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해졌다.
냉장고 한기를 쐬며 사과 한알 꺼내 온다
오늘은 너의 날.
봄부터 지금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꽃가루도 바람도 먼지도 너의 외피를 스쳐갔겠지.
온갖 풍파와 유혹과 중력에도
떨어지지 않고 잘 매달려 있었구나.
예쁘고 고마워.
예를 다하듯,
겉을 물과 가루로 삭삭 뽀득뽀득.
껍질을 벗기려면 먼저 정수리 한대를 쳐야하지
사과의 수치심을 기절시키기 위해서.
오늘은 단칼에 너의 심장까지 도달한다.
네가 품은 사과의 진심, 하트형 심방을 도려내고
자존심처럼 조금 남은 꼬랑지도 발라내고
다홍빛 외피를 두른 채로
사곽 사곽 사곽 사곽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사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새콤달콤함
이름도 겸손하고 아름다운 사과
내 안에 너의 심장을 넣었으니
수줍어도 부끄러워도
너를 내밀만한 겸손과 용기가 나에게도 적잖이 싹트길.
사과, 오늘도 고마워.
너를 잊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