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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비상 계엄 후 30일 - 망상의 궁전'

몸에좋은마늘 조회수 : 588
작성일 : 2025-07-16 20:35:34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 계엄 후 국회가 즉시 해제에 실패했을 때 어떤 상황이 되었을 지 궁금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저항은 즉시적이고 격렬했을 것이고, 결국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실패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만큼 큰 혼란과 희생이 있었을 것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을 가정하여 시뮬레이션을 반복했고 하나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기본 틀과 내용은 직접 작성했고, chatgpt와 gemini를 이용하여 시뮬레이션을 진행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비상 계엄령 선포가 전국에 울려 퍼졌을 때, 아무도 그것이 진짜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여의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위한 긴급 소집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의도 전역은 1시경부터 검은 복장의 군병력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른 아침, 국회 전광판은 꺼졌고 방송은 정지됐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1호는 전국의 정치 활동, 집회, 언론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포고령과 동시에 계엄군은 일명 ‘노상원 수첩’에 기록된 정치인 수십 명을 체포 구금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혁신당 대표 등 야당 정치인, 진보성향 유튜버, 진보 성향 교수들까지 일거에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광화문 앞 전광판에는 "국가 안전을 위한 임시 조치"라는 문구만이 무음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보는 새어나왔다. SNS는 막혔지만, 사람들은 구형 스마트폰과 외장 메모리를 통해 영상과 정보를 돌렸다. 구속된 정치인의 가족들이 보내온 음성 메시지, 공군 부대에서 발송된 내부 지령문, 해킹된 계엄사령부 메일까지. 12월 4일 저녁, 광주 금남로에서, 부산 서면에서, 서울 광화문에서 불이 켜졌다. 아무런 기획 없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 손엔 촛불이 아니라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불법 계엄 해제하라!"

"1980년 광주를 기억한다!"

집회는 곧 시위가 되었고 경찰에 의해 시위는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 광화문, 여의도, 홍대 등 대규모 시위가 발생 가능한 지역은 ‘통제구역’으로 선포되었다. 전국에서 시위를 막으려는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이어졌고, 몇몇 지역의 경찰은 시위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계엄사령부는 검찰 수사 결과라며 12월 5일,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간첩 조직’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명단엔 대학생, 시민단체 활동가, 작가, 언론인 등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2월 6일 — 불길의 시작

서울역, 광주 충장로, 부산 서면, 대전 은행동. 전국 21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시민 항쟁’은 1987년을 넘어섰다. 시민들은 이 날을 ‘두 번째 6월’이라 불렀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지 않았다. 오직 계엄사령부가 대신 발표한 성명은 "반국가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응"뿐이었다. 전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자발적 시위는 계엄 정부의 정보 봉쇄를 뚫고 해외 언론에까지 실시간으로 보도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 대신 휴대폰을 들어 기록했고, 군인들은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계엄군으로 동원된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고, 몇몇 현장 지휘관 “우리 국민에게 총을 들 수 없다”는 발언을 부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12월 6일 밤 - 학살 음모

대통령 주재 하에 비밀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계엄사령부 고위 간부와 국방부장관, 대통령 경호실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경고는 끝났다. 이제 진압의 시간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곧이어 수도방위사령부,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경비단에 진압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12월 7일 — 총성

이튿날 새벽 4시, 광화문 인근에 집결해 있던 시위대 해산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시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확성기 너머로 "군은 국민을 지키는 존재입니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던 순간, 누군가 발포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발생한 발포는 단 한 번의 방아쇠가 아니었다. 지휘 라인을 이탈한 계엄군 일부는 시민을 향해 자동소총을 연속 발사했고, 도로 한복판에 있던 고등학생 박수연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이 중에는 72세의 노인과 유모차를 끌던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엄사령부는 “우발적 충돌”이라고 발표했으나, 영상기록은 달랐다. 중무장한 계엄군 지휘관이 사격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SNS를 통해 퍼졌다.

이 영상은 드론 카메라로 촬영된 4K 영상과 함께 언론 봉쇄를 뚫고 텔레그램 채널과 위성망을 통해 확산되었고, 순식간에 전국적 분노가 폭발했다. 인터넷과 방송은 이미 검열되고 있었지만, ‘망명 언론’으로 불린 일부 해외 거점 유튜브 채널이 이를 그대로 송출하면서 ‘학살’이라는 단어가 공공연히 회자되기 시작했다. 시민군 일부가 무장했으며, 일부 군 부대가 무기를 내주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퍼졌다. 계엄사령부는 이에 대해 "외국 세력의 선동"이라 주장했으나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12월 10일 — 시신 발견

계엄군의 무력 진압 후 두려움과 혼란 속에 대규모 시위가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경기도 화성에서 어민이 건져올린 시신 한 구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두 팔이 묶인 채 와이셔츠 차림이었고, 치아 상태와 지문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포착된 것은 12월 3일 밤, 여의도에서 계엄군에게 긴급 연행되던 순간이었다. 정부는 그의 행방을 끝내 밝히지 않았고, 언론은 계엄 포고령 때문에 추적 자체를 하지 못했다.

하루 뒤 충남 태안 해안에서도 두 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한 명은 또 다른 야당 대표였고, 다른 한 명은 진보 성향 정치인이었다. 이들의 시신에도 동일한 방식의 결박 흔적과 머리 뒷부분 총상 자국이 있었다. 물에 떠밀려온 이 시신들은 육안으로도 명백한 ‘처형 흔적’을 보여주었다.

12월 11일 — 살아 돌아온 증인

유튜버 이세욱. 과거 보수 성향 채널 운영자였던 그는 계엄 직후 계엄 반대 방송을 하다가 12월 5일 새벽 국정원 요원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가 연행된 사실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2월 6일 충북 보은에서 탈출에 성공해 충남 금산의 한 성당으로 피신했고, 이후 시민 조직의 도움을 받아 신원 보호와 함께 영상 증언을 남겼다.

그가 남긴 영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체포된 후 눈이 가린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지만 분명히 들렸습니다, "남겨두면 안된다, 수거된 건 모두 처리해"라고요. 눈 가리개가 흘러내린 틈으로 주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팔이 꺾여 너덜거리던 이재명 의원과 또 다른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한 명씩 끌려갔고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곧 내 차례가 올 것이라 생각할 때 누군가 나를 끌어 당겨 손을 풀어 준 후 물 속으로 던졌습니다.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물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음은 내 차례였을 겁니다.”

영상 속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팔목에는 수갑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2월 12일 — 진실의 파열음

계엄사령부는 해당 증언에 대해 “가짜 뉴스”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시신에서 검출된 탄약 잔류 물질과 구속 흔적, 그리고 이세욱의 일관된 진술은 거짓말일 수 없었다. 수만 명이 그의 영상을 받아 공유했고, 시민들은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실종과 살해"가 의문에서 확신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서울 지역을 포함한 주요 부대의 분대장과 중대장들이 자발적으로 사표를 제출하거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제26사단 모 중대장이 “우리는 학살자가 아니다”라며 부대를 해산하고 군복을 벗는 영상이 유출되었다. 춘천에 주둔하던 2군단 포병연대 전 간부들이 단체로 무기를 내려놓고 민간으로 이탈했다.

계엄사령부는 이 같은 불복 사태에 대해 ‘작전 명령 거부는 군사재판 대상’이라는 포고령 3호를 발효하며 재차 압박했다. 그러나 육사 출신이 주도하는 계엄사령부의 강경 노선에 대해 3사관학교 출신 장교와 해군·공군 지휘관 다수는 “계엄사령부는 윤 대통령의 사병 집단에 불과하다”는 성명을 내부적으로 회람하며 저항을 예고했다.

공군 작전사령부 참모진 일부가 계엄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명 의사를 비공식 전달했고, 해병대 1사단의 지휘관이 "정치적 계엄은 따를 수 없다"는 성명을 대대장 회의에서 낭독했다. 이날 이후 군은 둘로 나뉘었다. 계엄사령부와 대통령 직속 경호 부대 중심의 소수 강경 진압파, 그리고 다수의 ‘국민수호군(자칭)’으로 나뉜 사실상의 이탈 부대였다.

대전 인근 보안시설 무기고에서 계엄군 소속 특수병력이 무기 반출을 시도하던 중,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과 충돌이 발생했다. 충돌 후 일부 병력은 무기를 그대로 시위대에 넘겼다. 충남 예산의 35사단 후방부대 일부는 시민 자치단체와 협력해 ‘계엄 명령 불이행 선언서’를 작성하고 공개 발송했다. 전국 각지에서 계엄군의 불복종과 저항이 계속되었고, 무장을 해제하고 시위대에 합류하는 병사들의 행렬이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12월 13일 — 시민군 창설

서울 망원동 성당 지하 강당.

군 출신의 예비역 장교들, 탈영한 하사관, 의대생 자원조직, 교사 노조원, 시위대 자치방어조 구성원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최초로 ‘서울시민방위군’라는 이름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무장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시민을 죽이는 명령이 내려졌고,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이들조차 죽었다. 이 땅에서 시민을 죽인 정권은 더 이상 국가의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군이 된다.”

동시에 부산, 광주, 대전에서도 유사한 조직이 생겨났다.

12월 14일 — 자연발생적 군대

12월 14일 자정, 전국 17개 광역시도 단위에서 23개의 ‘시민방위조직’이 동시 선언문을 발표하며 연합했다.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 시민군 사령부’로 명칭을 통합했고, 서울대병원 지하 통신실을 점령해 최초의 자체 방송 송출을 개시했다. 군 출신 예비역, 탈영 병력, 명령 불복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자치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주요 무기고는 계엄군의 방조로 시민군에 의해 개방되었다.

대통령은 이 상황을 "조직화된 내란"이라 선언했지만, 국민은 "조직화된 정당한 항거"라 부르기 시작했다. 무장한 시민군의 모습은 국제 언론의 1면을 장식했다.

12월 15일 — 민중의 군대

계엄군의 균열은 가속화되었다.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부대는 무기를 내리고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일부 부대는 무기를 통째로 시민군에게 넘겼고, 계엄군 내에서 “지휘권을 가진 자는 계엄사령관이 아니라 민심”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계엄사령부는 그날 이후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한남동 관저의 불빛은 밤을 새워 꺼지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날 밤, 격노하며 “반란이다, 다 없애 버려, 총이든 로켓이든 뭐든 사용해!"라고 고함을 쳤다는 증언이 전해졌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7기동군단의 일부 병력이 계엄사령부의 위치 유지 명령을 거부하고 부대를 이탈하자, 대통령은 직접 계엄사령관을 호출해 "계엄 명령 불복에 대한 즉결 처분"을 지시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이미 지휘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윤석열 대통령 직속 경호부대뿐이었다. 그들은 한남동 관저를 요새화하며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검찰총장은 특별 브리핑을 통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혁명 직전”이라고 선언했으며, 곧 이어 계엄사령부는 무기고 보호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모든 조치는 한 발 늦었다. 제3군단장, 수도방위사령관, 해병대 일부는 계엄군 명령을 거부하거나 시민군과 협조했다.

12월 16일 — 성역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는 이미 보통의 주택이 아니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콘크리트 방호벽과 대공 방어망이 설치되어 있었고, 경호실은 사용 가능한 모든 무기를 갖추고 외곽 부지에 방어 라인을 구축해두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 계엄령을 준비하면서 기존 대통령 경호실 인원을 재편하고, 특수 임무 수행 경험이 있는 예비역 장교와 사설 용병 조직 출신 인물들을 비공식적으로 채용해 ‘대통령 직속 무장안보대’를 구성했다. 이들은 대통령실의 비호 아래 군과 경찰의 행정 명령을 받지 않았으며, 무장은 준 특수부대 수준이었다.

전날 밤, 한남동 관저 외곽 경비선에서 시민군 특임조의 정찰 드론이 처음 포착되었다. 이튿날 오전 2시경, 시민군 수도권 작전본부는 한남동 진입을 결의했다. 탱크와 헬기를 동원하는 것은 더 큰 피해를 일으킬 수 있고, 대통령을 생포하기 위해 전면전보다 침투를 결정했다. 오전 4시 30분, 첫 번째 진입조가 한강변 구도로를 따라 접근하자 관저 측 방호벽 상단에서 고열 감지 레이더가 작동했고, 경호실 저격수가 숲속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총성은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에 날카롭게 퍼졌고, 시가는 곧 전장으로 변했다.

12월 16일 낮 — 시가전 개시

동이 트자 초기 시민군은 산개 전술을 사용해 접근을 시도했지만, 관저 측은 이미 전술 방어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외곽 방호벽은 삼중 구조로, 내부에는 자동 사격 포탑과 고성능 열화상 감시 장비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통신 교란 장비가 공중드론의 신호를 지속적으로 간섭했다.

경호실 무장세력은 ‘관저전’을 염두에 두고 30일 치 식량, 연료, 탄약을 비축해놓았고 시민군이 돌입할 때마다 후방 지하 통로를 통해 유동적으로 저항했다. 한남동 일대는 하루 만에 ‘군사통제구역’으로 전환되었고 도심은 봉쇄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변수가 작동했다. 경호실 내부의 균열이었다.

12월 18일 — 균열

대치가 계속되는 중 외곽 지역에서 대규모 인원의 이동이 확인되었다. 경호실 인력 중 절반 이상이 투항했다. 관저 내 통신 중계병이 시민군에 익명으로 탈출 경로와 내부 배치를 전송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부인을 데리고 17일 밤 관저 지하 통로를 통해 이미 빠져나갔다"는 말을 남겼다. 이 통로는 본래 전시 대비용 피난 루트로, 용산 대통령실에서 과거 청와대 지하벙커까지 연결되던 동선 중 하나였다. 그는 대통령이 "끝까지 싸우라"고 말하며 경호대장에게 지휘권을 맡겼고, 그 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12월 19일 — 관저 붕괴

시민군은 해당 정보를 바탕으로 19일 새벽 2시, 일제 포위망을 구축하고 관저 진입을 감행했다. 전투는 5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시민군은 최후의 저항거점인 관저 지하 2층 방공통로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경호실 병력과 격전을 벌였다. 체포된 병력은 "사수하라는 지시만 있었다. 저항할 의지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관저 최후 저지선을 뚫리기 직전 김성훈 경호처 차장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으나 즉시 사살되었다.

한남동 관저가 시민군의 수중에 들어온 순간, 윤석열과 김건희는 없었다. 이 소식은 곧 시민군 방송망을 통해 전국에 퍼졌고, 대통령이 ‘자신을 위한 싸움’에 병력을 남겨둔 채 은신했다는 사실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12월 20일 - 해외 도피설

시민군은 경찰특공대 일부와 함께 용산으로 진격했다. 대통령실은 폐쇄됐으며 윤석열 대통령과 영부인 김건희가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사망했고 그가 자필로 남긴 유서는 검열에 막혀 공개되지 않았다.

12월 24일 — 벙커의 발견

시민군 정보전 부대는 대통령의 도피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폐쇄망 기록 복원을 시작했다. 12월 23일, 청와대 옛 본관 인근 방호로에서 일시적으로 활성화된 비상 출입기록이 발견되었다. 당시 외부 감시망은 경호실 통신차량의 신호를 수차례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추적을 회피하고 있었다.

시민군에 투항한 침투 특수부대는 청와대 구 본관 지하 통제소를 수색했다. 과거 북핵 상황에 대비해 구축되었던 이 벙커는 생존 시설이 완비된 은폐형 구조물로, 청와대 이전 후에도 일부 유지되고 있었다. 벙커 가장 깊숙한 보안 구역을 열었고 안에는 두 명만 있었다. 윤석열과 김건희.

그들은 며칠째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다.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고, 통신기기는 대부분 파손된 상태였다. 윤 대통령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국가를 지키려 했다. 법의 심판을 받겠다."

체포조는 그의 마지막 말을 영상 기록으로 남긴 후 녹화를 종료했다. 이후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렸고, 곧이어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12월 25일 아침, 청와대 앞 언덕길에 하얀 천이 휘날렸다. 천에 적힌 문장은 하나였다,

"Merry Christmas"

2025년 1월 3일.

서초동 검찰 청사엔 새 태극기가 걸렸다. ‘임시 시민행정위원회’는 12월 30일부터 과도정부 체제를 선언했고 전국 자치단체가 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다시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헌법 개정안은 논의 중이었고, 군은 철저히 민간 통제로 들어갔다. 언론은 복귀했고, 검찰청은 해체되었다. 1월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다시 대한민국 1일.

IP : 49.161.xxx.10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아주비슷
    '25.7.16 9:41 PM (116.45.xxx.34)

    그럴 듯...
    합니다.아니 그랬을 거 같아요.
    아마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을 듯..
    상상이상의 악마들이니까요.
    크메르루즈의 재판이 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ㅠ
    민주당원 전교조 등등 그들과 반대되는 목소리는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을 거 같아요.

  • 2. 나무木
    '25.7.16 10:18 PM (14.32.xxx.34)

    결말은 마음에 듭니다
    다섯 발과 세 발의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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