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계곡에는 진달래까지피어 내 급한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든다.
생강나무꽃은 개나리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아기자기하다. 개나리는 네 꽃잎이 삐죽이 나와 있지만 생강나무꽃은 지 잘난 멋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이 서로 겹쳐 그저 북실 북실한 것이 쥐눈이콩만하다.
생강나무꽃과 진달래가 피면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맛에 산골에 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쯤되면 퇴비냄새와 오줌삭히는 냄새쯤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중국 장가계의 무릉도원보다 못할 게 없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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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로 이사를 올 때는 귀농을 할 수있는껏 악악거리며 반대하던 식구만 먼저 산골로 들어왔다.
귀농의 주동자는 버젓이 사표수리될 때까지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집을 새로 지을 시간은 커녕 오두막을 수리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그대로' 들어와 앉았다.
물론 15평의 오두막에 짐은 절반도 먹히질 않았고 임시방편으로 하우스를 지어 장농이며 쇼파며 온갖 세간살이를 들여 놓았다.
그러다 귀농 전 춘천 땅에 사두었던 컨테이너를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그곳에 장농이며 쇼파며 서랍장, 옷장 등을 넣었다.
아이들 봄옷을 꺼낼 요량으로 컨테이너에서 장농정리를 하는데 서랍 밑 바닥에 서류봉투가 보인다.
늘 산골은 열어두고 살다보니 당연히 중요한 것이 아니리라 하고 밀쳤다가 별게 아니면 태워버리려고 끄집어냈다.
거기에는 부도난 어음 2장과 공증서류가 들어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니 손끝이 자꾸 저려온다.
컨테이너에 주저 앉아 공증서류를 한 줄 한 줄 읽으려니 얼굴이 달아오른다.
귀농 훨씬 전, IMF 전의 일이다.
이 이야기는 산골남주인이 보증의 무서움도 모르고 누가 보증서달랄 사람없나 하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차별로 보증을 서주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나 역시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고 혹여 서주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판단할 일이기에 한두 건 말했을 때는 알아서 하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주렁 주렁 수세미열리듯 그리 화를 키우고 있는줄은 몰랐다.
자신도 몇 건의 보증을 서준지를 일이 터지고서야 알 정도로...
그리고 IMF에 들어서니 석류알터지듯 화가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자가 한증막 온도계 올라가듯 하니 우선 내가 서둘러 남의 빚을 갚아야 했다.
빚진 사람은 여유로운데 보증서준 사람만 후끈 달아있는 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누구의 탓'을 말할 겨를이 없었다.
하나 하나 남의 보증빚을 꺼나가고 나역시 그들처럼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누가 자꾸 맷돌을 돌리는 것처럼 어지롭고, 다리가 휘청거렸고, 걸음을 뗄 때마다 무릎이 꺾여 거리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하나 해결하면 옆구리에서 또 터지고, 며칠을 수습하고 나면 또 터지고.....
'우리 남편이 이리도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구나'하고 감탄을 해야 했다.
여러 날이 지나자 희한한 현상이 생겼다.
하늘이 그렇게 갑갑할 수가 없었다.
하늘이 투명해야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시원하데 하늘이 파랗다 보니 파란 천이 커다랗게 둘러 쳐 있는 것 같아 그것이 답답해 머리를 흔들어야 했다.
요즘도 가끔 성당갈 때 불영계곡을 올려다보면 그 증세가 나타나 땅만 보고 간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남의 빚은 줄어갔고 내 빚은 늘어만 갔다.
그래도 은행에서 전화가 안오니 그리 편할 수 없었다.
우리 둘은 어느 얘기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사람볼 줄 모르느냐,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럴 수 있는냐는 등의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남편도 성인이고 가장으로서 판단한 일이니 그것은 그 판단에 맡기고 싶었다.
다만 이 한 마디는 분명히 했다.
"선우아빠, 보증이란 혹여 상대가 그 돈을 떼먹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10억이라도 서 주어도 좋다. 그러나 그 판단이 서지 않으면 서는 게 아니야.
결국 돈잃고, 원수되니까.
당신 내가 말한 김인성이라는 사람 알지?
난 그 사람이라면 천만원 정도는 당신과 상의 없이도 보증서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야. 보증은 그런 사람에게 서주는 거야."
남편은 내 손을 잡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당사자와 합의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하면 열 마디가 비수가 되어 양궁선수처럼 내 가슴을 정확하게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이 안에 있으면서도 남편인 것을 알고 문을 열어 주기는 커녕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분을 삭혀야 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아프간의 작가 아티크 라히미의 '흙과 재'라는 책내용이 생각난다.
"때때로 고통은 녹아내려 우리의 눈으로 흘러나오기도 한다.그런가 하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말이 되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기도 한다. 아니면 우리 안에서 폭탄으로 변해 어느 날 갑작스런 폭발로 우리를 파멸시키기도 하고..."
아마 그 때의 감정은 후자의 폭탄감정이었을 것이다.
보증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어음도 등장시켰다.
합하면 1억이 되는 어음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될줄 알면서도 받았다.
크게 기대는 안했지만 그래도 실컷 보증 서준 값으로 받은 것이니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은행의 부도처리 도장만 벌겋게 찍혀 공증서류와 함께 서랍 밑바닥에서 존재를 숨기고 있었던 것.
남편도 돈보다 그들의 태도 때문에 괴로움을 삭히기 힘들다고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이들 건강하고, 당신 직장 튼튼하니 이것으로 됐다고 내가 더 위로를 해야 했다.
사실이 그랬다.
'돈은 이리 돌아가는구나'하고 느낀 이상 그 슬럼프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급선무니까.
그러고 나니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는 단순한 논리를 이제는 실천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자연이라면 발광을 하며 식구들데리고 돌아다녔던 남편이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자연으로, 자연으로 다니는 일에 더 기를 썼다.
남편은
"다 소용없어. 가족데리고 자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소중해."
라는 말만 정신병자처럼 되풀이 하며 자연에서 아이들과 마누라 데리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으러 다녔다.
그 때 즐거웠다는 얘기를 아이들은 몇 번씩 오두막에서도 말할 정도였으니까.
보증 일이 삶의 가치를 인장새기듯 가슴에 더 선명하게 새겨주었던 것이다.
춘천에 늙으면 가서 살려고 사둔 땅을 처분하려 했지만 IMF라 매매도 힘들었고 값도 없어 포기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전 직장 그만 둘 때 탔던 퇴직금, 적금, 아이들 교육보험, 각종 암보험, 결혼 반지, 결혼 팔찌, 목걸이 등 돈되는 것은 다 해약하고 처분해도 택도 없었다.
나머지는 언니들이 둘러주어 간신히 물터짐은 막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귀농결정을 하고 춘천 땅 처분하여 악몽의 남의 빚잔치를 했고, 1원도 안남기고 다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랑 남은 것은 공증서류와 그들에게 받은 어음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증은 그 사람이 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금도 얼마든지 서준다고 했다.
남편은 내 성격을 아는지 고개만 끄덕인다.
몇 몇 지인이 귀농 후 물었다.
"그 보증의 상처 때문에 귀농했느냐"고
대답은 천만에다.
보증문제가 마음 착한 남편에게는 최악의 쓰라림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젊었고 나의 아이들이 건강히 잘 자라주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 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긴 터널을 빠져 나온 후에는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하는지를 체득할 수 있었다.
그나마 춘천에 땅이라도 있었으니 아파트 안날리고 해결할 수 있었다 싶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모든 일은 그리 생각하기 나름이다.
왜 이 서류를 버리지 못하고 산골까지 끌고 와서는 서랍속에 잘 감추어 두었을까?
죽어도 받을거라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얼마나 울며 가슴을 쓸어내렸던가.
하늘에 왜 파란 천이 둘러쳐져 가슴 답답하게 하느냐고 휴휴거리며 이불을 뒤집어 썼었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이 서류를 아궁이에 집어던질 용기가 있는가?
용기없고, 욕심많은 나는 그 서류와 부도어음을 소중하게 싸서 더 깊숙이 찔러넣었다.
기회가 되면 꼭 받을 거라는 앙심은 추호도 없다. 그래도, 그래도........
남편은 세무서다니는 친구가 산골을 찾았을 때 한 번 꺼내 어음을 보여주었었다고 내게 고백했다.
마음착한 그이에게도 상처는 아물지 않은 상태로 진물을 흘리며 곪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가 바람처럼 지나간 일.
새로운 바람이 산골을 차지하고 있으면 그 뿐.
한 번은 나도 물어야겠다. 초보농사꾼에게.
"보증문제 때문에 서울이 싫고, 사람이 싫어 산골로 왔느냐"고
그 말같지도 않은 말이라도 물어봐야 오늘 잠을 이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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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서 돌아와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하고는 몸뚱이를 벽에 껌붙이듯 붙여 두었다.
4시가 넘어 산골아이들이 왔다.
"엄마, 어디 계세요?"
언제나처럼 재빠른 주현이가 먼저 들어온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듯 머리를 빗는다.
"엄마, 무지 배고파요. 덕거리에서 놀다 왔어요."
산불난 산에 나무베는 등 고생을 하는 초보농사꾼에게 새참으로 주려던 국수를 그제서야 다시 뎁혀 주니 맛있다며 먹는 아이들.
상처는 받은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이다.
산골에 아이들이 있고, 남편이 있고, 더불어 자연이 나를 치유해주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은 없다.
다만 어서 저 서류를 빨리 내 손으로 태워버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빠 새참드리고 오겠다니 아들놈이 나선다.
"엄마, 그럴줄 알았으면 제 것도 아빠 것이랑 싸갈 걸 그랬어요. 아빠와 밖에서 먹으면 소풍온 기분이 들어요."
지애비 참바구니들고 나서는 아들놈의 어깨가 유난히 넓어보인다.
2002년 3월 28일
산골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