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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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했던 행복했던 순간들 2
조용하고 얌전한 나는 착실하고 성실했고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였어요
5학년때 담임샘은 그런 나를 유독 다른 학생보다 예뻐해주셨고 그림 잘그린다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학기중간쯤 학교에 지금의 방과후 수업 비슷한 수업이 생겼는데
학생들을 위해 학교샘들이 한과목식 맡아 본인의 교실에서 학생들 하교후 수업진행 하는 체계적이지 않고 그냥 일단 해보는 그런수업
그런게 생겼어요
지원자가 많았는데 대부분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학생들 선발이 이뤄졌어요
수업들은 컴퓨터반 동양화반 무용반 암산반 였나?
담임샘의 추천으로 동양화반에 들어간 나는 그때 생에 처음으로
사교육 이란걸 받게 된거죠
각학년에서 3명씩 20명 남짓한 학생들이 모였는데 전부 미술학원 다니던 학생들
처음으로 큰돈들여 좋은 붓 좋은 종이 먹등을 구매했는데 우리집은 가난해 어린 저는 부모님께 그런 도구 사달라는 말을 차마 할수가 없었어요 겨우 5학년짜리 여자아이가 이미 집안사정을 알아도 너무 뻔히 알아 말을 할수 없었죠
그런데 그걸 우리담임샘이 선물이라고 저에게 주셨습니다
너무 아까워 다른 친구들은 한두번 그리고 버리는 화선지를 저는 흰색이 안보일 정도로 덧그리고 덧그리고..그한장의 소중함을 알기에
버리지 못하고 말려서 집에선 흰 공간이 하나 없던 화선지 위에 느낌으로만 또 덧 그리며 연습을 했어요
종이인형을 그리고 만들어 놀던 그때와 다르게 누군가 내 그림을 봐주고 새로운걸 배운다는게 얼마나 재미 있고 행복한 일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출석도 강제도 없던 동양화반 학생들은 눈에 띄게 줄었어요 방학때 선생님이 무심코 지나가며 하셨던 말씀이
교무실에 일주일에 두번씩 와서 그림지도 받으라고..
꽤 멀었던 학교를 방학때면 저는 한번도 안빠지고 일주일에 두번 교무실에 갔지요
동양화반에 결석한번 안하고 다녔던 유일한 학생였던 나는
이제 좀 지치고 열의가 없어진 조금은 귀찮은 존재가 되버린 우리에게 예전만큼의 열의를 주지 않던 선생님의 모습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그걸 애써 모른척 했어요
수업후 가보면 선생님은 거의 자리에 안계셨고 우리끼리 그림 그리다 집에 가면 되는 그런날들이 더 많았죠
어느순간 새로운것을 가르쳐 주지 않고 몇달전 배운걸 계속 반복 그리기만 하고 있고 선생님이 그려주진 그림한장씩 받아 똑같이 그려보기만 무한반복..
이제 남은 친구들은 나랑 동갑 같은학년 4명
우리는 비슷한 처지였어요 미술학원도 안다녀봤고 그림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 미련하고 눈치없는 성실한 친구들
겨울에는 난로도 다 꺼진 텅빈 교실서 선생님도 안계신 오실지 안오실지 모르는 그교실서 우리는 첫수업과 똑같이 담요를 깔고
화선지를 올리고 먹을 갈고 손을 불어 가며 그림을 그렸어요
찬물로 붓을 빨고 먹과 화선지를 정리하고 추위를 견디며 언발을 동동거리면서 똑같은 그림을 그리다 집에 왔지요
그렇게 우리들 동양화반 친구들은 이미 다른 특활반은 다 없어졌는데 동양화반 4명의 친구는 눈치없게 6학년이 되서도 그선생님반 교실에 찾아가 아무런 가르침이 없는 선생님과 상관없이 우리들의 동양화반을 이끌고 있었어요
6학년때 그선생님은 단한번도 우리를 위해 붓을 들지 않으셨고
단한장의 그림든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그선생님교실이
우리 미술반교실이란 생각뿐.
그리고 우리는 그곳 아니면 그림 그릴곳이 없다고 생각했나봐요
종이를 대신 사주는 선생님이 안계셔서 부모님 주신 돈으로 처음 화선지를 산날..저는 수돗가에서 살짝 울었던것 같아요
햇살이 좋았던 5월였나 아님 가을이였나..수둣가로 비치는 햇살이 너무 좋았고 붓을 씻으며 그냥 그순간이 너무 좋은데 부모님이 처음으로 값비싼 재료를 사주신 그날이 더더욱 눈물나게 좋은거예요
그리고 6학년을 마무리하던 시기
우리에게 여러장 그림을 그려주시며 이제 동양화수업은 끝내니
집에서 이그림들을 보고 연습하고 중학교 가서 공부하라고
그렇게 우리는 끝이 났지요
중학생 되기전 겨울방학 동안 나는 선생님이 주신 그림을 200장 넘게 그렸던것 같아요 하루종일 누구도 내 그림을 봐주진 않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그런 내모습이 행복였고 즐거움였고 자랑였고 꿈였나봅니다
1. ㆍㆍ
'20.2.16 10:14 AM (122.35.xxx.170)글을 읽기만 해도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려지네요. 수필집 내셔도 되겠어요.
2. ㅎㅎ
'20.2.16 10:25 AM (175.223.xxx.138)그림그리는 거 좋아하다 고등학교 때 미술해서 미대간 사람이라 그런지 님 글 읽을 때 비슷한 기억들이 소환되네요.
감사합니다. ^^3. 너무
'20.2.16 10:39 AM (121.175.xxx.200)재밌고 정겨워서 "짧지만"으로 검색해서 1편도 보고왔어요.
지금은 가정을 이루셨다면, 자제분들이 너무 행복하게 컸을것 같아요.^^ 기분좋은 일요일 아침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4. 와
'20.2.16 10:39 AM (175.223.xxx.207) - 삭제된댓글한편의단편영화네요 행복하시길빌어요
5. 우와...
'20.2.16 11:07 AM (222.107.xxx.43)이 글 지우지마세요..
많은 고민과 깨달음을 주는 묵직한 내용이 아름답게 묘사되었네요.
무기력한 삶을 살고있는 요즘 저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강력한 동기부여를 주는 글입니다.
아름다운 추억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6. 한국화 하고있는
'20.2.16 11:16 AM (119.71.xxx.190)아이에게 보여줄거예요
지우지 마세요
미술전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줄 알았어요
저희 어릴땐 시켜만줘도 열심히 했던 시절이었죠7. ㅠㅠ
'20.2.16 11:25 AM (119.198.xxx.59)수채화같은 어린날의 동화속 한 장면 같아요.
아이의 맑고 순수하고 깨끗한 동심이 느껴집니다ㅜ
지금의 그때 그 아이인 원글님은 행복하실까. .
오지랖이지만 무척 궁금해집니다8. ..
'20.2.16 12:11 PM (116.34.xxx.62)그 시절 그 감성이 살아나는거 같아요
9. ...
'20.2.16 12:17 PM (27.164.xxx.77) - 삭제된댓글저 40대 중반인데 화선지 그리 비싸지 않았거든요.
나이가 많으신가 봅니다.10. co
'20.2.16 12:23 PM (14.36.xxx.238)원글님 글이 아름다워 연극 대본으로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11. 원글
'20.2.16 12:37 PM (112.154.xxx.39)우리가 사용했던 화선지는 동네문구점에서 판매하는 화선지가 아니였어요
한묶음이 백장였는데 그걸 다시 손으로 일일히 겹치게 둥글게 말아 사용했던
화선지 100장에 80초중반 15000원
붓하나 15000
저에겐 너무너무 비쌌지만 질좋은 진짜 미술재료 같은
그런 미술도구들였죠
동네 문구점에서 판매안해 담당선생님께서 몇달에 한번씩
돈받고 구매해주셨어요
집에서 화선지 펼쳐놓고 한장한장 겹치게 말아 한다발 만들어놓으면 그뭉치만 보고 있어도 행복했어요
우리집 단칸방에 너무 어울리지 않던 그미술재료들이 한편 내 자존심 내자존감을 높여 놓은 소품였다면 저 너무 슬픈건가요?
아직도 그때 사용했던 도구들을 그때 담아 가지고 다녔던 낡은 보조가방에 그대로 담아 작은박스에 넣어 이사때마다 가지고 다녀요
제가 그렸던 그림들들 선생님이 주셨던 견폰필사본은 낡아
간직하지 못한게 아쉬워요
친구들은 동네 화방서 유리액자에 담아 간직 했는데
그 유리액자값이 얼마인질 몰랐으나 저는 그액자 해달라는 말을 부모님께 할수 없었어요
결과는 뻔했을거고 그결과에 실망할 내자신의 슬픔을 미리 차단시켰다 할까요?
그래도 마지막 6학년때 엄마가 어렵게 돈 주시며 사주신 화선지 100장..그감촉 촉감 행복함 잊지못할 평생의 감동으로 남아있어요
부족한 삶에서 한줄기 빚이 주는 희망
그것으로 발전하고 나가가는삶
슬프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삶이라 생각하며 살았나봐요
그어린게 ㅠㅠ 겨우 국민학생 꼬마어린 소녀가12. ..
'20.2.16 12:51 PM (182.19.xxx.7)아름다운 단편소설같아요.
원글님도 댓글님들도 하루하루 행복하기 바래요13. 난봉이
'20.2.16 4:10 PM (14.35.xxx.110)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아내던 빨간 머리 앤도 떠오르고
아름다운 글입니다14. 난봉이
'20.2.16 4:14 PM (14.35.xxx.110)한지혜 작가의 -참 괜찮은 눈이 내린다 ( 내가 살던 골목에는) 이라는 에세이집이 있어요. 원글님 글과 정서가 비슷합니다. 읽어보심 공감하실 거 같아 적어보아요
15. ...
'20.2.16 4:39 PM (67.180.xxx.159)글 지우지마셨으면 좋겠어요.
마응을 울리는 아련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