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가 재판을 받는 기업의 법무팀이 대법원장 공관에 들어와 술·밥을 먹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소설 같은 얘기가 실제 벌어진 건 ‘공사(公私) 구분’을 간단히 마비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김명수 대법원장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피아(彼我) 구분’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며느리가 일하는 한진 법무팀을 ‘우리 편’으로 보고 공관 만찬을 허락했을 가능성이 높단 것이다. 단순 짐작은 아니다.2017년 그가 취임한 직후부터 대법원에선 이상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김 대법원장이 판사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전임 대법원장 때 요직에 있었던 한 판사에게 “너 누구 편이냐”고 물었단 것이다. 비슷한 얘기는 계속 나왔다. 그해 11월 전국 법원 등산대회 때 인사하러 온 한 판사에게 “(당신은) 왕당파 판사 아니냐”고 했고, 이후 한 법원 내부 저녁 자리에선 옆에 앉은 부장판사에게 “이 중에 내 편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외부에서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김 대법원장은 ‘네 편, 내 편’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에 맞춰 행동하는 것 같다는 게 지난 몇 년간 법원을 취재하며 받은 인상이었다.
이 ‘네 편, 내 편’은 그의 내로남불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는 반대편엔 잔인할 만큼 가혹했다. 현 정권 들어 ‘적폐’로 찍혀 수사 받고 재판에 넘겨진 임성근 부장판사는 작년 2월 무죄를 받고 김 대법원장을 찾아가 사표를 냈다. “간이 안 좋고, 신장도 망가져 법관 일을 하기 힘들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은 “사표 수리하면 (여당이 당신) 탄핵을 못한다”며 거절하면서 그에게 병가를 권했다. 그러면서 “죽지 말고”라고 했다. 면담 녹음 파일엔 김 대법원장이 이 말을 하면서 웃는 소리가 담겨 있다.
같은 편엔 달랐다. 그는 2018년 첫 법원행정처 인사에서 ‘인권법 판사 독식’ 우려에도 핵심 보직인 대변인과 기획조정심의관 전원을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들로 채웠다. 주요 재판 대부분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의 원장도 자기 대학 동기인 우리법연구회 판사를 앉혔다가 그 후임엔 자기 지시로 ‘사법 적폐 몰이’를 했던 인권법연구회 판사를 앉혔다. 그는 다른 판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한 인권법연구회 판사에게 “내가 너 챙겨주겠다”고도 했다. 그 판사는 지금 요직에 있다. 네 편엔 잔인하고 내 편엔 맹목적인 것은 그의 인식 속에 ‘네 편, 내 편’이란 틀이 깊고 단단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현 정권이 최우선으로 밀어붙인 ‘적폐 청산’에 제격인 사람이었다. 100명 넘는 ‘적폐 판사’가 징계나 수사를 받고 적잖게 법원을 떠났다. 그사이 판사 사회는 ‘대법원장 편’과 ‘대법원장 반대편’으로 쪼개졌다. 증오로 벌어진 이 상처는 김 대법원장 퇴임 후에도 선명히 남아 법원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