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라는 단편집에
첫 번째로 나오는
그 짧은 단편인 봄밤.
페이지 수가 서른한 페이지밖에 안 되는
그 소설 하나를 읽고,
나는 더 이상의 책을 읽지 못하고 덮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권여선의 글은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우리 반 전교 일등의
노트필기 같다.
딱 필요한 만큼만
요약하고, 정리하고, 차트를 그려 놓은..
그런 메마르고 정 없는
그런 싸가지 노트 같아서
빌려가서 벼락치기하는 반 친구들이
그 사무적인,
그 뼈대만 남긴,
그 무심함에 투덜거리지만
핵심은 다 들어있음을 감탄하고 만다.
실패를..
연민을..
따스함을..
이리 표현할 수도 있다.
어린 아들을 뺏기고 술주정뱅이가 된 전직교사 영경과
그 영경의 표정에서 여자 노숙인을 발견한
진짜 노숙인 신용불량자 수환이가
후다닥 해버리는 친구의 재혼식에서 만나고,
지난 세월이 챙겨준 류머티즘과 알코올 중독에
둘이서 다정하게 요양원에서 살아간다.
모..뭐냐..?
리빙 라스베가스에 니콜라스 케이지냐..?
새로울 거 없는 서사에
딱히 더 새로울 거 없는
모범생다운 분모와 분자로 표현되는 인간군상학까지..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익숙하지만 건조하고
건조하지만 날카로운 통찰이
억센 뼈다귀처럼
목에 터억 걸려,
읽는 사람 마음고생시킨다.
그 마음고생 끝에
심쿵이 있다.
그 심약한 두 주인공이
서로 죽을힘을 다해
서로를 보낼 때까지 버텼다는 거에..
자신에게 돌아 올 행운의 몫이
서로라는 거를 알아보는 지점에 말이다.
그렇다.
무언가,
누군가,
죽을힘을 다해 버틸 대상이 있다는 거
삶의 어느 고비에서 만나든
행운의 몫이 맞다.
그래서,
권여선은 전교 일등이고,
전교 일등의 노트나 소설은
다정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지만..
짧고 맞는 말만 적어 놓은
빠싹 마른 뼈다귀가 무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