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법연구회..가 뭐 어때서?]
1. 판사의 판결이 맘에 안들때, 판사의 성향과 소속단체 등을 걸어 시비걸곤 합니다. 대표적인 게 <우리법연구회>인데, 우리법연구회 소속이라 하면 무슨 뿔난짐승처럼 낙인찍곤 합니다. 그렇게 비난받을 연구회였던가?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2.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출범했고, 이후 대법원의 공식연구단체의 하나로 승인받았습니다. 현재 법원에서는 여러 연구단체들이 있고, 그들은 어떤 정치성향 이런 게 아니라 한결같이 열심히 탐구하고, 가끔 외부연구자도 불러서 경청하곤 합니다. 법관들의, 모든 연구단체가 다 그렇습니다.
3. 1988년은 강성군사독재가 물러가고 대통령직선을 했지만, 도처에 권위주의 체질이 만연했습니다. 힘없던 사법부는 여전히 "정권의 시녀"라는 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장판사들이, 사법부독립을 확립하고 대법원장.대법관 선임에서 정치적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집단서명을 했습니다. 그 파문은 엄청났습니다. 이때부터 사법부독립의 토대가 만들어졌기에, 이는 사법민주화운동의 출발로 기록됩니다.
4. 그 서명을 조심스레 이끌었던 소장판사들이, 사법부독립 및 사법개혁, 그리고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반성과 제도개혁을 위한 연구모임에 나서게 됩니다. 그게 우리법연구회의 시초인 것이고요. 정말 국민들이 소망하던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법부가 나서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그 뒤 우리법연구회는 내부 토론회를 열심히 했습니다. 발표문을 모아 논문집도 내고요. 외부와 엮일까봐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고, 대신 회원인 판사들 자신들이 연구 발표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러다, 또 정권이 사법부를 요리하려 들면 항의하고, 사법부 내부의 계층주의, 관료주의에 대해 개혁을 촉구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법부가 보다 신뢰받고 안정된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내는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6. 그런데 이명박근혜 정권 들어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온갖 탄압이 가해졌고, 신변 위협도 엄청났습니다. 우리법연구회를 뿔난 짐승처럼 공격하는 언론들의 가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법연구회를 거의 와해시킨 다음은 어떠했나요? 사법부가 정권에 유착하여 소위 사법농단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원래 정권이 독재화하려면 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는 사법-언론-야당을 탄압합니다. 이들에 대해 구속하고, 기소하고, 압색하고, 블랙리스트 불이익을 주어 와해시키는 순간이 정권 자체의 종말의 시작임이 우리 역사적 경험으로 자주 입증되었습니다.
7. 판사들이 소심한 보신주의에 머물거나, 기득권 카르텔에 편입되는 관성이 있어 왔지만, 우리법 성향의 판사들이, 개인적 불이익을 각오하고, 이에 맞서 왔습니다. 사법부독립.사법민주화.시민지향사법을 추구하는 판사 내부의 연구모임은 참으로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8. 종합적으로 볼때, 우리법연구회에 관여한 경력은 낙인찍을 게 아니라 민주사법, 시민사법에의 기여도로 존중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법연구회 운운하며 공격하는 정치인(다수는 법조인출신)들과 비교해보세요. 정치인이야 상대방 공격을 주업으로 삼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그 법조인-정치인이 판.검사 할 때 우리법소속의 판사보다 훌륭한 평가를 받을 게 제대로 있을까요.
9. 우리법연구회를 가장 잘 표상한 인물 한분을 들자면? 판사 한기택입니다. 46세 나이에 아깝게 별세하여, 안타깝기 그지 없었는데...그 한기택은 서울법대 77학번이고, 가나다순 출석번호에서 저보다 두 칸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법...출신 법조인들 중 초기 중심인물들의 행적을 눈여겨 보곤 하는데, 인격 면에서나 직격 면에서 두루 모범적입니다. 요즘 법조윤리에 정면으로 어긋하는 언행을 서슴없이 하는 분들과는 극히 대조적인 공적 삶을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요.
10. 한기택 판사에 대해, 이전에 쓴 글을 첨부합니다. 좋은 판사는 어떠해야 할까에 대한 한 표상으로 읽어주시고, 온갖 험구악설을 뱉는 그런 법조인과는 뭣이 다른가를 음미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