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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수다,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

어머니의 살림

| 조회수 : 2,186 | 추천수 : 8
작성일 : 2005-06-05 12:53:34
저두 이제 신혼티를 완전히 벗을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제 살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제법 갖추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이쁘기만 하지 쓸모도 없는 작은 주방도구들을 샀다가
다 다른 사람 줘버리고 기증하고 팔아버리고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쳤다지요.
이제야 조금씩 눈을 떠가는 기분입니다.
내 손에 꼭 맞는 주방살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이죠^^
주걱 하나, 국자 하나를 사더라도
어떤 것이 내게 필요하구나 라는 감이 약간은 온다고 할까요.

하지만 정말 새 것들로 가득하고
예전같으면 듣도 보도 못했을 가전을 두루 갖추고 살면서도
항상 부럽고 탐이 나는 것은 정작
너무 오래 써서 낡고 손때가 가득한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의 살림입니다.
정말 재밌는 사실이지요.

저희 친정 엄마는 사실 살림이 완벽한 현모양처는 아니셨습니다.
어릴 적에 엄마 얼굴 보기가 거의 어려웠던 요새식으로 워킹맘이셨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저희 형제들에게는 물론 엄마가 최고였습니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이 제일 맛있고,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간식이 좋아서
우리 엄마는 좀 바쁘긴 해도 최고 엄마라고 생각했어요.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로 인해
솔직히 저희 친정집은 전성기에 비하면 가세가 많이 기울었답니다.
엄마가 뿌듯하게 장만하셨던 소중한 살림들도
큰 집에서 이사나오며 거의 다 처분하셨구요.
가전 제품 같은 것도 너무 낡아서 도저히 못 쓰게 된 것들을
결혼전부터 제가 하나씩 다 바꿔드려서 이제 친정집 큼직한 살림살이는
사실 제가 거의 장만해드린 셈이네요.
하다못해 냄비세트나 양면팬 같은 것까지 사다드렸다지요.
엄마가 하나 있었으면 하고 한번씩 흘리시는 것들을 들어두었다가
나중에 제가 선물해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미스테리입니다.
똑같은 물건을 제가 쓰면 왜 영 신통치 못하고 짐짝이 되는데,
엄마가 쓰시면 요긴한 살림이 되는 걸까요? 엄마 손은 요술손 같습니다.
제 주방의 1/3도 안 되는 자그마한 엄마의 주방에는
엄마가 요긴하게 두루 쓰시는 살림들만 있답니다.
절대 비싼 것도 아니고 귀한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서 오가다 천원, 이천원 주고 사오신 것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도 명절 때나 가끔씩 놀러가서 엄마의 주방에 서면
정말 손에 쏙쏙 들어오는 살림이 여간 탐이 나는 것이 아니랍니다.
크기가 절묘한 채반이며, 길이가 딱 좋은 볶음 주걱 같은....
왜 이 녀석들은 엄마의 눈에만 보이고 제 눈에는 안 보였던 걸까요? ^^
하지만 저는 어디서 구하셨는지만 여쭤보고 뺏어오지는 않아요~

사실 저희 엄마도 살림욕심이 왜 없으시겠어요.
좁은 주방도 답답하고 없는 살림이 한없이 아쉬우실 거예요.
그에 비하면 정말 제 주방은 드림키친입니다.
어쩔 때는 첨단주방에서 삽질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제가 형편껏 돕고는 있어도 이전까지 친정에 너무 돈을 많이 썼던 터라
남편한테 많이 미안한 것도 있구요, 마음만큼 못 해드리는 게 항상 안타까워요.
언젠가는 엄마가 더 늙어서 호호할머니 되시기 전에
멋진 주방 꾸며드리고 싶어요.
엄마 모시고 살림 장만하러 쇼핑 다니면 얼마나 재미날까요.

이번에는 저희 시어머님 살림입니다.
친정 엄마와는 반대로 시어머님은 전업주부셨기 때문에 그야말로 프로주부십니다.
장도 다 집에서 담궈 드시고, 천일염도 일일히 씻어다가 간수 내려 쓰시고,
집에서 온갖 식재료 손질하여 갈무리해뒀다가 드시는 분이시죠.
게다가 전라도 분이시니(!) 그 솜씨야 말 안 해도 다들 아시겠지요.
처음에 저희 어머님은 제가 공부만 하다가 온 쑥맥으로 아시고
'상추는 흐르는 물에 씻어야 한다'는 것부터 일일히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 저도 나름대로 친정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대신 살림도 하고 밥도 해먹고 다니고 해서 살림에 영 잼병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어머님의 가르침대로 하나씩 따랐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님이 해주시는 구수한 추어탕에 별미 토란국
입에서 살살 녹는 소갈비찜, 각종 해물탕이며 밑반찬이
어찌나 신기하고 맛있었는지 눈이 다 돌아가더군요.
결혼해서야 친정엄마의 밥상이 참 기본백반 뿐이었고,
제가 먹어본 음식이 별로 없었다는 걸 알았다는 거 아닌가요.

식재료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시지만 저희 어머님은
참으로 알뜰하신 분이어서 전기 쓰는 것과 쓸데없이 돈쓰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하시는 양반입니다.
그래서 제가 장만한 가전들은 다 어머님은 모르시는 비밀병기 ㅎㅎㅎ
아시면 잔소리 엄청 들을 게 눈에 불을 보듯 훤하지요 ㅎㅎㅎ
그러니 어머님 살림들도 여간 낡은 것이 아닙니다.
칼자국이 역사를 말해주는 나무도마며 한쪽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스텐냄비
귀퉁이가 깨진 플라스틱 채반, 잠금쇠 하나가 깨진 스텐김치통
어머님께는 모두 유효한 살림들인 거지요.

아....근데 또 그것들이 제가 시댁에 가서 잡기만 하면
다들 요술방망이처럼 변신들을 하는 것인지^^;;;;
도마며 칼의 느낌도 너무 좋고,
낡았지만 종류대로 갖춰진 채반이며 각종 볼,
모두 짝짝이 제각각이지만 조리용도가 기가 막힌 스푼들.
이제는 어머님 손바닥의 느낌을 닮아버린 나무주걱까지.
그래서 이따금 어머님 주방에서 일을 할 적이면
저는 반투정식으로 아부를 하곤 하지요.
'저는 이상하게 어머님 낡은 살림들이 더 좋아 보여요.'
어머님은 씨익 웃으시면서 '니 게 다 새 거니까 훨씬 좋을텐데 뭐 그러냐' 하시죠.
'그래두 어머님 것이 음식도 잘 되고 더 좋다니까요. 제가 갖고 가고 싶어요~~'

친정엄마와 시어머님의 살림이 부럽게 보이는 한
저는 살림초보를 못 벗어난다는 소리가 되겠지요?
그래도...영원토록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건 '엄마가 정성들여 만들어주시는 것'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살림을 꾸미는 일이 재밌기는 합니다.
정성껏 만든 음식을 식구들이 맛있게 먹으면 뿌듯하고,
새로운 레시피를 배워 만들어보는 일은 신이 나기도 하지요.
하지만 준비하고 차리기부터 치우기까지 복잡한 주방일을 마치고
식탁에 홀로 앉아 멍하니 상념에 사로잡힐 때면
가끔씩 나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수저를 잡고 군침을 삼키며
엄마가 해주시는 맛난 음식을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나도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듣고 싶고,
나도 '오늘은 엄마가 뭐 해주련. 우리 부침개 해먹을까?' 그런 다정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잘 먹는 음식만 골라 만들어주시지만,
그래도 편식은 하지 않도록 해주시던 배려가 그립습니다.
마술사처럼 능숙하게 움직이는 엄마의 손놀림을
신기하게 구경하면서 음식이 손끝에서 뚝딱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나도 먹다가 흘리면 엄마가 닦아주고 집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는 그리움와 아련함이
엄마를 '어머니'로만 존재하게 하는 억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복잡하고 한많은 가정사속에 '자기의 인생'은 지워져버린 엄마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셔야 했는데
영원히 '자식들의 어머니'로만 남게 하실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감정들은 속에 고이 접어둡니다.
아주 가끔씩만 엄마에게 속내를 드러내지요.
사실 저희 엄마는 '어머니로서' 살림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학생시절에는 시인이 되고 싶어하셨고
아직도 노트에 가끔씩 직접 쓰신 시를 적어두십니다.
손수를 놓는 솜씨도 뛰어나셔서 집에 있던 것들은 정말 작품이었지요.
그런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결혼한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각하고 하겠지요? ^^
나의 아이에게 나는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나름대로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성숙한 모습으로....
그것은 아마도 제가 우리 어머니들의 인생을
보다 더 생각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될 것 같습니다.
내가 나의 어머니를 억압하지 않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
제가 이루고픈 꿈이랍니다.^^

긴 연휴에 한가하게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이렇게 장황한 글 남겨봅니다.
많이 지루하셨죠? ^^;;;













1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강금희
    '05.6.5 1:11 PM

    아뇨, 지루하지 않게,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 2. 미야
    '05.6.5 1:15 PM

    저도 요즘 그맘 이해 간다니까요..
    왠지 읽으면서 맞아맞아.. 하다 갑니다~^^

  • 3. 미스마플
    '05.6.5 1:21 PM

    나나언니인줄 알고 글을 남기다가 보니 나나선생님이시네요.
    죄송..
    일년도 안 된 새댁인줄 알고 쓰다 보니.. 아니네요.

    저도 시집에 가면 시어머님 살림 욕심나요.
    저번엔 시아버님 무쇠팬도 달라고 해서 가져왔는걸요. 아주 잘 쓰지요.

  • 4. 왕엄마
    '05.6.5 2:19 PM

    글쓰시는 솜씨가 시를 쓰는 어머니를 닮으셨네요.
    두 어머님의 살림 솜씨를 닮아 훌륭한 솜씨의 어머니가 될거란
    확신이 드는데요.^^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 휴일 날 잘 읽고 갑니다.

  • 5. 소박한 밥상
    '05.6.5 2:42 PM

    차분한 글...잘 읽었습니다
    눈이 쉬 피로해서 긴 글은 잘 못 읽는데...
    예쁜 아가를 위해 이유식 고민하는 글 쓰시는 날을 기원한다면
    촌스런 답급로 스트레스를 안겨 주는 게 되겠지만...
    님도 예비 훌륭한 살림꾼이십니다

  • 6. 내맘대로 뚝딱~
    '05.6.5 6:35 PM

    어른들의 손때가 묻은 살림에서 생활의 지혜와 마음과 정성이 느껴져서 그럴것 같아요..
    흑~ 저고 그런게 무지 부럽습니다..
    그리고 나나언니님의 글 솜씨도 부럽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단숨에~

  • 7. 동경댁
    '05.6.5 8:31 PM

    님의 글을 읽다보니 괜시리 눈물이 핑...도네요,,,흑흑
    그렇잖아도 요즘 살짝 향수병 조짐이 있는데...엄마 보고 싶어요,,,ㅜㅜ

  • 8. 바쁜그녀
    '05.6.6 1:05 AM

    저두 재밌게 읽었어요^^

    저두 저희 언니를 보면서 그런생각 참 많이 하는데..헤헤~

  • 9. 동그라미
    '05.6.6 1:17 AM

    님은 효녀이며 효부시네요. 오늘 나혼자 자유부인이되어 한가이 놀고있지만 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찡하니 아려옵니다.
    울 엄마 생각이 나서리........
    생각은 백지장 한장 차이인것 같습니다. 님의 고운 생각이 하늘을 움직이어 태의 문을 여시길 기도해봅니다.

  • 10. 아티샤
    '05.6.6 2:07 AM

    글 좋으네요... 울 친정엄마... 눈물 맺힙니다

  • 11. 름름
    '05.6.6 9:53 AM

    잔잔한 수필 한 편 읽고 갑니다
    남들도 님 부엌 살림 보면서 그런 감탄 하고 있을 겁니다

  • 12. 나나선생
    '05.6.6 11:16 AM

    다른 분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자리가 된 것 같아 무척 기쁘네요. 좀 쑥스럽기도 하고요;;
    황금같은 연휴 잘들 마무리하세요^^*

  • 13. 파랑하늘
    '05.6.7 8:22 PM

    기분이 좋네요...으흠, 전 연휴때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받고왔습니다. 신랑이 '니가 가서 좀 해라'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왠지 친정에 가면 상다리 부러진 밥상이 아닌데도 두그릇씩 먹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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