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동 시화마을에 그려진 할머니께서 쓰신 시 가운데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어
혹시 수정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시화마을을 찾았습니다.
영화 1987에서 연희가 엄마, 삼촌과 함께 생활했던 수퍼는 지난 번 찾았을 대와 다르게
영화촬여지임을 알리는 현수막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연히네 수퍼는 폐업한지 모래여서 영화를 촬용할 때만 잠시 빌려서 촬영을 한 곳으로 지금도 영업을 하지 않는 곳입니다.
내가 연희네 수퍼를 찾았을 때 느낀 것은
영화에서 오는 진함 느낌과 감동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메마르고 삭막함 뿐이었습니다.
사진은 목포해안로에서 연희네 수퍼를 드러가는 입구 맞은 편 수협공판장 수산물상가들
연희네 수퍼 드러가는 입구
연희네 수퍼 들어가는 골목도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연희네 수퍼를 찾았을 때 닫힌 수퍼를 보고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라는 것 말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수퍼를 관광차원에서 목포시에서 운영하든 아니면 청년창업이나 주민자치가게로 운영을 하든
연희와 가족들 세대의 사람들이 운영을 하면서 수퍼를 찾아온 사람들과 공감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또 다른 살아 있는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시화마을에 게시된 80대 할머니께서 쓰신 많은 글 가운데하나인 "가난"이라는 글에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오는데
보릿고개는 6,25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농토와 이어진 극심한 가뭄으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던 1960년대 초반에 있었던 생활상으로
그 때 그것도 여자가 하루 일당으로 35만은을 받았다는 것도 말이 도지 않지만
그 때 35만은 그동안 임금상승율로 봐서 적게 따져도 17억원이 넘는 돈인데
그 엄청난 돈으로도 가난해서 굶기를 박박듯 했다는 말은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1961. 5.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으 장악한 박정희가 1962. 6. 9일 자정을 기해 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해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10 : 1로 명목절하하면서
당시 남자 300환, 여자 200환 하던 품삯이 남자 30원, 여자 20원으로 바뀌었던 시기로
여자가 하루 일당으로 35만원을 받앗다는 것은 얼토당토 핞은 오류입니다.
그 엄창난 돈은 하루 일당으로 받아서 굶기를 밥 먹득 하고
된장, 고추장, 김치 한번 제대로 담아 먹지 못했다는 것은 더더욱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서산동 곳곳에 내걸린 영화촬영지 현수막을 보고 찾아온 관광객들이 잠겨진 연히네 수퍼를 보고
실망해거나 허탈한 마음으로 떠나지 않을지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