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Banner

역사학자 전우용님 페북1 (이영훈씨에 대한 15년 전 반박 글 )

... 조회수 : 1,063
작성일 : 2019-07-23 12:00:36
15년 전 TV에서 이영훈씨가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발언하는 걸 보고 화를 참을 수 없어 썼던 글 일부를 다시 올립니다. 페북용으로는 너무 길어서 일부를 다시 둘로 나누어 올립니다. 일단 기득권 세력이 되거나 그와 한패가 되면, '억울해도 항변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능력이 사라집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거나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을 정도로 인간이 뻔뻔해지는 건, '지적 능력'의 일부가 부패해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

1. '체험의 기록과 반성의 한계' 중.

1985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야만적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1986년 서울대 출신 여성노동자 권인숙이 부천경찰서에서 문귀동이라는 형사에게 차마 밝힐 수 없는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도 모두가 아는 일이다. 이들 사건이 이미 집단적 기억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제 결정적 ‘증거’는 없다. 가해자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피해자의 진술 외에 문서상의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작성되지 않았다. ‘문서화된 자료’만을 유일한 증거로 받아들일 경우, 이 사건은 ‘가공된 사건’이거나 기껏해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자행한 이런 류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사건에 관련된 양측의 엇갈린 ‘주장’을 듣는 것만으로는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고문사실을 부정하는 여러 명의 가해자와 고문피해를 호소하는 단 한 명의 피해자 사이에서 수량적 형평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사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상황’에까지 눈을 돌려야 한다. 상황은 집단적 체험을 유발하고, 집단적 체험과 기억은 다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1970 ․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일상에서 수시로 국가보안법과 마주쳐야 했다. ‘박정희는 김일성보다 더 나쁘다’는 말이 ‘김일성을 고무 찬양했다’는 죄로 둔갑하는 지독한 역설의 세계 속에서 살았고, 누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 시대를 김근태 ․ 권인숙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를 접하지 않고도 쉽게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있는 자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자의 체험과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도 권인숙을 ‘성조차 혁명의 도구로 삼은 좌경용공분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좌경용공세력’이나 그로 의심되는 자에게는 고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상당히 많다. 문제는 어떤 상황인식 위에서 사건을 바라보느냐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완전히 중립적인 영역에서 사실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솔직히 고백해라’ 밖에 없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이 사실관계를 누락없이 고백한다고 해도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적 차원의 반성만을 증빙자료로 삼는다면 사실 관계가 완전히 왜곡될 수 있다.

나는 아직껏 공개적으로 반성하거나 사과한 고문경찰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설령 이들이 반성하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 반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사실관계 전체를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이 안될 것이라 본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중정 직원이나 경찰 간부에게 직접 고문을 지시했을 리는 없다. 경찰청장이나 치안본부장이 고문하라는 공문을 보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고문 경찰들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기껏 “고문은 했지만, 상부의 지시는 없었다”는 내용뿐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그런 일을 ‘직접’, ‘구체적으로’, ‘문서를 통해’ 지시하겠는가. 고문 경찰들에게도 고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하게 할 것인가 적당히 할 것인가를 선택할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록, 고문경찰을 포상하고 고문하지 않는 경찰을 징계한 ‘권력’의 책임은 은폐되고, 책임 한계는 그들 내부에 국한된다. 국가권력은 ‘경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간접적 책임만 지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관련자들의 ‘성찰적 고백’도 사실 관계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 군부나 조선총독부가 ‘종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증거자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의욕적인 연구자들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명백하고도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만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위안부 모집 방법이라든가 모집 대상이라든가 하는 문제에까지 시시콜콜 개입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다만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자행된 취업사기와 강제 연행, 개인적 보복 등을 모른 체 해 주면 되었다. ‘위안부’를 모집한 자들이나 ‘위안소’를 찾은 병사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내용도 거기에 국한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인들 사이에서 도덕성 회복의 열풍이 불어 ‘성찰적 고백’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해도 일본군이나 조선총독부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명백한 ‘증거’는 아마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물어야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처한 ‘총체적 상황’에 대한 집단적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집단적 체험의 기억은 ‘민족’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가상의 기억’이 결코 아니다. 학대와 차별, 학살과 수탈이 ‘민족’을 경계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형성된 집단적 기억이다. 그 민족의 ‘경계 밖’에 있었던 자들 - 일본인과 이른바 ‘민족반역자들’ - 은 결코 공유할 수 없었던 기억이다.

https://www.facebook.com/100001868961823/posts/2877680352304235/
IP : 218.236.xxx.162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정말
    '19.7.23 12:59 PM (58.120.xxx.54)

    좋은 글 이네요.

  • 2. 그렇죠
    '19.7.23 1:17 PM (218.236.xxx.162)

    어제 스트레이트에 이영훈씨 예전 백분토론 나와서 했던 발언, 문제가 되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할머님들께 찾아가 사죄하던 모습 그리고 요즘 발언들 보여주는데 화나더라고요
    그에 대한 반박글 저도 잘 봤고 조금있다 2편도 올릴게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954715 50대 동창들과 싱가포르 여행팁좀 주세요^^ 16 여행 2019/07/24 3,406
954714 일본 의존도가 높은 상품 BEST 4 5 끝까지가자 2019/07/24 3,915
954713 귀 뒤를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거 같아요 7 2019/07/24 2,322
954712 원래 일본여행, 일제 불매하신 분 계신가요? 31 ..... 2019/07/24 1,578
954711 오드리햅번 치아에 관하여.. 3 ... 2019/07/24 2,769
954710 40대 초반인데 무릎 관절염이랬는데.. 4 아이구 2019/07/24 2,543
954709 진짜 사람같은 강아지 12 s 2019/07/24 2,767
954708 일본은 삼성갤럭시 살바에 화웨이를 사는군요 6 니뽄 2019/07/24 833
954707 동서횡단철도(울진-서산)는 언제 개통예정될까요? 2 노벰버11 2019/07/24 610
954706 GS25 맥주행사 일본 제품 배제 2 대박 2019/07/24 1,130
954705 제가 쿠팡에서 제품 구매를 하지 않는 이유 31 극일로 가자.. 2019/07/24 5,007
954704 과외 오티시 수업료 드려야하나요? 8 satell.. 2019/07/24 1,459
954703 결혼 왜 하셨어요? 17 결혼 2019/07/24 3,788
954702 82쿡님들 남매. 자매들도 싸우다가 뒤돌아서면 까먹는편인가요 .. 3 ... 2019/07/24 959
954701 코엑스 수시박람회요 3 . . . 2019/07/24 944
954700 회사생활할때 갈등이 생기면 사람들한테 나의 억울함을 두루 알리는.. 4 회사생활할때.. 2019/07/24 1,476
954699 친구와 피아노학원 같이 다니는게 좋을까요? 8 궁금 2019/07/24 1,156
954698 온라인몰에 파는 즙 종류 믿을 수 있나요? 3 건강 2019/07/24 1,004
954697 역사학자 전우용님 페북 (지식인의 반응) 3 ... 2019/07/24 696
954696 뭐든 긍정의 말로 바꿔 드립니다. 26 긍정요정 2019/07/24 1,340
954695 "후쿠시마 '검은 피라미드' 근처 쌀로 올림픽? 말이 .. 1 ㅇㅇㅇ 2019/07/24 782
954694 (KBS 국권침탈 100년 특별기획) 한국과 일본 5부작 같이 봐요 2019/07/24 419
954693 갑자기 대뜸 아들낳으라는 시부 17 ㅡㅡ 2019/07/24 4,977
954692 이상민 피소 13억원대 편취 vs 사실무근·무고 맞고소[전문] 4 ........ 2019/07/24 3,301
954691 마트 문화센터 어때요? (그림, 요리, 운동) 2 ... 2019/07/24 1,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