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줌인줌아웃

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월악산 & 충주호 제비봉

| 조회수 : 1,764 | 추천수 : 3
작성일 : 2020-11-25 02:13:48



만추,, 들머리는 월악산 동쪽 신륵사

정상 영봉 찍고 서쪽인 송계천이 흐르는 동창교로 하산.

총 9키로 4시간.

차량으로 30분 이동 후 충주호 장회나루 뒷산 제비봉 2차 산행,,,2시간 30분.

정상 영봉(1097m)이 빼꼼이 흰머리를


초입은 야자수 매트가 깔려 발이 편하고.


11월 둘째 주말

색바랜 낙옆들만 발 아래서 뒹구네요.



1시간 오르니 정상이 보이고


영봉.

작은 암릉으로 보이지만 높이만 150 미터, 둘레는 무려 4키로나 됩니다.

여기서 30분 더 올라야


발 아래 동쪽.

산행 들머리 신륵사가 보이네요.

멀리 뒷 산마루 연결~연결~연결이 백두대간 길.


지금부터 150 미터 수직 암릉 구간 시작.


아래 행정지명은 단양군 단성면

멀리 보이는 산마루가 제천시 금수산



동북 방향으로 제천 금수산이 보이네요

금수산과 제비봉 사이가 충주호 상류(단양).

오후 2시 하산 후에는 차로 이동해 제비봉에서 2차 산행 예정.



동쪽

산악 국가임을 절감하는 순간.

왼쪽 끝 멀리 소백산




  철재 데크를 타고 올라야



발 아래를 보니.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에겐 은근 걱정이 앞서는.

데크를 다 오른 후 10여분 더 올라야 정상


다 왔네요

1시간 40분 소요.


우측이 정상


휴일이지만 일찍 출발해선지 사람들이 많치는 않고.

곧 정상석 앞은 인증 사진 행렬이 이어질 터.


영봉(靈峯,1097m)


정상에 영봉(靈峯)이란 신성이 주어진 곳은 백두산 과 월악산이 유이(唯二).

암릉 높이만 150m,둘레가 4키로가 넘어 멀리서도 독보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망망대해 등대 같은.

1.인근 충주,제천,단양 주민들에겐 방향을 잡아주는 기준.

2.문경새재,하늘재를 넘어온 영남인들에겐 동북쪽 방향으로 

3.소백산 죽령을 넘어온 이에겐 서북쪽에서  중원의 랜드마크.

예로부터 충주 일대를 중원이라 했어요.

삼국 통일 후에는 충주는 중원경(中原京)으로 그 위치가 격상.

고구려는 남진 후 국원성(國原城)으로 삼았듯 고대의 충주와 지금의 충주는 천양지차!

 

月岳山?

아랫 고을 사람들에게 영봉에 걸친 보름달이 어떻게 보였을지를 상상해 보신다면...

이게 월악이라 부른 이유!


신기하게도 정상 바로 앞으로는 한단 낮은 높이로 마당바위가 넓게.

전망 즐기며 주린 배도 채우는 쉼터가 되고.


북쪽으로 충주호가 보이고.

앞 암릉이 중봉,,,이는 하봉~충주호로 이어져 가장 인기있는 산행 코스.

멀리 호수 좌측은 충주시,우측은 제천시

원래 저 충주호 일대는 청풍면이였어요.

1985년 댐이 생기면서 대부분이 수몰되어 사라졌고.

그러면 충주호일까? 청풍호일까?

원래는 청풍호가 맞는 것.

'청풍명월 충청북도' 라 하죠.

바로 남한강이 가로지르는 청풍현의 풍광이 빼어남에서 유래한 것.


서쪽 송계계곡


근래 들어 송계계곡도 삶의 터전으로 급변했네요

행정구역상으로 제천시 한수면

왼쪽(남)으로 계곡 따라 오르면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미륵대원 있는 그곳)


멀리 우측이 충주시,,좌측 멀리 청주시.

중앙이 증평군~괴산군~음성군 삼각편대.

가운데 멀리 M 봉우리가 괴산 군자산.


저 송계계곡도 역사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던 시기가 있었으니~~~~!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1천년이 넘게.

거의 1500년 동안 한반도 남쪽 영남과 중원을 남북으로 잇는 기간도로.

좌측(남)으로 계곡 따라  남행하면 덕주사~미륵대원이 나옵니다.

그리고 1,5키로를 더 지나 백두대간 길목인 하늘재(계립령)를 넘으면 문경시 관음리가.

이는 문경시~상주시로 이어지고.


영남과 중원(충북)을 갈라놓은 산맥이 백두대간 중 소백산맥 구간.

삼국의 역사는 백제,신라,고구려 간 이 소백산맥 상 중원의 길목 쟁탈의 역사이기도.

그러면 삼국시대 이후 고려까지, 

영남서 충주 일대 중원을 거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기본 루트는?

문경 새재라구요? 노!

새재는 조선 초 개척 된 후 500년 동안 이용된 기간도로,,,임진왜란 이후가 전성기.

정답은 하늘재(계립령)와 소백산의 죽령입니다.

이중 계립령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156년 신라 아달라 왕 때 열린 후 고려 말까지 사용된 기간도로.

보다 빠른 직선 구간인 문경새재가 조선 초 등장하면서 하늘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죽령은 하늘재 보다 2년 늦게 열렸고.

새재 바로 옆 이화령은 일제감정기 때 닦인 신작로.

지금 이화령은 3번 국도와 충주~문경간 고속도로가 터널로 지납니다.


길의 속성은 직선을 추구한다는 것.

하늘재를 이용하면  문경시에서 관음리로 크게 우회해 백두대간을 넘어야.

초기 하늘재를 이용한 이유가 바로 고도가 상대적으로 낮고(525) 산세가 유순했기에.

이후 문명의 발전은 직선 구간인 새재(650)를 열리게 했겠죠.


앞 칼바위 능선이 만수능선,,,끝 봉우리가 만수봉.

능선을 따라(남) 가면 덕주사,덕주마애불,덕주산성,미륵대원 미륵불이 그곳에.

뒷쪽 먼 능선길은 백두대간 길.

좌로 가면,즉 동진하면 소백산,,,우로 가면 조령산 거쳐 속리산으로.

사진에서 보듯 월악산은 만수능선을 통해 백두대간과 남북으로 그 맥이 연결.

이런 지리적 이점이 월악산 일대가 빨치산 무대였던 이유였겠죠.


남쪽

주흘산(문경시 진산)~포암산 사이가 하늘재(계립령)

주흘산~조령산 사이가 문경새재.

조령산 우측(서쪽)으로 이화령.

이화령 위로 3번 국도(지금은 터널)가 지나가는 데 이는 일제 강점기 때 뚤린 신작로. 

충북 괴산읍~연풍읍~이화령~경북 문경시로 이어집니다.


지금 나의 관심사는 따로 있으니~~~ 

주흘산과 포암산 사이 하늘재의  인문지리와 역사성!!!

하늘재 남쪽은 문경시 관음리로 관음리서 하늘재를 넘으면 1.5키로 지점에 미륵대원이.

이 미륵대원(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서 길은 둘로 갈리는데,

1.좌(서)를 택하면 수안보(온천) 거쳐 괴산군,충주시로 이어지고.

2.우(동)를 택하면 바로 송계계곡.

송계계곡은 월악나루에서 남한강을 넘어 제천,충주로.

제천에서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 님아~~' 그 박달재를 넘고.


아래는,

문경시 관음리~하늘재(백두대간)~미륵대원~월악산으로 이어지는 고대 루트 라이브!

하늘재(525)


M 형태의 산이 문경시 진산인 주흘산.

하늘재는 주흘산~포함산 사이로 백두대간 길목.

따라서 비가 오면 우측(북)은 남한강으로,좌측은 낙동강으로 흐르고.

자,그러면 1천년 전으로 돌아가,

하늘재를 넘어 한반도 중원으로 진출해보죠.

산길이 너무 유순해 누구나 쉽게 넘을수 있어요.

 문경 관음리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충북 수안보면 미륵리가 나옵니다.


아래 사진 처럼요.

하늘재를 넘은 후 미륵대원서 숙박하고 수안보 거쳐 괴산이나 충주로 가든지(일반적 코스)

월악산 송계계곡을 따른 후 남한강 월악나루서 남한강을 건넌 후 제천,충주로 가든지...

물론 월악나루서 거룻배 타면 논스톱으로 남경(한양) 까지 편하게 다다를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화도 교동도 앞바다 까지 더 내려가서 

예성강 타고 내륙으로 오른 후 벽란도로서 하선하면 개경이 코 앞.


윗 사진에서 알수 있듯,

 그러나 새재를 넘으면 다이렉트로 수안보~충주가 가능합니다.

이게 새재가 조선조 기간도로가 되고 우회로인 하늘재가 쇠퇴한 이유!


미륵대원서 동쪽인 월악산 방향을 택하면

저 송계계곡 타고 남한강 월악나루에 다다릅니다


이를 한컷으로 정리하면 아래 사진.

백두대간 서쪽인 주흘산 지맥 부봉(916m)에서

하늘재~미륵대원~월악산을 조망한 거네요

이게 바로,

삼국시대 이후 고려말까지 1천년 넘게

영남 문경에서 남한강변 충주로 넘나들던 기간도로.


랜드마크로서 월악산 영봉,느낌 오나요?

미륵대원 Y 계곡 중 이쪽은 수안보 가는 길,저쪽은 송계계곡.

탄항산(주흘산 지능선)~포함산 사이가 하늘재

 Y 자 갈리는 작은 분지가 미륵대원터 일대.


지금 내 또 하나의 관심사는 저 하늘재와 월악의 관계!

하늘재는 전장의 루트이기도.

그리고 미륵대원 일대는 1천년 동안 문화회랑( cultural gallery)이였다는.

하늘재는 소백산맥을 남북으로 넘나드는 주요 길목.

따라서 군사,정치,종교,문화적인 다양한 역사적 족적들이 남아있을수 밖에.

신라는 한강 유역 중원으로 진출 할 때마다 이 길을 넘었고

고구려가  남진할 때도(죽령과 더불어),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접수할 때도,

몽고군이 서라벌 황룡사 구층탑을 불태울 때도,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할 때도,,,등등.


미륵대원지 (彌勒大院址 ) 석조여래입상( 고려초)


애초엔 석굴암 처럼 목조 건물로 씌워져 있었다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마이태자와 덕주공주도 저 하늘재를 넘어 서라벌을 탈출.

그 흔적들이 미륵대원과 월악산에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하늘재서 북쪽으로 1,5 키로 지점에 있는 미륵대원지 (彌勒大院址 )

창건 연대나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

석조여래입상(사진,일명 미륵석불),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아래 사진),

석등(아래 사진),당간지주 등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네요.

인근엔 대규모 군주둔지 흔적들도.

하늘재 주변엔 다듬다 만 석조물들도 여기저기에,,채석장엔 돌을 떼어낸 흔적도.

 원(院)에서 알수 있듯 미륵대원(彌勒大院)은 관료나 돈 있는 길손들의 숙박업까지 겸했겠죠.

 

그런데 미륵대원의 상징인 미륵석불이 마이태자가 세웠고,

누이 덕주공주는 월악산 남쪽 덕주골에 덕주사를 짓고 마애불를 조성했다는 전설이.

두 남매는 금강산으로 도피하기 전 한동안 이곳 월악과 백두대간의  험한 산세를 활용,재기를 도모했을 터.


미륵대원지 미륵석불 앞 석등 & 5층탑


멀리 월악산 영봉이 보이네요.

덕주골 마애불은 남쪽의 미륵석불을,

미륵석불은 북쪽의 마애불을 향하고 있고.

오누이가 오매불망 서로 바라보는 것으로 각색.


송계계곡으로 하산 합니다.

뒤돌아 보니 정상이 보이고.


북쪽

뒤쪽으로 멀리 주흘산~조령산


앞 계곡이 송계계곡

지금은 508 지방도로가 지나고

지방도로는 미륵대원터 거쳐 수안보(온천)로 이어집니다.

 왼쪽 검푸른 능선 바로 너머에 덕주사




5부 능선서 바라본 영봉

저 영봉 일대에 천연기념물 산양이  살고 있답니다.

산양은 천적을 피할수 있는 암릉구간에서만 살고.

그래서 설악산에 가장 많은 개체수가.


월악신사(月岳神祀)


불교가 들어오기 전 고대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산악신앙(山岳信仰)이 일반화 되었다는 점.

산악은 인간에게 외경과 두려움의 대상.

산을 통해서만이 구름을 뚫고 하늘의 영역에 닿아 비를 얻을수 있었고.

따라서  나라의 흥망성쇄는 명산의 기운(氣運) 여부에 달려있다고 믿었네요.

그래서 명산엔 제관을 두고 제사를.

신라의 오악(五嶽) 사상도 산악신앙의 표현.

신라는 중앙에 부악, 동 토암산,북 태백산,서 계룡산,남 지리산 이리 오악을.

불교 이후에도 이러한 산악사상은 후대로 이어졌으니.

명산의 중요도에 따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해 제사를.

조선조 월악신사는 문경새재로 하늘재 기능이 약화되자 소사(小祀)를.

 중국의 오악(五嶽)?

태산(泰山),화산(華山),형산(衡山),숭산(嵩山),항산(恒山)


동쪽 신륵사서 영봉 찍고 서쪽으로 넘어왔지만

가장 선호하는 코스는 북에서 남.

즉 사진 왼쪽 충주호 쪽인 보덕암에서 출발해 하봉~중봉~영봉 거쳐 주능선 따라 덕주사로 하산.

암릉 구간이라 오르내리는 스릴도 만점.

북으로는 충주호의 시원한 눈맛, 남으론 중첩하는 백두대간 산줄기가 아스라이.


 

4시간 걸려 오후 2시 동창교 도착.

잠시 덕주사로.


하덕주사

덕주공주가 서라벌 피신 후 금강산 입산 직전 머물렀다는 전설이.

상,하덕주사가 있는데 여기는 하덕주사.

하덕주사서 1.5키로 더 오르면 상덕주사.

상덕주사는 월악 일대가 빨치산 활동지라 한국전 때 전소되었고.


상덕주사 마애불.


높이 13미터로 고려 초기로 추정.

사람들은 덕주공주가 자신의 모습을 구현했다고 믿고 있고.

남향으로 미륵대원 미륵불을 향하고 있네요.

오누이가 서로 바라다 보는 형국.


월악산성 동문


송계계곡 남쪽,북쪽에 남문과 북문이 있고.

그리고 이곳 덕주사가 있는 덕주골엔 동문을.

산성은 삼국시대 이후 누대에 거쳐 증축되어왔고,,,동문 등 문루는 조선조 때.

몽고 침략 때는 충주 일대 주민들이 이곳 덕주산성에 피신했다고 고려사는 전합니다.


부역에 시달렸던 민초들의 고난(苦難)이 성곽에 고스란히.



지금 부터 2차 산행


차량으로 30분 거리

충주호 장회나루 뒷산 제비봉으로 갑니다.

제비봉 서쪽 능선길서 보는 충주호 경관이 장난 아니여요.

단양팔경 원투 펀치인 옥순봉과 구담봉이 거기에.

들머리는 얼음골

날머리 장회나루까진 4키로 2시간 예정


제비봉 정상(710m) 까지 1.8km, 1시간 정도 치고올라야.

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라 힘들고


 선채로 몇번을 쉬었는지...


저 위가 정상


충주호 옥순봉 쪽에서 보면 부채살처럼 드리워진 바위능선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같다나.

꿈보다 해몽. 산 관련 지명엔 좀 억지스러움이 있어요.


제비봉서 바라본 동쪽 소백산 연봉들 <참고 사진>

동쪽으로 소백산 연봉이 아스라이 사라지고

연봉 중 우측 움푹 페인 곳이 죽령(竹嶺,689m)

참고로 영남서 중원으로의 길목인 계립령(하늘재)은 525m,문경새재는 650m.


충주호 상류.

멀리 단양읍이 보이네요.

앞 교각은 중앙고속도로 단양대교.

수몰 이전엔 저 일대가 단양읍. 상류쪽으로 이주한 (신)단양읍이 보이고

저 바위 위에 서면 충주호 일대가 한 눈에.

예기치 못한 거라 순간 탄성을 지르게 되죠.


우측(동)이 단양읍 쪽.

멀리 금수산(1,016m)

작년 봄에 올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가운데 가은산,바로 앞이 말목산.

앞 말목산 아랫쪽에 퇴계 흔적이.

 퇴계 48세 때 상처하고 18세 관기인 두향과 사랑을 나누는데,

그 두향의 묘가 저 말목산 자락 강선대에.


둘은 목하 열애중~~~.

때마침 퇴계 형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왔어요.

어쩔수 없이(회피제도) 인근 풍기군수로 발령이 났고.

이때 퇴계의 이사짐엔 두향의 이별 선물 둘이 있었으니, 남한강 수석과 매화 분재 한분.

퇴계는 매화를 유독 사랑했다죠,그가 지은 매화시만도 100여수.

이중 80여수는 매화시로 묶어 발간했고.

결국 둘은 만나지 않고 서신만 오가다 두향은 저곳 러브 바위 강선대서 사망.

후대는 죽음에 대한 다양 버전을 생산하기 시작했어요.

수절하다 남한강에 투신했다나....등등.

말목산?

남한강을 향해 말이 물을 먹으려고 머리를 길게 내민 형상이라.



누구나 핸펀을 꺼내게 됩니다

그리고 셔텨에 정신이 팔리죠


 단양~충주~괴산 간 36번 국도가 보이고.


저 풍광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딱 산자수명(山紫水明)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은.

사진으로는 충주호 전체 중 1/4도 안보이지만 중앙으로 멀리 보이는 비봉산 주변이 진짜 충주호.

옛청풍현 일대 <참고사진>

육지 속 섬같은 곳으로 가운데가 비봉산.


청풍면의 수많은 마을들은 수면 아래로 잠기고 당시 문화재들만 저 비봉산 아랫 자락으로 옮겼다는.

비봉상 정산 우측 아래가 '청풍문화재이주단지'

35년 세월의 이끼가 끼여 나름 멋진 풍광을 선사합니다.

당대 조선 3대 누각인 한벽루도 저기서 볼수 있고.

최근 비봉산 정상까지 모노레일을 설치했는데 볼만해요.

충주호가 준공될 때는 1985년.

충주시,제천군,청풍군,단양군 일대가 물에 잠겼고.

이중 청풍군 27개 마을 중 25개가 수몰되면서 청풍군 자체가 사라져 버렸네요.

상류인 단양읍도 통채로 수몰되어 지금의 신단양읍은 이주 단지.

청풍명월 충청북도!

당시 남한강 변 최고 승경처는 청풍현.

그래서 당대 실력자들이 외직으로 나갈 때 청풍현이 1순위.

그 시절 서울시 경찰서장 퇴임 예정자들도 선호하는 외직이 있었다죠.

설악산 가깝고 홍천강 흘러 산자수명한 홍천군 경찰서장 자리.


저 고개 이름은 계란재!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

산수유람에 있어서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라 이곳 남한강변 최고 풍광, 청풍현을 놓쳤을리가요.

그가 맞은편 금수산에 올라 옥순봉 일대를 바라보니 풍수적으로 기가 막혔나 봅니다.

소위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후 계란재란 이름이 생겼고.

지금 계란재는 옥순봉,구담봉에 오르는 등산로 초입으로 인기가 짱,,,강추!

드라이빙 슈즈에 평상복만으로도 오를수 있는 트레킹 코스.

충주호 드라이브나 장화나루서 유람선만 타지마시길.

유람선에선 옥순봉 전제적인 형태를,옥순봉 정상에서는 충주호 전체를 즐길수 있습니다.


하루 해가 서쪽으로 저물고 있네요.

우측 일몰 지점으로 뾰족한 산봉우리 보이시나요?


저거요!

월악산 영봉입니다. 신성의 영봉.


저기서 오전 1차 산행을 마치고 지금 2차를.

이곳 행정지명이 단양군 단성면인데,

소백산 죽령을 넘어온 이들에게

서쪽 멀리 보이는 저 월악이란 존재가 어떠했으리라는 점은 짐작이 가고도 남네요.

늘 접하는 인근 괴산,음성,충주,제천,단양 주민에게는 말한 필요도 없고.

그리고 두향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저 아랫 마을 두항리라네요.

두항리(斗項里)엔 두항초등학교도 있고. 두향에서 두항으로.




사진 찍기 좋은 곳!


또한 내려가는 길목이라 기다렸는데 결국 찍혔네요.

여자 친구 둘이 신이 났어요. 돌아가며 찍고 찍히고.

사랑스런 모습들.

초상권은,

모짜르트가 지인 하프너 작위수여식,혹은 딸 결혼 축하로 작곡한 하프너로 대체.

모짜르트 교향곡 35번 '하프너' 2악장 안단테


https://www.youtube.com/watch?v=HKhNblPybDo



장회(長淮)나루,,,,긴 강이라는 뜻.


많은 풍류객들이 찾았다는.

율곡 이이가 이곳을 지나면서 長淮라는 이름을 새겼답니다.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피오르드 처럼 협곡이라 물살이 거새 장회탄(長淮灘)이라 불렀고.

바로 앞 장회탄(長淮灘)은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저절로 밀려날 정도로 물살이 센 곳.




저 옥순봉을 기준으로 너머는 제천시 한수면,이쪽은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조선조 때는 청풍현과 단양군 경계.


산수에 대한 라벨링 하면, 퇴계라는.

그는 가는 곳마다 수려하거나 특이한 산수에 이름을 붙혀주곤했어요.

많은 지명이 퇴계를 통해 인간사에 데뷰했다는.

퇴계 이황이 48세 때 단양군수로 부임해 왔어요.

이방을 불러 당연 단양팔경 부터 구경하자고 했겠죠.

옥순봉 저 암릉에 반했어요.

보자 하니 그 생김새가 옥같이 희고 고운 죽순들이 땅 위로 뚫고 나오는 모습.

그래서 옥순봉(玉筍峯,286m)이라 명명을.

한술 더 떠 옥순봉,구담봉 주상절리 암릉군에 대한 소유욕이 생겼나 봅니다.


이지번(李之蕃,1469~1522)을 아시는지?

마포구 현 토정동에 흙담을 두르고 청빈했던 토정비결,그 토정 이지함 형이네요. 

이때 이지번은 청풍현감.

퇴계는 이지번을 만나 담판을.

'옥순봉,구담봉을 단양군에 돌려줄수 없냐고?'

이지번이 바보인가요, 당연 노!

어쩔수 없이 퇴계는 옥순봉 어귀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 새겼습니다.

꿩 대신 닭!

단양에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 

단구는 단양의 옛 이름.


구담봉(龜潭峰)~?

절벽 위에 거북바위(龜峰)가 남한강 물에 비친게 거북무늬를 띠고 있어 구담(龜潭)

이를 합하니 구담봉(龜潭峰).



물살 쎈 장회탄도 충주댐으로  잔잔한 호수로 변했고.

암릉의 일부는 물에 잠겼지만 그 풍광은 졸아들기 보다는

넓어진 물길과 어울려 한층 더 넉넉해졌다고나 할까.



퇴계가 옥순봉을 형이상학적 사랑으로 머물를 때

하학적으로 사랑한 이가 있었으니,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1806)!!


동해안에 관동팔경이 있다면 내륙엔 단양팔경이죠.

조선의 사대부들의 특성 중 하나는? 답습과 모방의 천제들이라는.

송나라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모방해 풍경 좋은 곳은 뭐뭐팔경 하며 지적 유희를.

주자의 무이구곡( 武夷九曲)을 본따 명산 계곡이란 계곡은 뭐뭐구곡이라.


바로 앞 옥순봉 보이시죠?

옥순봉은 단양팔경 중 단양의 서쪽 끝.

옥순봉 포함 저쪽(서)은 제천시 수산면이요,우측(동)은 단양군 단성면.

옥순봉은 제천시 지역이라 제천팔경에도 들어가고.

옥순봉은 단양팔경 중에서도 풍경으로나 인문학적으로나,예나 지금이나 최고 인기.

玉筍峯(372m)~~

수직으로 뻗어 오른 흰 죽순같은 암릉(지질학적으로 주상절리)에 반해

장회탄을 오르내리던 많은 시인묵객들은 옥순봉을 주제로 읊고,쓰고,그렸네요.

이중 압권은 단원이 그린 두점의 실경산수 옥순봉도(玉筍峯圖).

단원은 옥순봉을 얼마나 흠모했던지 두점이나.


그럼 먼저 실경으로 보죠.

옥순봉 무릅 아래는 잠겼으니 지금은 유람선을 타야 .


수몰로 아래 쪽은 심하게 망가졌어요(참고 사진)


아래는 김홍도의 실경 산수화.

옥순봉도(玉筍峯圖).1796년,지본담채,26.7 x 31.6cm,호암미술관. 병진년(1796년)화첩  


나룻배에 탄 강 위의 시점.

현재 죽순(주상절리) 아랫쪽은 물에 잠겼고.

단원은 외에도 <도담삼봉도> <사인암도>등 단양팔경 주제로 두점을 더.


또하나는 나귀를 타고 옥순봉 아랫 자락을 지나는 시점.

옥순봉도(玉筍峯圖) 단원 김홍도,간송미술관


 치장을 버리고 특성만 간결히 처리.

나귀 탄 단원 보이시나요?

단원은 분명 자신으로 투영했을 터.

어떤 가요, 21세기와 18세기가 실경으로  비슷하나요?

물론 현재 나귀가 지나는 저 길은 물에 잠겼고.

단원의 실경산수화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개인적으론 사대부들의 와유(臥遊)라는 문화를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 .

 

와유 ( 臥遊 )~~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기는 조선 사대부들의 문화행태.

요즘으로 치면 전문가가 찍어온 사진을 보고 즐기는.

당시 조선 사람들 최고 꿈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것.

정조도 보고 싶었겠죠.

당대 최고 화원인 단원에 미션을 내립니다.

비용 등등은 다 댈 터이니 가서 그려와라!

단원은 동대문을 나와 양평~원주~평창 대화~대관령~강릉~동해~삼척~울진~평해 .

다시 북진해 양양~설악~속초~고성~금강산으로 들어갔어요.

 초본 100여점을 그려와 완성 후 정조에 바쳤고.

그 일부가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으로 남아 있고.

정조는 수시로 금강사군첩을 보며 금강산을 와유하고 신하들과 품평도 하고 그랬다네요.

저 맑은 두 옥순봉도를 보니 와유란게 헛된 망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귀를 보니 시정(詩情) 이란 걸 느낄수 있고.


옥순봉도는 미술사적으로도 명작.

단원 김홍도 하면 풍속화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는 30대 작품들.

단원의 예술적 진가가 발휘될 때는 50대 이후,,,옥순봉도는 바로 52세 작품.

그는 20대부터 도화서 최고 화원으로 군림.

정조 어진을 세번이 그리는 영광으로 평민 출신 이지만 40대 후반 연풍현감으로 특채되죠 .

그러나 3년 만에 뇌물 수수 등으로 파직,,, 이후 야인으로서 자유인.

옥순봉도는 바로 자유인 김홍도 시기의 작품.

연풍현은 옥순봉하곤 지척이니 놀기 좋아한 그인지라 현감 시절에도 왔었겠죠 .



그럼 유람선 선상에서만 볼게 아니라

직접 옥순봉 주상절리 위쪽으로 한번 올라가 보죠

계란재서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멀리 제비봉이 보이네요.


아래는 옥순봉,구담봉에서 바라본 충주호

앞 산이 제비봉

장회나루가 보이고.

단양~충주시 간 36번 국도도.

왼쪽 멀리 소백산 능선


장화나루 앞 말목산

말이 물을 마시러 목을 장회탄(남한강)에 내밀고 있나요?


세월이 흐르고 지형이 바뀌어도 자연의 명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뒤로 제비봉

옥순봉서 보는 형상이 제비가 날개짓 하는 모습이랍니다.

그리 보여요?

유람선 해설사는 통닭이랍니다.

저 정상 너머서 올라와 우측 능선 따라 장회나루로 하산했고.


 서쪽을 보니 옥순대교.

멀리 청풍문화재 이주단지가 있는 비봉산이 보이고.



장회나루




암릉구간의 철재 데크를 타고 내려왔어요


장회나루 유람선 타는 곳.(참고 사진)

충주나루,청풍나루,월악나루,신단양나루,장화나루.

충주호 다섯 나루터 중 청풍나루와 더불어 가장 인기.

물론 바로 앞 옥순봉 일대가 가장 산자수명해서.

청풍과 장회를 오가는 관광선도 있습니다.1시간 30분 소요.



&&&&...

단양팔경,,,, 장회나루서 유람선 타시려거든

꼭 계란재서 옥순봉도 들르시길,,,쉬엄쉬엄 왕복 1시간이면 충분.

더 좋은 건 이곳 제비봉을 오르는 것.

20여분만 오르면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지기에 체력 가능할 때까지 오르다 회귀하면 되고.

운동화 차림에 보통의 체력이면 누구나 가능.

강추!!

제비봉>>옥순봉>>>>>>>유람선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청평사
    '20.11.26 2:45 AM

    월악산 정말 힘들게 올랐던 기억이 있네요. 기억에 남는 산.....

  • wrtour
    '20.12.1 12:39 AM

    그렇죠?
    대부분 월악산 하면 힘들다는 인상이 먼저인듯해요.
    설악,월악,치악 등등
    청평사님 뵈니 청평사 뒷산 오봉산이 생각나네요.예전 한번 46번 국도 배후령 넘어 경운산~오봉산~청평사~소양호 유람선 코스도 새록새록 하구요

  • 2. 수늬
    '20.11.26 3:14 PM

    옥순봉.. 나귀 탄 단원이 가던 길이...
    지금은 없어졌군요...
    옥순봉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wrtour님 보물같은 포스팅 오랫만에 보네요.
    반갑습니다..^^

  • wrtour
    '20.12.1 12:50 AM

    안녕하세요 수늬님!!!
    여전히 고전 음악 즐기실거구 ㅎ.절기도 딱.

    네,나귀길은 수면 아래로 잠겼지만 넓어진 물길이 또다른 풍광을 만들어내네요
    단원이 백투더퓨쳐 하면 유람선 포인트서 세번째 옥순봉도가 탄생하겠죠? 어떤 모습을까요?
    그리고 보물이란 칭찬에 괜시리 어깨가~~ㅋ

  • 3. 예쁜솔
    '20.11.26 8:25 PM

    충주호, 장회나루, 유람선, 도담삼봉...
    저는 주로 아래로만 다녔네요.
    에구~저 퇴계의 후손인데...

  • wrtour
    '20.12.1 1:09 AM

    진짜가 나타나셨네요,예쁜솔님!!
    퇴계에 이육사 후손.

    다음은 예쁜솔님을 위한 후손 얘기 한토막!

    퇴계는 21세 때 김해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상처한 뒤에 30세 때 안동 권씨 부인을 맞음.
    허씨와는 두아들을 뒀는데 둘째 이채를 낳으면서 사망.그리고 이채는 22세 때 사망.
    이채 관련 전해온 얘기가 특별하네요

  • 4. wrtour
    '20.12.1 1:35 AM - 삭제된댓글

    (이어서)

    퇴계가 상처 즈음 48세로 단양군수로 봉직 중.관기 두향과 열애.그리고 그때 둘째 이채가 사망.

    청상과부(靑裳寡婦)가 된 둘째 며느리, 그녀에게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오는데~~.

    정비석은 '퇴계소전(1978)'에서 ‘홀며느리의 逸話’라는 제목으로 이것을 소개하고 있다.

    둘째 아들 채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홀로된 며느리를 항상 위로하며 돌보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 후원을 돌아보다가 퇴계를 경악케 하는 일이 발생한다. 며느리의 방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고, 또한 말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며느리가 남자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남편인 것처럼 다정하게 음식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퇴계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며칠 후 사돈을 만나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려갈 것을 종용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이 한결 같이 퇴계가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아침도 마찬가지 였다. 조반 후 길을 떠나려 하자 주인은 버선 한 켤레를 주었는데 그것도 발에 꼭 맞았다.그 순간 퇴계는 ‘네 둘째 며느리가 이 집에 개가해 온 모양이구나.’생각하였다. 퇴계가 주인과 하직하고 길을 떠나는데, 담 모퉁이에서 몸을 숨기고 눈물로 배웅하며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먼발치로 보아도 틀림없이 그의 둘째 며느리였다.
    .......

    퇴계의 과부며느리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이되기도 한다. 친정으로 돌려보낸 이유가 며느리 방에 꽃가지가 배갯머리에 꽂혀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퇴계가 며느리의 방에서 본 것도 며느리가 배개에 갓을 씌어놓고 그것을 끌어안고 흔들거리고 있었다고도 한다.구비문학(口碑文學)이 으례 그렇듯이 이렇게 다양한 변이과정을 그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퇴계에겐 과부며느리가 있었다는 것, 퇴계는 당대의 엄격한 규범보다는 따뜻한 인간성을 더 중시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된다.

    .............

    그리고 퇴계 모친도 과부.
    (그래서 청상 된 둘째 며느리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나 봄)
    퇴계는 7남 1녀 중 막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퇴계는 묘갈명을 씀.
    ...........

    김해 허씨
    안동 권씨

    어디 계열이신가요?

  • 5. wrtour
    '20.12.1 1:50 AM

    (이어서)

    상처 즈음 퇴계 48세로 단양군수로 봉직 중 관기 두향과 열애.그리고 둘째 이채가 사망.

    청상과부(靑裳寡婦)가 된 둘째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버전으로 전해오는데~~
    정비석은 '퇴계소전'에서 ‘홀며느리의 逸話’라는 제목으로 이것을 소개하고 있음.

    둘째 아들 채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홀로된 며느리를 항상 위로하며 돌보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 후원을 돌아보다가 퇴계를 경악케 하는 일이 발생한다. 며느리의 방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고, 또한 말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며느리가 남자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남편인 것처럼 다정하게 음식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퇴계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며칠 후 사돈을 만나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려갈 것을 종용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이 한결 같이 퇴계가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아침도 마찬가지 였다. 조반 후 길을 떠나려 하자 주인은 버선 한 켤레를 주었는데 그것도 발에 꼭 맞았다.그 순간 퇴계는 ‘네 둘째 며느리가 이 집에 개가해 온 모양이구나.’생각하였다. 퇴계가 주인과 하직하고 길을 떠나는데, 담 모퉁이에서 몸을 숨기고 눈물로 배웅하며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먼발치로 보아도 틀림없이 그의 둘째 며느리였다.
    .......

    이를 통해 퇴계에겐 과부며느리가 있었다는 것, 퇴계는 당대의 엄격한 규범보다는 따뜻한 인간성을 더 중시했다는 것 등을 알수 있네요
    그리고 퇴계 모친도 과부.
    그래서 청상 된 둘째 며느리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을까요?
    퇴계는 7남 1녀 중 막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퇴계는 묘갈명을 씀.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첫글을 남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