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C%9C%A4%EB%8D%95%EC%98%81
진심 직계 조상 아닌가 싶을정도..닮아도 너무 닮았어요
패전후 한반도에 재산때문에 일본 안돌아간
잔류일본인들이 한국 성씨 족보를 그리 사댔대요
윤매국노 파평윤씨라 하던데
정작 파평윤씨 문중에선
파평윤씨 아니라고 항의한대요.
파평윤씨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https://namu.wiki/w/%EC%9C%A4%EB%8D%95%EC%98%81
진심 직계 조상 아닌가 싶을정도..닮아도 너무 닮았어요
패전후 한반도에 재산때문에 일본 안돌아간
잔류일본인들이 한국 성씨 족보를 그리 사댔대요
윤매국노 파평윤씨라 하던데
정작 파평윤씨 문중에선
파평윤씨 아니라고 항의한대요.
파평윤씨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돈주고 샀나부다
스위스계좌로
맞네
자고로 씨 도둑은 못한다는 말이 있죠
친일파들이 그렇게 많은 서울땅 가지고 있다던데
이사람 후손은 누구일지 진심 궁금하네요.
땅은 못 찾더라도 후손들 이름 좀 공개했으면 좋겠네요.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결단을 촉구하고 설득을 했지만, 고종은 대꾸도 하지 않고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은 포기를 하고 돌아갔고 이에 일본이 실망했다고 한다. 이 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여 고종에게 찾아가 부탁을 했지만 역시 고종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협박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모든 창고에 봉인(압류)을 붙히고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는데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덕영은 고종의 과거 여자 문제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단호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고종이 주저 앉으면서 시선을 피하자 윤덕영이 고종 앞으로 가서 서서 말하기를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안 움직이겠습니다."라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 있었다고 하는데 고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순종을 보냈다.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윤치호가 말하길. "저 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는데[2]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는 건 총리대신으로써 합병 문서들에 서명을 한 이완용이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 윤덕영과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중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친일파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치마 속에 숨기는 등 온몸을 던져 항의했고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빼앗았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때 받은 것 중 하나가 벽수산장이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는데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 것 없었다. 이는 합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덕영은 민병석과 함께 이완용,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회유와 사주를 받고 조정에서 '병합반대론'을 무마,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정부 대신담당이 이완용이었다면 윤덕영과 민병석은 궁중담당이었던 것이다. #
얼마나 악랄했는지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로도 거론되기도 한다.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가 송병준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으나 고종이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고 한다. 다만 송병준은 이에 대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밝혀 이의 진상이 명확하지는 않다. #
1919년 1월 손병희가 발표한 ‘고(告)국민대회’ 포고문에 언급된 따르면 파리 강화 회의에 일제가 마련한 ‘한국 민족은 일본의 어진 통치에 순종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각계각층의 대표자 명의로 된 조작증명서 서명에 고종이 크게 진노하자 일제는 친일파인 윤덕영·한상학을 사주하여 독살을 꾀해 고종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를 매수하여 야참 식혜에 독약을 넣어 시해했다고 한다. # 그리고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의 유신영 편에서도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무려 3명이 윤덕영을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이라고 간주하는 증언을 남긴 셈이다.
친일파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은 윤덕영인데 옥인동의 약 54%, 지금의 서촌 부지, 수성동 계곡, 배화여자고등학교,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아직도 그 곳에는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집 안에는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 하천이 있는 총 "2만 평"의 대저택이며 이완용 땅의 4배인 "19,467평"(축구장 8개의 면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곳이다.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기사에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수(金福綏, 1872~1950)[7]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은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황실과 백성들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66살에 사망하면서 그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다.[8]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서는 이재곤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윤덕영에게 아들이 있긴 했지만 요절했기에 윤덕영의 종손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윤덕영의 양자로 들어왔으며,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같은 해 윤덕영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곧 해체된 데다 습작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윤강로는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며 당대의 유명 내과의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지며[9] 1965년 5월 22일 향년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해평윤씨라 나오는데 파평윤씨랑 같나요??
근데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믿겠다
정해인 정약용
원유철 원균
ㄴ파평윤씨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 썼듯이
1933년 2월 기준 윤덕영의 재산은 당시 화폐로 100만 원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이 40~50원[5]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민병석이 30만 원[6]을 가졌다고 한다.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66억 5000만 원 정도의 재산이던 셈이다.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은 그는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였으며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공로자 명감}(1935년)에서도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병합을 맞아 상하의 안태(安泰)를 위해 평온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한 한 사람으로 그 정성, 그 상식은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빛나고 있었다"(47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인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는데 송석원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으며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수(金福綏, 1872~1950)[7]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은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황실과 백성들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66살에 사망하면서 그 화려한 친일의 막을 내렸다.[8]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에서는 이재곤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윤덕영에게 아들이 있긴 했지만 요절했기에 윤덕영의 종손인 윤강로(尹强老, 1919~1965)가 윤덕영의 양자로 들어왔으며,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같은 해 윤덕영의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곧 해체된 데다 습작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윤강로는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하며 당대의 유명 내과의로 꼽혔던 것으로 전해지며[9] 1965년 5월 22일 향년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때 돈있는 일본, 친일파 노비출신들 대부분 족보샀을겁니다. 신분세탁은 안했겠어요. 같은 윤씨면 바꾸기도 쉽고
실제로
파평 윤씨 어느 어르신이
족보가 위조됐다고
계속 주장하시고
소송?까지 했다고 들었어요
퍼온 글
윤 파평윤씨 아니라고 족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미고성관 윤석열 이라는 책이 너무 궁금해 미치겠어서 샀음 윤씨의 족보에 집착해서
무려 홀로 대통령당선무효 소송을 건 위인이심
논리는 이러함
윤은 미고성관(뿌리가없음)->이 집안이 왜놈출신인지 만주족인지 알수없음->대한민국 국민아닐수도있음->피선거권없음->윤 당선무효
그리고 이 책은 그 소송기록의 내역이었던 것
족보좀 볼줄 아는 양반집 출신인가 본데
진짜 너무 웃겨
근데 신빙성이 존나 높음
근거가 탄탄함
내용이 너무 많은데 암튼 결론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신뢰성있는 족보(만가보)와
1980년 편찬된 파평윤씨 족보가 있는데
이 두 내용에 어긋나는 지점이 있음
만가보에는 셋째아들까지만 있는데
1980년 족보에는 갑자기 넷째아들이 생김
이게 윤석열 직계 뿌리인데
책 저자는 이게 전형적인 족보 위조 수법이래
아무튼 이거 말고도 묘를 쓰는 방법이라든가 비석 크기 이런것도 전부 말이 안된다고.. 아무튼 족보집착남 미친자라 내용이 많은 여기 다 못씀
울엄마 지금은 이땅에 없지만
파평윤가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
하늘나라 가기 직전까지 종친회에서 연락오던데
모든 파평윤씨 남녀들에게 연락이 간다는거 같았어요.
외갓집 분위기나 친척 삼촌들 뵈면 제가 꼬꼬마 였어도
언행에서 양반다운 풍모가 확 드러나는 분들이셨어요.
아이들이라고 가벼이 대하고 그런게 전혀 없어서 신기한 생각이 들었던..
우리 동네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고
책에서 보던 양반가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그자는 아닌거 같아요.
ㄴ파평윤씨 문중에서 항의했대요..우리는 독립운동가 집안이고 윤석열은 우리 문중 아니라고..
그리고 윗윗분 저도 미고성관 관련해서 읽은적있는데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이거 카페글인데 열릴지...
파평윤씨가 김건희 같은 갈보와 결혼했을 리가 없다고 나와요
https://m.cafe.daum.net/subdued20club/ReHf/5135903
윗님 글 열리구요
노수환씨 용자시네요
갈보...ㅋㅋㅋㅋㅋ
윤석열 집안은 독립이후 잔류일본인 집안 아닐까요?
강하게 의구심이 들죠. 하는 짓이며 생김새가 너무 복사판
저 카페글 저도 봤어요. 윤매국노가 파평윤씨아니라는 항의서한입니다..족보사기라는 말이 있죠
부부가 쌍으로 위조 사기 집안이네요
넘 똑같아요 사망도 같은 나이에 하려나.
조상인가 이름부터 얼굴까지 ㅎㄷㄷ
우스개로 알았는데 진짜 윤덕형 집안인가 보네..
그니까 다 친일파들이 나라 장악했네요.
권성동, 정진석도 유명한 친일 집구석.
저렇게 닮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