 기분이 특별하고.

앞이 북한강,뒤쪽 남한강,사이가 두물머리.

우측 멀리 용인시,광주시 쪽에서 경안천이 흘러나오고.

호수 중앙의 섬이 족자섬.족자섬 우측이 마재.

마재 건너 편이 남종면 분원리,분원리 뒷산 너머가 퇴촌사거리.

좌측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양자산,양자산 우측 봉우리가 천진암의 앵자봉

 

다산과 수종사는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였으니~~~.

수종사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14살에 '수종사에서 노닐며'(游水鐘寺) 라는 시를,

 ‘봄날 수종사에 노닐며'(春日游水鐘寺),'수종사에서 잠을 자며'(宿水鐘寺),

또 언젠가는 동네 아이들과 운길산 정상을 오르고는 ‘운길산에 올라'(上雲吉山)’라는 시를.

22살 진사시 합격 후(약전도 동시에)에는 학문 도반들과 한양서 마재까지 배타고 올라옵니다.

행열 앞엔 북,장구,저,피리,깡깡이를 불었으니 금의환향한 것.

그리고 3일 후 동네 사람도 함께한 수종사 잔치를 열죠.

 

수종사(水鐘寺)

운길산 8부 능선의 자리매김이 환상.

보름달이 용문산 정상서 떠올라 두물머리 상공에 이르면 강 위에선 은빛 찬가가.

1458년 금강산을 거쳐 평창 상원사를 출발한 세조 대가(大駕)가

양수리 일대에서 일박하는 데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답니다.

세조는 명했고,찾고 보니 암굴 속에 18 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는.

바위 틈에서 떨어지는 석간수가 종소리처럼 들렸던 것.

이에 절을 중창하니 수종사라.

다산은 해배 후에도 수종사를 들러 차를 마시곤.

사실 다산은 유배기를 제외하고는 늘 수종사와 함께했네요.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에서  스승인 다산,그리고 40년 동년배 추사를 보기 위해

한양을 오곤했는데 이때 수종사를 숙소로 삼곤했다는.

1830년에는 다산,초의,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학유 그리고 홍만주,

자하 신위(추사 제자)등이 수종사에 모여 다회를 열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현재 수종사 삼정헌 찻집이 유명.

삼정헌에선 누구나 무료로 차를 다려 마실수 있는데

이때 삼정헌 창틀 안에 잡힌 아랫 두물머리 풍광은 엽서의 한 장면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하나!!

초의는 다산의 제자요,추사의 동년배 절친.

그리고 초의는 연하의 다산 두아들과 친구처럼 지냈고.

그런데도 다산과 추사의 만남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네요.

다산,다산 두아들,초의,김의경(추사 동생),홍현주(추사 친구),신위가

수종사서 다회,시회를 열였음에도 추사와 다산 만남의 흔적이 없다는 게 의아하다는.

여기에서 추사까지 낀 수종사 다회였다면 '역사적인 그림'으로 나왔겠죠. 

연암 박지원vs다산 정약용vs추사 김정희.....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에 사상가들.

셋은 각각 25살 차이로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고.

다산의 저서에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언급된 적은 있었죠.

연암과 추사는 당대에 이름을 날렸으나

다산은 현대에 이르러 부각된 인물이었으니 당시 실제 만남이나 기록이 미비할수 밖에.

또 셋 중 다산이 시대상으로 중간이라 연결점이 쉽지 않았을 터.

여기서 역사의 현재성같은 걸 실감합니다.

다산에서 보듯 역사는 현재 관점서 쉼 없이 재해석 된다는.

지금의 다산이지 그때는 다산이 아녔다는 얘기!

 

다산은 죽음도 그답게 완벽으로 맞이합니다.

자신의 묘지명을 쓴 후 유명첩(幽冥帖)을 써요.

유명첩은 자신의 장례 관련 유언장같은 것.

강진 유배 첫해,가장 먼저 집필한 게 상례(喪禮)에 대한 정리였듯 늘 마지막을 대비하는.

유명첩에 자신의 장례 절차 등을 꼼꼼히 정리합니다.

"죽으면 지관을 부르지 말고 뒷동산에 자좌(子坐)하라"

여유당 뒷동산에 정북쪽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눕게 하라는 얘기.

"말라 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아무리 산하의 좋은 형세를 차지한들

어떻게 자기의 후손을 잘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는 풍수집의(風水集議)도 썼어요.

음택풍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산송의 폐해를 바로잡아

합리적인 유교적 장례안을 제시하려 한 것.

 

그리고 결혼 60주년인 회혼식(回婚式)!

며칠 전부터 족친들이 회혼을 기념하기 위해 마재로 모여들었어요.

그러나 회혼일 아침 7시 눈을 감고말았다는.

이렇게 회혼식 하객들은 졸지에 조문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채서 100여미터 거리 뒷산에 묻히고(가까이엔 맏형 약현이)

둘째 형 약전은 충주 선산,셋째 형 약종은 맞은편 멀리 천진암에.

묘택 앞에 서면 그가 사랑했던 열수(한강)는 팔당댐으로 더욱 드넓고,

강 너머로 분원리,그리고 멀리 천진암의 앵자봉이 들어옵니다.



가운데 족자섬 보이시죠?

족자섬 왼쪽 끝이 두물머리.

그 두물머리 즈음에서 겸재는 진경산수 한점을 남겼어요.

 

시점 14.......겸재의 두물머리에서 마재,예봉산,운길산.

겸재(謙齋) 정선,독백탄(獨栢灘) 1740~1741년, 20.2 x 31.3㎝

 

바로 앞 중앙이 족자섬...뒤쪽 길게 나온 산록 위 마을이 다산의 고향 마재.

마을 뒤쪽 좌는 예봉산,우는 운길산..운길산 중턱에 검은 숲이 수종사.

표현 대로 족자섬 앞은 물살이 거세여서 독백탄(獨栢灘)이라 불렀습니다.

직역하면 홀로 측백나무가 서 있는 여울.

탄(灘)은 여울이라는 뜻으로,여울이란 강 하상이 좁고 높아지면서 물살이 드센 곳을 말해요.

그림에서 나룻배 주변을 보실레요?

물살이 표현되어 있고 바위 위로는 사공들이 올라가 있네요.

둘은 배에 밧줄을 매달고 배를 뭍에서 끌어 이동시키는 장면.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남한강,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던 배들은 여울을 만나면 저리 뭍에서 끌어올리는 것이 다반사.

비숍이 영춘에 내려 나귀 타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도

그곳 여울이 너무 쌔 영월의 동강이나 서강까지 오를수 없어서.

 

이곳 여울이 악명 높았나 봅니다.

겸재의 스승 김창협의 아우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1688년에 뱃길을 이용해

두물머리 거쳐 단양을 여행하고는 ‘단구일기(丹丘日記)’를 남겼어요.

이때 삼연은 족자도 부근의 여울에 대해 언급합니다.

/족백탄에 이르니 여울이 심히 사나워 배 저어 나가기에 불리하다.

그래서 옆의 배가 와서 부딪쳐 서로 외치며 밀어낸다./

삼연 김창흡이요? 설악산 백담사 위쪽에 있는 영시암 주인, 그 김창흡을 말합니다.


팔당댐 아래 배알미동으로 하산합니다.

검단산 자랑거리 중 하나가 산림이 짙게 우거져 있다는 것.

정상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나무 그늘 속을 걸어요.

검단이란 단어엔 검다,신성하다(단군왕검)는 뜻도 있는데 그래선가?

 

세상에나!

다른 수종이 신갈나무 몸체를 뚫고 나왔네요.


뒷면을 보니...착시!


양탄자를 깔았어요.

수년간 낙엽들이 층층이 쌓여 부엽토를 만들고 있고.

그 위를 걷고 있는 발길은 하산길이라 중력을 많이 받는 데도 무척 편합니다.

 

저 위에서 내려왔어요.

배알미동(拜謁尾洞).

 

다 내려왔어요.가로수 고목들이 동네 연륜을 말해주고.

일대의 땅밑은 팔당 취수장에서 정수장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가득합니다.

2500만 수도권 시민들이 마시는 수돗물은 이곳 팔당댐 취수장과 잠실보 위쪽 취수장에서 취수된 것.

취수된 물은 정수장으로 보내져 정수된 후 각 가정으로 보내집니다.

 

拜謁尾洞

 

마을 이름이 특이한가요?

 한양 떠나 이곳에 이르면 고개를 돌려 임금께 하직인사를 한다해서 생긴 지명 이름.

조선 6대 왕 단종(1441~1455).

그 유배길은 동대문을 나와 한양대 옆 중량천의 살곶이다리~화양리~

광나루(광진구)에서 배를 탄 후 팔당 지나 여주 이포나루서 하선.

그리고 원주 지나 영월 청룡포에 위리안치.

그 단종이 탄 배가 이곳을 지날 때 백성들이 울며 배알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배알미동은 팔당댐을 중심으로 윗,아랫 배알미동이 있어요.

윗배알미동엔 가장 큰 취수장이 있고.

신유박해 후 정약종 시신은 마재로 못가고 윗배알미동에 뭍혔다는.

그리고 언젠가 안산의 선산으로 이장 된 후 근래에 이르러 천진암 성지에서 안식.


청둥오리는 떠나고 가마우지만.

먹이를 통째로 먹기 때문에 혀가 필요없어 코가 퇴화되었다네요.

 

팔당댐 아래는 고니들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겨울철이면 수백마리의 고니들이 수면을 가르는 군무가 장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저 댐을 건너야 되거든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도 부를까요?   

그러나 팔당댐은 주말만 승용차 한해 통행 허용.

사람이 걸어서는 건널 수없다는 얘기.어쩔수 없네요.

댐 초입에 서서 지나는 차를 향해 목례 후 손들고 엄지 척!

두번째 시도만에 성공.



건너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넘어왔어요.




강 건너는 검단산.

저 맞은편 길 따라 가도 되지만 굳이 넘어 온 이유가 있었으니~~

이 길이 수도권 최고 자전거 길이요,트레킹 힐링 코스거든요.

정말로 걷기 좋은 길!

팔당역~팔당댐~능내역(마재)~운길산역~구양수 철교~두물머리 까지 12키로.


잠시 저분들 따라 터널을 역행합니다.

봉안터널

물론 예전 중앙선이 지나던 터널.

터널을 중심으로 해 위쪽이 팔당댐 상류.


터널 지나 팔당호.

길따라 5분 걸으면 좌측으로 봉주르!

터널 지나서 부터는 봉안마을이고 왼쪽으로 김용기의 가나안 농군학교가 있습니다.

봉안엔 빼놀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 있으니,

조선 후기 농서(農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저자 서유구(1764-1845)가 봉안 마을에 살았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수시로 서유구 집을 찾았고.


이제 발길을 돌립니다.

좌 검단산,우 예빈산&예봉산.

일대가 배알미동,예봉산이란 지명이 붙은 이유가 보이시요?

팔당댐 너머로 임금이 사는 북한산(삼각산)이 보이잖아요.

 

터널을 빠져 나와 팔당역으로.

팔당댐서 역까지는 3키로.

원래는 중앙선 철길이였으나 지금은 자전거와 트레킹 코스로.

예봉산~예빈산 땅밑으로 새로운 중앙선과 6번 국도가 생겼습니다.

 

검단산과 예봉산이 만들어낸 협곡 사이로 한강은 흐르고.

예전엔 이 지점을 두미협,두미강이라 불렀네요.다산은 두미강이라.

사람들은 배를 타거나 이 두미협 따라 난 산 길을 걸었고.

그리고 예봉산 산자락을 따라 철도와 신작로가 생겼네요.

다시 한세대 못미쳐 산 지하로 자동차길과 기찻길이 뚫렸고.

아래로 보이는 예전 국도는 드라이브 길로, 옛 중앙선 철도는 자전거도로로 변신.

  조선 후기 지리학자 신경준이 1770년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엔 

당시 조선길은 삼남로·의주로·영남로·강화로·경흥로·평해로..이리 여섯.

이 길이 바로 동해(東海)로 나가는 관동대로.

평해로(平海路) 라고도 하는데 울진 옛지명이 평해.

그러니까 한양에서 설악산,강릉,삼척,울진 등 동해로 오가는 이들은 이 길을 주로 이용.

허난설헌,허균,심사임당 모자도 강릉을 오갈 때 분명 이길을 걸었을 겁니다.

 

한세대 전을 산 사람들이나,지금 중년들에겐 추억의 길이기도.

설악산이나 속초 동해로 휴가 떠나는 이들은 왕복 2차로 저 길을 이용했으니까요.

서울~두물머리~양평~홍천~인제~속초.

지금은 6번 국도는 4차선의 새 길.

나아가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까지 생겼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

백투더퓨쳐!

중앙선 열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납니다.

그 땐 왜 몰랐을까나.

이 아름다운 길...

강 건너 검단산.

검단산과 예봉산 사이 긴 협곡이라 잔도(棧道)를 설치했어요.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고.

 

이쪽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건너는 하남시 배알미동.

 

일대는 두미강(도미강)으로 불렸어요.

보이는 건너 검단산 자락에 도미나루가 있어서죠.

두미,도미라구요?

네,한성 백제 시절 그 '도미설화'의 유래가 깃든 곳입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동아시아 역사서의 전범.

사기의 열전(列傳)은 신하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전기(傳記).

그 사마천의 사기를 전범으로 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그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인물은 52명,이중 고구려 8명,백제 3명,신라 41명.

신라 중심 사서(김부식이 경주 김씨)라 신라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네요.

이 중 백제는 흑치상지,계백,도미.

그런데 이상하죠?

흑치상지는 백제부흥운동으로,계백은 일당백 충의의 표상지만

당시는 여성 정절의 삼강오륜 시대도 아닌데 도미가 포함된 점이 의문.

따지면 끝이 없겠고,여하튼 저간의 스토리는 이러해요.

 

/도미는 백제 개루왕 때 사람.

도미의 부인은 백제 절세미인으로 이름 나 개루왕이 신하를 보내 유혹했어요.

도미 부인은 하녀를 대신 보내 왕을 속이고 잠자리 시중을 들게했고.

나중에 개루왕이 이를 알고나서 보복으로 남편 도미의 눈을 빼어 강물에 던졌다는.

그리고 도미 부인을 궁궐로 잡아들입니다.

부인은 몸을 깨끗이 하고오겠다고 속여 궁궐을 빠져나와 도망쳤고.

그러나 앞은 강물이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는 군사들이 쫓아오고...

극적으로 부인 앞으로 팔당 위쪽서 빈 배가 내려오고 있었네요.

급히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니 풀을 캐어먹던 남편이 있었고. 

그리고 부부는 함께 고구려 땅 산산(蒜山)으로 가 살았습니다/

 

그럼 도미부인 앞으로 배가 나타난 곳은 어디며, 또 하선한 곳은 어디란 말인가?

배가 나타난 곳은 강 건너 저 검단산 자락이요,

흘러 도착한 곳은 파주 오두산 전망대 일대라는 얘기가 다수설.

도미부인을 실은 배는 저 한강 따라 내려가다,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파주 인근에서 하선한 거죠.

그리고 육로로 고구려 땅 산산(蒜山)으로 들어갔을 터.

Only Our Rivers Run Free

http://youtu.be/1weWhur_ZKE

여하튼 무지 좋은 힐링 길. 가족이든,친구든,솔로든 가세요!

1.팔당역 내려 예봉산 입구 초계국수 드시고 팔당댐까지 왕복하시던지(왕복 8키로)

2.봉안터널 지나 봉주르~능내역~운길산역 까지(다산 유적지 마재로 빠져도)

3.나아가 옛 중앙선 위를 걸어 양수역 까지(12키로).

4.더 나아가 두물머리까지 가셔도.

5. 그냥 운길산역 내려 북한강 자전거 길을 걸어 건너셔도.

6.집으로는 양수역에서.

귀가는 팔당역에서

검단산이 보이고.

&&...

예전 일대를 핸드폰에 담았던 것도 포함.

스토리 전개를 위해 가져온 사진도 몇장 있고.



1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Juliana7
    '21.6.14 6:56 PM

    꼼짝 안하고 구경 잘했네요
    정말 자세한 설명과 사진 감사합니다.

  • wrtour
    '21.6.25 11:39 AM

    네 감사합니다.
    이번 여름엔 홍단이의 양수리 세미원 진출도 기대하구요!

  • 2. 지음
    '21.6.15 2:46 PM

    O.M.G!!
    이 많은 이야기 보타리를 풀어 쓰려면 얼마나 많은 열과 성이 들어갈까요^ ^

    감사히 사진과 곁들여 찬찬히 잘 보았습니다.
    역사는 쓰여진 그 시대의 요구나 쓴사람의 의도를 헤아리고 보여지지만
    자연은 그냥 그자체 그대로 나타내어지는게 다르구나 싶습니다.

    한국산수화는 과하지 않아서 오래 들여다 보아도 질리지가 않네요.
    특히 겸재의 산수화는 호탕함에 탄복해서 자꾸 보게 됩니다.
    비교가 확~ 되어서 겸재 정선 미술관이란데도 가보고 싶어지네요......

    무엇을 안다는 것, 누구를 안다는 것은 늘 진행형이어야 하는 이유인 듯 합니다.

  • wrtour
    '21.6.25 12:08 PM

    놀라하시니 기분이 좋군요ㅎ
    정선 미술관이 있었군요.겸재는 84세 장수했는데 60세 이후가 절정.65세 때 양천현감에 부임하고 여기서 한강 일대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 이때 연으로 정선 미술관이 강서구(당시 양천현) 궁산 아래에 있고.대표작 계상정거도,인왕제색도,금강전도 이중 계상정거도는 이황의 도산서당이 배경.천원짜리 지폐 가지고 계세요? 퇴계 이황 초상이 나오는데 뒷면이 바로 계상정거도네요.
    '삼원삼재'라고 하죠.조선시대 화가는 6명으로 압축 가능.혜원 신윤복,단원 김홍도,오원 장승업 이리 삼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다산의 증조 외할아버지) 이리 삼재.
    이것도 뭔가를 알아가는 건가요?그래서 즐거우시길.

  • 3. 고독은 나의 힘
    '21.6.19 11:26 AM

    저도 꼼짝 않고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그동안 올려주신 글들도 좋았지만 오늘글은 진짜 집대성 수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wrtour
    '21.6.25 12:19 PM

    에너지를 팍팍 주시는군요.
    다시 자판 두두려야 하는 이유같은 거.

  • 4. 예쁜솔
    '21.6.22 1:53 AM

    제가 잘 가는 지명들이 나와서 많이 반갑네요.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잊을 수가 없습니다.

  • wrtour
    '21.6.25 12:24 PM

    예쁜솔님 취향이 그려져요
    팔당 일대 두루 밟으셨을듯.

  • 5. 씨페루스
    '21.6.28 2:11 PM

    또한번 wrtour 님 글 읽고 탄복했습니다.
    다산 일가의 천주학 경도가 알고있던 수준보다 훨씬 더 깊은것에 놀랐고요.
    회혼식 하객이 조문객이 되었다니 다산은 죽음까지도 정말 극적이네요.
    독백탄 그림에서 바위 위의 사공들이 밧줄로 배를 끌어당기고 있다니
    정선의 그림은 우리나라의 산천과 풍속을 기록한 역사책이구나 싶고
    못보고 지나칠뻔한 사공들을 눈여겨 보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wrtour
    '21.6.29 2:08 AM

    안녕하세요^^이런 칭찬 진짜 과분하답니다.
    요약 까지 하신거 보니 진짜 읽으셨네요.ㅎ힘드셨을 터 시원한 빙수라도 전해드리고 싶은 심정이랍니다.82를 쉬 벗어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 6. 산이좋아^^
    '21.7.8 9:24 AM

    오로지 땅만보고 아무생각없는 제겐
    꿈꾸지조차 못할 경지입니다.
    사진도 멋진 글도 그리고
    우리고장 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한 다산의 흔적도.
    늘 건강하시구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이야기가 깃든 산을 느끼며
    걸어보고 싶어집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잘 계셔서 건강하셔서 좋은이야기 많이 많이 볼수 있게 해주셔요

  • wrtour
    '21.7.10 2:52 PM

    산이좋아님도 건강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 7. 우유만땅
    '21.8.1 10:16 AM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시고 같이 역사가 있는 길을 걷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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