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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드라마를 두번 보는 즐거움(스포 만발입니다)

까칠마눌 조회수 : 4,819
작성일 : 2023-03-14 10:39:36
동은이는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죠. 드라마 상으로 문동은은 자살에 실패하지만, 실제로 박연진이 꿈이었던 문동은은 죽었어요.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문동은은 박연진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동은이 됩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았지만 다시 태어나는 셈이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문동은이 주여정의 복수를 돕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죠. 그렇다면 주여정의 복수가 끝났을 때, 주여정은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주여정의 삶도 끝은 자살이 예정된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강영천이 무기수라는 사실은 희망적이네요. 주여정이나 문동은은 강영천을 죽이는 것 보다는 오래오래 살려두며 괴롭힐 테니까요. 죽음은 그에게 그야말로 너무 "페어 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정의롭지 못한 자에게 정의로운 결말이라니 그건 축복이죠. 그런 축복을 내려줄 수는 없죠. 

여기서 잠깐, 16편에 나온 이모님 구합니다, 라는 문자. 교도소 밖 강현남이 대체 주여정의 복수를 돕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드라마에서 매우 매우 매우 설명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여정이 재소자의 여동생(아마도 그 여동생에게 불을 지른 남자친구를 상해 폭행한 이유로 들어왔을)을 치료해 주는 것으로 재소자의 마음을 사고 능력을 사고, 그 재소자를 움직여 강영천을 폭행하죠. 그 재소자가 출감하면 또 다른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 강영천을 살려놓고 두고두고 괴롭힐 수 있을 나의 폭력의 대행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감옥밖 누군가를 움직여야 하니까요. 당연히 강현남은 복수에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참으로 애매한 문제, 하도영.
하도영이 무정자증이라는 설까지 나도는 이유는 하도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하도영은 나이스한 개새끼지만, 그 개새끼라는 설정을 뒤로 해 두고, 하도영이라는 인물만 딱 놓고 봤을 때 "태어났을 때부터 흑돌을 양보받은" 사람이죠. 어렸을 때는 양보 받은 것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을 테고, 어느 순간 인생의 흑돌과 백돌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도 자신의 손에 것이 너무 당연해서, 그 것을 잃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조차 모르는. 이건 뭔가 투쟁과 쟁취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냥 내 것이죠. 
살다보면 드물지 않게, "내 것"을 극도로 아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나라는 범위가 넓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나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엄청난 성인들은 원수도 사랑하라잖아요. 그 범위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도,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부모, 연인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 자식이나 연인이 나의 확장형이라서 그래요. '내 것' 이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나' 인거죠.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를 구성하는 무언가' 라고 해야하나.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도영의 예솔이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의 확장형이에요. 예솔이의 생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솔이가 '내 것' 이라는 것이 중요하죠. 태어나면서부터 흑돌을 양보받아 삶의 모든 것이 '유리하며 쉬웠'던 하도영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쉬웠고, 거기서 확장된 나를 사랑하며 지키는 것도 쉽습니다. 아내 박연진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의 아내, 내 것' 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지키듯 아내를 지켜요. 박연진이 무슨짓을 했는지를 다 알면서도 그를 버리기 이전에 교정하려 애쓰는 것은 박연진의 삶을 지켜주려는 것이 아니라 '내 아내'를 지키고 나를 지키려 하는 것이죠. 이건 마치, 내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났을 때 그것을 치료하려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위암이 발생했는데, 그 암덩이를 잘라내지 않으면 암이 퍼져나가 내 몸 전체를 잠식해 나갈테니까요. 하도영에게 박연진은 위이고, 박연진의 행위는 위에 발생한 암입니다. 그 암을 잘라내기만 하면 기능이 좀 떨어진 위라도 안고 갔을 거예요. 15화에서 학폭 피해자인 소희의 유가족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는 게 치료 행위인 거죠. 그 위가 암을 떨어내는 것을 거절했고, 결국 하도영은 위 절제술을 선택하죠.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차원에서, 예솔이는 고장나지 않은 장기이고, 그 예솔이에게 달라붙을 가능성이 있는(그래서 예솔이를 병들게 하고 결국 하도영까지 망가트릴 수도 있는) 전재준을 잘라내는 겁니다. 그에게는 살인이 아니라 살균인거죠.(그래서 개새끼....) 전재준을 죽인 건 박연진과 불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솔이에게 접근했기 때문이에요. 

삶의 동인이 나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은. 13화에서 주여정과 하도영이 바둑을 두며 하는 대화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보여주죠. 주여정은 문동은이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복수를 돕습니다. 하도영은 문동은이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복수를 말리라고 해요. 그 복수의 대상이 박연진인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동은의 삶의 동력은 외부에 있어요. 복수가 끝났을 때는 살 수가 없는 거죠. 문동은이 끝내 자살을 택한 것처럼. '나' 가 없어요. 사실 문동은은 고등학생때 죽었죠. 문동은이라는 '나'는 죽었어요. 그걸 모르는, 여전히 '나'가 존재하는 하도영은 '나'를 지키라고 말하는 거고, 하도영과 비슷하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인생이 편의점 같이 간편하고 단순했지만 아버지가 죽는 순간에 '나'가 죽어버린 주여정은 하도영의 마음도 문동은의 마음도 이해를 합니다. 삶이 내부에서 기능하느냐 외부에서 기능하느냐의 문제죠. 

전재준은 박연진에 대한 태도가 명확해요. "그럼 엄마 쪽은 손절" 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하죠. 전재준역시 자기애가 충만한 개새끼인데, 전재준의 자기애는 폭이 좁아요. 그야말로 나만 중요하죠. 

박연진 역시 나만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박연진은 하도영도 하예솔도 '나'라고 인식하지 않아요. 박연진이라는 '나'를 꾸며주는 화려한 악세사리, 그야말로 글로리, 후광인거죠. 다치든 말든 상관없고 그들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요.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지 인지도 못할 걸요. 박연진이 전재준과 불륜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연진은 어쩌면 예솔이가 전재준의 아이임을 알면서 낳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남의 아이를 낳은 나를 여전히 떠받들고 사랑해주는 남편을 보고 싶은 욕망인거죠. 

전 드라마를 두번 세번 보는 걸 좋아해요. 
처음 볼 때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느라 바빠 놓쳤던 복선과 작가가 깔아놓은 의미심장한 장면들을 
두번째, 세번째 볼 땐 발견하게 되거든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럴땐.
아, 이 장면이, 이 대사가 그래서 나온 대사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게 올 때, 짜릿하죠. 

더 글로리는 타임라인이 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요. 이후의 장면을 보여주고 다시 이전의 장면을 보여주고 하는 식으로 좀 섬세하게 꼬아놓았죠. 그 꼬인 실타래를 풀지 않아도 드라마 스토리 라인을 정리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지만, 
다시 보면서 그 실타래들을 풀어 예쁘게 직조해 만든 태피스트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당신들의 태피스트리를 예쁘게 직조해 보시길. 
IP : 58.231.xxx.155
1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주여정은
    '23.3.14 10:42 AM (211.245.xxx.178)

    강영천한테 얘기했어요.
    나는 너를 죽일거라고요.
    아마 손에 피 안묻히고 죽일겁니다.

  • 2. 까칠마눌
    '23.3.14 10:45 AM (58.231.xxx.155)

    그건 너무... 페어 플레이 같은데요. ㅎㅎㅎㅎㅎㅎ
    저런 범죄자에게 죽음은 호사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괴롭혀야 진짜 복수죠.

  • 3. 까칠마눌
    '23.3.14 10:46 AM (58.231.xxx.155)

    죽이고 싶은 마음과 실제 죽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혹시 또 모르죠, 주여정이 동은이와의 사랑을 통해 '나'를 되 찾고, 삶의 동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을 수 있게 되면 심플하게 강영천을 죽여버릴지도. 지금은, 아직까지는 주여정을 살게 하는 동인이 강영천 같아서요.

  • 4. ㅇㅁ
    '23.3.14 10:47 AM (210.217.xxx.103)

    저는 강현남이 반찬가게를 하는걸 보여주고 이전에도 가정주부로서는 계속 밥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주로 보여주는 -김치를 하고 청국장을 끓이고- 것으로 보아 교도소 조리사쪽으로 뭔가를 꾸미려는 게 아닌가 싶던데
    주여정이 먹는거 하나도 조심해야 할거야 였나 암튼 먹는 것 이야기를 한 걸로 봐서.
    삼인이 좁은 교도소에서 조용히 일을 도모하겠죠.

    시즌이 아니라 파트1,2로 나눈거고 드라마는 끝났고
    주여정 이야기는 영화 형식으로 2시간 남짓의 이야기로 스핀오프 한편 나오면 좋겠고.

    (일본드라마 스펙이 1,2 나오고 영화로 3편 나온 것처럼)

  • 5. ...
    '23.3.14 10:48 AM (58.74.xxx.91)

    감상 재밌어요. 주여정에게 하도영이 문동은을 아낀다면 복수를 말려야하지 않냐 어쩌고 하는데 나중에 하도영이 자기 손으로 전재준을 죽여버리잖아요. 그전의 하도영이라면 안 했을 짓인데 자기 손을 더럽혀 가면서 하는거 보고 주여정이나 문동은처럼 상처입은 사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구나 느꼈어요. 그래서 하도영 역 맡은 배우가 하도영의 몰락이라고 표현한 것 같고. 편의점에서 굳이 서서 삼각김밥 먹는 것도요.

  • 6. ...
    '23.3.14 10:50 AM (58.74.xxx.91)

    하도영 역 맡은 배우가 유퀴즈에서 시즌2는 하도영의 몰락 이랬는데 저도 더글로리 2부 두번 돌려보고 대본과 인물에 대한 이해력이 탁월하구나 했어요. 작가가 하도영을 아예그 배우 생각하고 썼다는데 작가도 대단하고요.

  • 7. ...
    '23.3.14 10:53 AM (218.48.xxx.188)

    오오 깊이 있는 해석에 엄지척! 하고 갑니다~!

  • 8. 해석
    '23.3.14 10:59 AM (210.178.xxx.242)

    깊이 있는 해석 고마워 은숙아~^^

    작가님 속
    내 속까지 통과하는 해석 감사해요.

  • 9. 즐거움
    '23.3.14 11:18 AM (219.255.xxx.160)

    스포만발이어도 이런 통찰력 깊은 글 환영합니다.

  • 10. 그러면
    '23.3.14 11:22 AM (211.218.xxx.160)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긴데 남편이 너무 미운 아내가
    쥐약인지 농약인지를 매일 국에다 한방울씩 넣어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었데요. 원인없이 죽은 남편을 경찰에서 수사
    집수색을 했더니 옛날엔 밥상을 부엌 벽에다 걸어두었는데 네모난 상
    그 걸어둔 상 위편 밥상다리에서 농약이 발견되었데요.
    상상하건데 이모님이 그 나쁜 자식 밥에만 농약을 한방울씩 넣어서
    특식으로 주는거 아니면 누구 시켜서 그리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

  • 11. ....
    '23.3.14 11:40 AM (211.217.xxx.233)

    복수는 끝을 내야죠.
    복수 진행중은 쌍방이 완전 지옥에 있는거잖아요.

    복수임에도 복수끝에는 죽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성정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간의 충돌.

  • 12. 까칠마눌
    '23.3.14 12:07 PM (58.231.xxx.155) - 삭제된댓글

    음... 저는 토지를 대학 1학년 때 처음 읽었는데요, 제가 학교를 많이 일찍 들어간 셈이라, 토지를 처음 읽을 때 제 나이가 세는 나이로 18살이었어요. (78년 2월 생인데 호적상 77년 2월로 되어있어 95학번)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나이와 상관없이 제 이해력의 문제였는지 모르겠으나, 그 나이에도 토지 자체는 진짜 환장하게 재미있었습니다만, 토지 3부에서,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완료한 서희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있어요. 진짜 통쾌하게 완벽한 복수를 해 내거든요, 서희는. 그런데 마지막에 그 복수를 마무리하기를 미적거린다는 느낌이었고, 복수가 끝나고 몰락한 조준구를 보며 기뻐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허무에 빠져 어쩔줄 몰라하는 서희를 보면서, 아니 왜???? 했거든요.
    그 뒤 토지를 읽고,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며 나이를 먹어가고, 어느 순간에 서희가 너무 이해가 되는 거죠. 복수를 끝내고도 기뻐하지 않던 서희, 서희의 그 허무함, '나비가 날아간 고치만 남았구나' 라고 뇌는 서희.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는 서희. 나이가 주는 삶의 경험과 통찰력이 서희를 이해하게 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 흔히 하는 말, 복수는 허무한 것이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어요.

    서희는 온 생애를 조준구에 대한 복수에 걸었죠. 그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길상이와 결혼도 하고 부도 쌓고(물론 길상이를 사랑하고 있기는 했으나, 본인은 그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죠, 당시엔) 생애 전반이 조준구에 대한 복수에 매여 있어요. 삶의 목표고 생의 동력이죠. 그리고 그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서희는 삶의 동력을 잃어요. 물론 자식이 있고, 자신의 삶이 있으니까 죽음을 택하지는 않지만, 전 서희의 그 허무가 이해가 되더라고요.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최민식을 죽인 이병헌이 마지막에 울면서 웃는 장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의 마지막 눈물...

    복수에 생을 건다는 건, 그 복수가 끝난 뒤의 삶이 참... 뭐랄까...

    저는 동은이도 그렇게 봤어요. 고등학교 학폭을 당할 때 동은이는 죽었죠. 그리고 생의 목표가 박연진이 되잖아요. 동은이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요. 다른 아무것도 없어요.

    복수의 허무함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고 나의 삶이 중요한 하도영은 그런 문동은을 안타까워하구요. 자신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감히 상상도 안되니까요, 하도영은. 자기애가 너무나 충만한 사람이라.

    복수 끝에는 죽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성정이 아니라, 복수가 삶의 목표가 되고나면, 그 목표를 이룬 뒤에 남는 건 폐허밖에 없어요. 서희가 그랬듯. 복수는 그렇게 허망한 것이고, 그래서 많은 성현들이 말하죠. 니 복수는 남이 해 준다, 복수에 삶을 매몰시키지 말아라.... 라고.
    그럼에도 복수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사람은...

    음, 타인에게 복수를 목표로 살게 하는 삶을 주는 사람은, 살인을 하지 않았으나 살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 13. 까칠마눌
    '23.3.14 12:17 PM (58.231.xxx.155)

    음... 저는 토지를 대학 1학년 때 처음 읽었는데요, 제가 학교를 많이 일찍 들어간 셈이라, 토지를 처음 읽을 때 제 나이가 세는 나이로 18살이었어요.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나이와 상관없이 제 이해력의 문제였는지 모르겠으나, 그 나이에도 토지 자체는 진짜 환장하게 재미있었습니다만, 토지 3부에서,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완료한 서희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있어요. 진짜 통쾌하게 완벽한 복수를 해 내거든요, 서희는. 그런데 마지막에 그 복수를 마무리하기를 미적거린다는 느낌이었고, 복수가 끝나고 몰락한 조준구를 보며 기뻐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허무에 빠져 어쩔줄 몰라하는 서희를 보면서, 아니 왜???? 했거든요.
    그 뒤 토지를 읽고,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며 나이를 먹어가고, 어느 순간에 서희가 너무 이해가 되는 거죠. 복수를 끝내고도 기뻐하지 않던 서희, 서희의 그 허무함, '나비가 날아간 고치만 남았구나' 라고 뇌는 서희.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는 서희. 나이가 주는 삶의 경험과 통찰력이 서희를 이해하게 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 흔히 하는 말, 복수는 허무한 것이다, 라는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어요.

    서희는 온 생애를 조준구에 대한 복수에 걸었죠. 그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길상이와 결혼도 하고 부도 쌓고(물론 길상이를 사랑하고 있기는 했으나, 본인은 그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죠, 당시엔) 생애 전반이 조준구에 대한 복수에 매여 있어요. 삶의 목표고 생의 동력이죠. 그리고 그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서희는 삶의 동력을 잃어요. 물론 자식이 있고, 자신의 삶이 있으니까 죽음을 택하지는 않지만, 전 서희의 그 허무가 이해가 되더라고요.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최민식을 죽인 이병헌이 마지막에 울면서 웃는 장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의 마지막 눈물...

    복수에 생을 건다는 건, 그 복수가 끝난 뒤의 삶이 참... 뭐랄까...

    저는 동은이도 그렇게 봤어요. 고등학교 학폭을 당할 때 동은이는 죽었죠. 그리고 생의 목표가 박연진이 되잖아요. 동은이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요. 다른 아무것도 없어요.

    복수의 허무함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고 나의 삶이 중요한 하도영은 그런 문동은을 안타까워하구요. 자신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감히 상상도 안되니까요, 하도영은. 자기애가 너무나 충만한 사람이라.

    복수 끝에는 죽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성정이 아니라, 복수가 삶의 목표가 되고나면, 그 목표를 이룬 뒤에 남는 건 폐허밖에 없어요. 서희가 그랬듯. 복수는 그렇게 허망한 것이고, 그래서 많은 성현들이 말하죠. 니 복수는 남이 해 준다, 복수에 삶을 매몰시키지 말아라.... 라고.
    그럼에도 복수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사람은...

    음, 타인에게 복수를 목표로 살게 하는 삶을 주는 사람은, 살인을 하지 않았으나 살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 14. !!!
    '23.3.14 12:17 PM (61.47.xxx.242)

    하도영 인물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는데 사이다 같은 해석이네요
    이런 통찰력과 사고력 깊은 글을 쓰시는 분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강영천은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정신을 피폐하게
    피말려 죽일려나 생각했어요
    동은이랑 말싸움으로 맞짱뜨면 볼만하겠다 싶고요

  • 15. ..
    '23.3.14 1:22 PM (211.243.xxx.94)

    글 감사합니다.
    돈내고 봐야할 것 같은 통찰이네요

  • 16. ....
    '23.3.14 1:25 PM (118.235.xxx.106)

    글로리 해석 감사합니다

  • 17. ...
    '23.3.14 3:03 PM (106.101.xxx.115)

    흥미롭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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