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9일에 수술을 했다. 산부인과 수술이었고 난소의 물혹이었다.
수술날 아침에 큰언니가 왔다. 남편은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들렀다 갔다. 큰언니와 아이가 따라왔다.
6학년이었던 아들이 침대에 누운채 수술실로 향하는 나에게 엄마 괜찮아. 걱정하지마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술을 한 기억이 몇 번 있었지만 또 새삼스러웠다. 조금 두려웠다.
언니와 아이를 뒤로 한 채 수술실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고 수술환자가 많았다.
대학병원이어서 여러 과의 여러 환자들이 침상에 누운 채 수술을 대기하고 있었다.
수술대기실은 마치 냉장고의 냉동실같아서 아주 싸늘하고 차가웠다.
얼마나 여기에 더 누워 있어야 하는 걸까. 하며 나에 대한 연민과 걱정을 막 시작하려는 찰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네살이나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나는 누워 있어서 그 쪽을 볼 수 없었는데 수술을 대기하는 아이였고 아빠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엄마를 찾고 있었다. 수술을 앞둔 아이는 슬프고도 간절하게 엄마를 찾고 있었다.
왜 애시당초 엄마가 들어오지 않은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친구가 엄마들은 견디기 힘들어해 그런 경우 아빠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젊은 아빠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겠지만 아이의 울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아이가 구슬프게 엄마를 찾고 울고 엄마한테 가자고 열번 정도 말하면 한번 정도 대답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일까. 아이가 엄마한테 가자고 열 번 정도 말하면 그래 가자 하고 한번 정도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내 수술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내 나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도와줄 수 없는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벌떡 일어나서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적극적으로 달래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애끓는 울음소리에 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를 시작했다(종교없음 주의)
하느님. 저 아이가 무슨 수술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수술 잘 되게 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부처님. 저 아이를 도와주세요. 낫게 해 주세요.
삼신할머니. 아이를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길었고 너무 슬펐고 내 기도는 간절해졌다. 아이가 울면 울수록 나는 신이라는 신은
다 불러내서 진심으로 아이를 부탁했다. 그 시간이 길었다. 내가 충분히 진심을 다해 아이를 부탁하고
나자 아이가 나보다 먼저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이가 들어가고 나서 나도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은 깨끗하고 모두들 친절했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 때 알았다. 나는 벌벌 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이를 위해 기도하느라 나는 내 걱정을 하지 않았고
이미 수술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수술대위에 누울 수 있었다. 그 날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나를 부를 때까지 두려움과 걱정 속에 떨며 그 시간을 보내었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도와준 걸까. 아이가 나를 도와주었던 걸까.
살면서 그 생각을 가끔씩 한다.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하거나 누구를 돕는다면 그건 그 사람을 위한다기 보다
나를 위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며 수술 대기실에서 겪었을 두려움을 하나도 겪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아이가 그 날의 나를 도왔다. 그 날 아이의 수술을 잘 되었을까. 지금쯤 건강하게 뛰어다니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