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성종이 대표적인 사례이구요.
예종은 형이 죽은 지 11년 뒤인 1468년에 왕이 됐다가 1469년에 세상을 떠났다. 원자인 제안대군이 3세였을 때였다. 이로 인해 왕권은 의경세자의 아들들 쪽으로 넘어가게 됐다. 이때, 원칙대로라면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왕이 돼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3세였던 월산대군은 삼촌이 돌아가실 때는 15세였다. 왕위를 이어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러나 왕권은 월산대군의 동생인 12세의 자을산군(성종)에게 넘어갔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가 자을산군의 장인인 실력자 한명회와 제휴한 결과였다. 이때 자을산군의 즉위를 합리화했던 명분이 바로 택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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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1400년에 정종의 퇴위를 유도해 왕위를 차지했다. 이때 이를 합리화하는 데 활용된 것이 택현이었다. 적장자 우선 원칙을 계속 내세우게 되면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왕이 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적장자 우선 원칙을 끌어내리고 택현 논리를 띄우는 정치적 변화를 기하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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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태종 18년 6월 3일자(양력 1418년 7월 6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양녕대군 폐세자 조치 뒤에 이방원이 처음 내린 왕명은 "나는 제의 아들로 대체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방원은 세자 이제의 두 아들 중 누구를 세울 것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공식 왕명을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녕대군의 두 아들을 거론한 것이 진심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때 다수의 신하들이 내세운 논리가 택현이었다. 영의정 유정현을 비롯한 대신들은 '어진 이를 고르소서'라는 말로 분위기를 띄워 갔다. 이는 세자의 아들들이 어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장자 논리가 아닌 택현 논리에 따라 임금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세우라는 의미였다. 대신들도 이방원이 충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