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태풍은 거북이처럼 느린 속도를 가지고 있어서 아주 조금씩 이동하는 모양입니다.
어제 뉴스에서 서귀포 쪽의 피해 상황을 보았는데 그곳은 비가 정말 많이 왔더라구요.
제가 있는 곳은 북쪽이라서 아직 그렇게까지 많은 비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차가 침수된 장면을 보고 있자니 대문밖에 주차해 놓은 제 차가 좀 걱정스러웠습니다.
밤새 비가 많이 쏟아져서 둥실둥실 떠내려 가버리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이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잠들기 전에 창을 열어 차를 살펴보곤 했습니다. 제가 자는 방 창을 열면 그 창 바로 옆에 차가 서있거든요. 그렇게 창을 열었는데 골목 건너편 집의 창에 불이 환하더군요.
새까만 골목 안에서 불 켜진 창을 보니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을 정도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점점 내 몸 옆에 붙여두어야 할 것들이 나이와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저 만해도 돋보기 뿐만 아니라 새벽에 깨었을 때 사용할 인공 눈물과 눈 찜질팩을 잠자리 근처에 두고 자야 합니다.
자다가 깨면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재생하고 눈 찜질팩을 눈에 얹습니다.
그럼 건조한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눈이 시원해지더라구요.
그렇게 또 두 번째 잠을 청하는 겁니다. 요즘엔 대체로 다시 잠에 드는 일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15일 수요일 아침... 늦잠을 잤습니다. 댕댕이도 늦잠을 잤네요. 저를 깨우지 않은 걸 보니까요. 녀석을 밥을 챙겨 주고, 오늘 아침을 뭘 먹나 생각하며 창을 열었습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불고 있지만 빗방울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좀 썰렁하다고 느꼈습니다. 겉옷을 하나 걸치고 댕댕이와 마당에 나갔습니다.
이것 또한 제가 너무나 하고 싶어하는 버킷리스트입니다.
채 잠이 깨지 않은 다소 무참한 얼굴로 잠옷 차림 그대로 마당에 나가 바람을 쐬는 것!
마당에서 바람으로 나에게 남아 있는 잠이 달아나 머릿속이 선명해 지는 바로 그 느낌!
태풍 경로를 보니 이 지역은 오늘 저녁과 내일이 태풍의 절정일 모양이더군요.
마당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를 바닥에 눕히고, 작은 나무 의자들을 현관 안으로 들여 놓았습니다. 강한 바람에 저런 것들이 막 날아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더군요.
오늘 아침은 삶은 계란과 커피 그리고 사과 반쪽으로 정했습니다.
계란을 삶다가 제가 가지고 온 쑥개떡이 생각났습니다.
냉동실에 쟁여져 있던 건데 집에서는 영 먹어지지 않아서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혼자 외롭고 쓸쓸하면 먹어질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곳에 찜기가 없네요. 전자렌지에서는 맛있게 해동되지 않더라구요.
아침부터 분주히 머리를 돌려서 커다란 냄비에 스텐채반을 넣어봅니다.
바닥에서 채반을 좀 더 띄워줘야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대접을 놓고 그 위에 채반을 얹어서 높이를 조절해줬습니다. 커다란 채반에 작은 쑥개떡이 하나 올려집니다.
장비가 어마어마해서 웃음이 나지만, 그래도 제대로 쪄질 것 같습니다.
기어이 보들보들 말랑말랑해진 개떡을 맛있게 먹었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우리 댕댕이는 케이지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케이지를 좋아하던 녀석이 아닌데, 이곳이 낯설어서 일까요?
보이지 않아서 찾아보면 마루 끝에 놓여 있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앉아 있네요.
동물들은 여행의 개념이 없어서 불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불안하고 낯설어도 배변 실수 한 번 안하는 녀석의 성실함에 뽀뽀를 날려줍니다.
가서 뽀뽀해주고 왔어요^^
그래도 제가 함께 있으니 많이 힘들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삼다도...
그러고 보니 제가 신혼여행으로 처음 제주에 왔을 때도 10월이었는데 바람이 어마어마했었네요. 그 때는 바람이 그저 성가스럽기만 했거든요. 그 때 사진을 보면 야외 사진은 제 머리가 꽃만 꼽으면 되는 산발이었답니다.
이렇게 오롯이 앉아 제주의 바람을 보고 느껴보는 여행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태풍이라니....
이번 여행은 제주의 바람을 온몸에 새기고 가게 생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