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종신직으로 죽음이 아니고서는 물러날 수 없는 자리라고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현 프란체스코 교황이 선출될 당시 베네딕토 16세가 노령을 이유로 양위하는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700여년 전에 딱 한번 있었다고는 하지만,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것이죠.
이 영화는 이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영화로, 앤소니 매카른이 쓴 동명의 희곡을 각색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천주교인은 아니나 부처님 오신 날 절에 가고 크리스마스에 명동성당 가서 미사보는 떡신자입니다.
개인적으로 20 여년 전 유럽 여행에서 떡신자의 호기로 날짜와 시간이 맞는 경우, 각 도시의 유명한 성당, 교회에서 예배, 미사를 보기도 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런던 세인트 폴에서의 예배, 바티칸에서의 미사였습니다.
일상 회화도 시원치 않은 실력이라 예배의 언어들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거의 눈치껏 대충대충 앉았다 일어섰다 성경을 들췄다 성가를 흥얼거리다 꽤 긴 시간동안 지루하게 앉아있었답니다.
로마 체류기간이 제법 길어서 이미 바티칸을 한번 다녀온 후에 맞이한 일요일에 불현듯 바티칸 미사는 어떨까 궁금해서 계획없이 갔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그 미사는 새로이 사제를 임명(? 무슨 용어가 있는데, 신자가 아니라 죄송....)하는 행사가 있어서 교황께서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라틴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어차피 못알아들을 미사였지만, 그래도...
물론 구름같은 인파때문에 쩌~ 멀리서 제단과 의자에 앉은 교황님을 볼 수 있을 뿐이었지만, 친견할 수는 있었습니다.
신자님들께는 불경스럽고 불편할 수 있겠으나, 신도가 아닌 일반인인 제게 그날의 미사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교황님은 요한 바오로 2세
이 영화의 한 주인공인 베네딕토 16세의 바로 앞 교황이셨습니다.
이미 노구를 감당할 수 없을만큼 노령이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당신의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상태였기에 의자에 기대어 거의 널부러진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고, 교황께서 꼭 해야하는 말만 몇마디 하시는데도 그 음성이 너무나 힘들게 들렸습니다.
그날 제 느낌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저건 그냥 노인 학대다. 자신의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노인에게 저 많은 절차와 의례, 의무를 짐지우다니...
아마도 저는 신자가 아니라 교황이 아닌 인간의 모습만 보았기 때문일테지만, 전 그 충격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께서 양위한다는 뉴스에 정말 '인간적으로' 합리적이고 다행스런 결정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교황이란 위치는 전세계 어느 국가의 원수보다도 정치적인 자리이면서도 성과 속을 조율해야하는 어려운 자리이자, 현재 카톨릭이 갖고 있는 내부적인 여러 문제제기에 대해 합리적인 처신을 해야하는 자리인데, 자신의 노구조차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자가 어찌 예리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기다리는 여러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고 전세계 신자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율할 수 있겠는가 싶거든요.
가장 보수적이라고들 했던 베네딕토 16세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보다 일을 잘 할 수 있는 건강한 다른 사람에게 양위하는 것만으로도 카톨릭 개혁의 큰 위업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신자도 아닌 제 사견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 베네딕토 교황이 추기경을 사직하겠다고 온 베르골리오 추기경(현 프란체스코 교황)을 만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두 수장은 취향도 성향도 행동도 정말 정반대입니다.
영화는 후반으로 가면서 두 교황의 인간적인 고통에 대해 한걸음씩 들어갑니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의 백미를 보여줍니다.
신일 수 없는 인간이 종교 안에서 갖는, 게다가 교황이라는 위치에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도 나눌 수도 없는 고뇌와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신의 대리인, 전달자가 아닌 인간이어서 가질 수 밖에 없는 면모가 비신자인 제게도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작은 코미디적으로 유머러스하게 시작하였으나, 피해갈 수 없이 고통스럽고 진지하게 몰입하게 합니다.
시나리오와 연출도 멋지지만, 이걸 구현해낸 두 주인공의 연기를 빼놓고 갈 수 없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을 맡은 조너선 프라이스, 베네딕토 16세를 맡은 앤소니 홉킨스 두 배우 모두 팽팽한 긴장감과 유연함을 능숙하게 조율합니다.
'아이리시 맨'과 '두 교황'을 보고 나서 넷플릭스가 큰일 했구나 싶습니다.
이젠 더이상 불러주지 않기도 하고 연기를 감당하기 힘들어진 왕년의 명배우들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화를 기획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궁디를 팡팡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명배우들의 마지막 연기들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이런 기회가 주어지고 그래서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은 수익을 넘어서 영화세상에 한가지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시는 분들께 이 영화와 함께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신의 은총으로'라는 작품을 같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판 '스포트라이트'라고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 카톨릭 사제의 소아성추행 사건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입니다. 다큐로 만들려다가 실제 인물들이 '스포트라이트'같은 극영화를 원한다 해서 바꿔 만든 영화라고 하더군요.
'두 교황'과 전혀 다른 관점과 소재를 다룬 영화지만, 카톨릭 내부의 개혁이 어떤 상태인지 비교하기 좋은 영화입니다.
현 프란체스코 교황은 개혁적 이미지로 천주교 신자들의 동성애, 이혼 등등의 현실 생활에서 충돌하는 교리를 현재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제들의 성범죄와 관련된 해결에 대한 압박도 받고 있는 상태고요.
'신의 은총으로'는 이런 교회 내부의 심각한 문제에도 굳건히 변하지 않는 거대 조직과 싸우는 과정을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줍니다. 현재 진행형이라 함은 현 교황의 스탠스도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들께서는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비신자인 저는 아직도 교황청이 미디어 플레이에 매우 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고 아직까지 우호적이기보다 중립적인 시선으로 카톨릭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내부 신자의 신앙적 단속 뿐만 아니라 새 신자의 확장의 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일텐데, 저는 비록 영화를 통해서라도 입장을 정리할 기회를 가져서 참으로 고마운 영화입니다.
각설하고...
이 영화는 이 영화 자체로 좋은 영화입니다
포스터로 떠올릴 수 있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차분하고 성찰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될만한 영화입니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 한번쯤 보시면 좋을 영화입니다.
넷플릭스가 언제고 여러분께 보여줄 것입니다
이 영화는 각색상, 남주(조너선 프라이스), 남조(앤소니 홉킨스) 부문에 오스카 지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