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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예기치 못한 시어머님의 전화

쌀쌀한 조회수 : 6,509
작성일 : 2022-11-13 19:01:35
흐린 날씨에 모든 것이 차분히 가라앉은 조용한 일요일 아침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왜 예기치 못한 전화인가 하면 저희 어머님은 전화를 안하세요 
(대신 저랑 말이 잘 통하는 아버님이 전화를 자주 하시죠^^)
30년 넘는 저의 결혼 생활에서 어머님이 먼저 전화하신 적은 열손가락도 아직 못 채웠어요 ㅎㅎ
저희가 해외에 살 때 시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려주시려고 전화주신거 말고는 기억도 잘 안나요 
아, 저희 아버지 아프실 때 안부 및 힘내라고 전화주신 적 있고
카톡으로는 매일 위로가 될만한 음악과 좋은 말씀 그리고 안부문자를 보내주고 계셨지만 


어쨌든 오늘 아침 전화는 저희 아이 이야기를 아버님께 짧게 들으시고는 궁금함과 걱정으로 인한 것이었어요 
외국사는 아이가 잘나가는 큰 회사에 다니면서 자리잡았다 싶었는데 다른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살던 곳을 떠난다는 얘기를 들으신거예요
저희도 살짝 놀라긴 했지만 아이의 성향을 잘 알고, 지금껏 그렇게 써프라이즈로 심쿵과 어이없는 웃음을 주었지만 또 금방 맘에 드는 곳 찾아가곤 한 전적이 몇번 있던터라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어서 그러려니 했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남편과 같은 생각이고 아이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데에 감사해요
하지만 또 손주를 사랑하시는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런 큰 결정 이면에 다른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걱정하실 수 있으시니 길게 이야기 못하시는 아버님과 아들인 남편을 믿지 못해 ㅎㅎ 아이 엄마인 저에게 전화를 하신거예요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는 세상이라 사랑받지 않은 손주들이 없겠지만 집안의 첫째 손주로 사랑도 많이 받고 아이가 맏형으로 든든한 모습도 보여주던 아이라 부모님이 이 얘기를 들으시고 실망하시거나 걱정하시지 않을까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
그래서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말씀드린거죠 
어머님께서 다 들으시고 말씀하시길, “직장다니며 다른데 확정받고 그만두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나이많은 사람들 스타일이고 걔는 알아서 잘하는 아이니까 다 생각하고 했겠지… 이제껏 잘해왔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세계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되고, 자기가 좋은 것을 하는게 최고야…혼자서 자기 앞가림할 줄 아는 아인데 걱정 안해도 되겠네… 젊어서 혼자일 때 그런 경험 해보는거지 언제 하겠니… 아이가 생각도 바르고, 자기 갈 길 잘 찾아서 가고, 어디 내놔도 걱정안할만큼 잘 컸네… 네가 얼마나 열심히 키우고 가르치고 품어줬는지 내가 잘 알지.. 네가 아이들 정말 잘 키웠어, 정말 고맙다”
어머님도 나이가 드셨는지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더군요


아이를 믿지만 세상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어서 가슴 한켠에 아이가 앞으로 부딪히고 넘어야 할 것들, 피할 수 없는 것들을 겪어낼 때 힘들어할 걸 생각하면 부모로서 할 수 밖에 없는 걱정과 공감이 있죠 
이미 우리도 겪어봐서 결국엔 지나가지만 겪는 동안은 그 통증의 정도와 내 능력 밖의 것을 마주할 때의 무력감을 알잖아요 
그래도 남편, 어머님, 아버님과 아이 이야기를 하며 느낀 건 우리가 가족 맞구나, 마음으로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들이 있다는건 참 든든하구나
썰렁하고 시린 날씨에 언제든 껴입을 두툼한 외투가 두세벌 생긴 기분이예요
사실 언제나 좋은 분들이지만 ‘시’자로 시작된 관계라 아무래도 친정부모님 같은 친밀감이나 만만한 편안함은 아니었거든요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편안해졌지만 그래도 뭔가 2% 부족했는데…
이제는 그 관계가 다시 한번 한계단 올라가는 때가 되었나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친구도 있을만큼 저희도 나이든 어른이지만 흔들리지 않고 말없이 웃으며 손잡아주시는 더 큰 ‘어르신들’이 계시다는 건 정말 큰 안정감을 주네요 
세상에 넘치는, 사람들간의 비교와 무시와 시비와 질투와 비난과 뒷담화… 이런 것들 없는 청정지역에서 그저 쉬고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서로 살펴주는 가정과 가족이 있다는 것
성별, 나이, 가족내 지위에 상관없이 그저 가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충분한 관계
이제는 80보다는 90에 가까우신 여리고 작은 몸의 노인이지만 속사람은 거인처럼 크신 부모님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닫고 돌아보고 배웠어요 
지금은 하늘에 계신 친정아버지도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분명 시부모님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주저함없이 “괜찮아, 걔는 잘할거라 믿어!^^”라고 하셨을 것을 알기에 맘이 따땃해지고 배가 부릅니다 




IP : 59.6.xxx.68
1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믿고
    '22.11.13 7:05 PM (180.228.xxx.218)

    지지해주는 뒷배가 젤 든든하다고 하잖아요.
    좋으신 조부모님과 부모님이십니다.

  • 2. 기ㅏㅓㄴㄷ
    '22.11.13 7:07 PM (175.211.xxx.235)

    울컥하네요 그걸 알아봐주는 님도 품이 넓고 좋은 분 같아요
    고등되는 아들 키우는데 저도 그렇게 조용하게 자식들이 믿고 기댈 언덕이 되고 싶네요

  • 3.
    '22.11.13 7:38 PM (211.219.xxx.193)

    진짜 이상적인 어른들이네요.

  • 4. ^^
    '22.11.13 7:54 PM (59.6.xxx.68)

    맞아요
    다들 도닦은 분들 같으셔서 ㅎㅎ

    시부모님도 아들 둘, 저희도 아들 둘이라… 저는 애들이 결혼하게 되면 시부모님 따라 하려고요
    다른 형제, 다른 며느리 얘기는 절.대. 안하시고, 뭐만 하면 그냥 고맙다고 하시고 다 너네들 덕분이라고 하시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라고, 사는거 다른거 있냐고 말씀하시는게 전부^^

    아버님도 밥상 받고 대접 받는거 질색하시는 성격이시라 어머님도 아버님 아침 안차려드시고, 오히려 아버님이 드시면서 어머님 아침식사까지 준비해놓고 운동 나가셔요
    당연 밥 국 반찬 이런거는 아니고요
    건강식으로 당신만의 요리법이 있으시고 별로 맛있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점에선 저랑 가치관이나 입맛, 성향이 맞아서 저랑 아버님이랑 쿵짝이 잘 맞고 어머님은 제 남편과 비슷해서 모이면 저절로 편이 갈라져요 ㅎㅎ

  • 5. 감사해요
    '22.11.13 8:11 PM (180.70.xxx.42)

    댓글 잘 안쓰는데 글을 읽고나니 가슴이 찡~하면서 뿌듯하면서 기부좋은 글이네요.이런글 나눠 주셔서 고마와요.많이 배우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6. 어른
    '22.11.13 8:34 PM (58.120.xxx.104)

    요즘 제일 관심있는 부분이 어떻게 하면 잘 늙을까.. 이었어요.
    덕분에 좋은 글 담아갑니다.
    종종 시부모님 에피소드 올려주세요^^

  • 7. ..
    '22.11.13 8:34 PM (112.150.xxx.178)

    제목보고 저도 모르게 긴장했었어요
    약간 마음졸이며 읽어내려갔는데 다행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오랜만에 뭉클해지는 글 읽었네요
    좋은 가족이세요
    좋은 부모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합니다.

  • 8. 쓸개코
    '22.11.13 8:50 PM (14.53.xxx.6)

    원글님 감동이에요..
    설령 섭섭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모든 서운함이 사라질만한 귀한 말씀을 해주셨네요.
    글이 그냥 따뜻하고 흐뭇하고 좋아요.

  • 9.
    '22.11.13 8:54 PM (175.223.xxx.155)

    글 감사해요.
    정말 어르신다운 어르신, 그런 어르신 마음 헤아리는 자식,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 10. 현실과마법
    '22.11.13 9:00 PM (112.167.xxx.79)

    글을 너무 잘 쓰시네요. 50중반 어떤 마음으로 나이 들어야 하나 생각이 많았는데 인생 요점 정리 같은 글을 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글 지우지 마세요 보고보고 노력해 볼게요

  • 11. hmmc
    '22.11.13 9:18 PM (49.166.xxx.109)

    참 어른들이시네요
    나이들어 가면서 존경스런 분들 뵙기 힘든데 저도 저렇게 큰나무같은 노인으로 나이들고 싶어요

  • 12. 존경이란..
    '22.11.13 9:24 PM (58.182.xxx.106)

    이글읽으니 이태원에서 희생당한 젊은분들이 생각나서 맘이 아프네요 ㅠ

  • 13. ㅇㅇ
    '22.11.13 10:12 PM (59.13.xxx.45)

    너무 부럽습니다
    저는 양가 어른중 아무도 진짜 어른도 코트도 안계십니다
    제가 그 첫번째 어른이 되어야 한답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제아이도 미국서 공부마치고 사회생활 시작입니다
    아드님 잘 키우셨으니 훌쩍 자라겠지요 응원합니다

  • 14. 초록마니
    '22.11.13 10:36 PM (59.14.xxx.42)

    저는 애들이 결혼하게 되면 시부모님 따라 하려고요
    다른 형제, 다른 며느리 얘기는 절.대. 안하시고, 뭐만 하면 그냥 고맙다고 하시고 다 너네들 덕분이라고 하시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라고, 사는거 다른거 있냐고 말씀하시는게 전부
    22222222222222222

  • 15. 맞아요
    '22.11.13 11:44 PM (61.84.xxx.145)

    가족이란 모름지기 이런 모습이 이상적이죠
    잘 살아오신 결과네요
    저도 그렇게 잘 늙고싶습니다

  • 16. oo
    '22.11.14 1:02 AM (211.110.xxx.44) - 삭제된댓글

    배울 점이 많은
    인품이 성숙된 분들이세요.

    저는 애들이 결혼하게 되면 시부모님 따라 하려고요
    다른 형제, 다른 며느리 얘기는 절.대. 안하시고, 뭐만 하면 그냥 고맙다고 하시고 다 너네들 덕분이라고 하시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라고, 사는거 다른거 있냐고 말씀하시는게 전부 333

  • 17. ㄴㄴ
    '22.11.14 5:03 AM (180.224.xxx.168)

    얼마나 걱정이 되셨으면...
    가족들이 다들 인격이 성숙한 분들이네요
    저런 어른이 되고싶어요

  • 18. ㅇㅇ
    '22.11.14 8:19 AM (59.15.xxx.109)

    글솜씨를 보니 원글님이 무척 지혜롭고 내공이 상당하신 분 같아요. 시부모님도 정말 좋으신 분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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