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들은 TV산업에서 새로 관심을 끈 협송(narrowcasting)의 이점을 이용했다. '협송'은 가치관이나 관심이 다양한 시청자들을 취향에 따라 분류해서 그들에게 맞는 콘텐츠를 방송하는 일종의 맞춤형 방송이다. 당시는 '협송'의 효과를 인정받던 때였다. 시청자의 충성도가 시청자의 수(數)보다 더 중요하다는 평가였다. 전국종교방송협회(National Religious Broadcasters) 내의 조직인 종교우익방송(Religious Right Broadcasters) 네트워크는 재빨리 지방TV방송국을 매입하고 신디케이트 프로그램을 새로 등장한 케이블과 위성 체제를 통해서 방송하기 시작했다.
종교방송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정치문제보다 문화에 치중한 차이는 있었지만 종교 라디오 방송은 이미 30년대부터 있어 왔다. 텔레비전 방송도 1950년대에 ABC 텔레비전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30분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래함 목사는 그 시간을 그의 근본주의 기독교 교리를 전도하고 공산주의를 때리는 데 이용했다. 근본주의 목사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지방 기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종교방송을 통해 많은 청중들에게 기독교 근본주의를 전파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공격했다.
이들 목사 중에는 이념적으로 극단적이고 정치적 편견이 강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빌리 제임스 하기스(Hargis) 목사는 공산주의자, 리버럴, 동성애자들 그리고 언론을 심하게 공격했다. 하기스는 전국 270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자유주의자, 복지주의 옹호자, 사회개혁론자, 국제주의자들"을 "최대 반역자들"이라고 규탄했다. (그는 1976년 섹스 스캔들로 목사직을 잃었다.)
1970년대에 새로운 것은 종교와 당파적 정치가 결합한 것이었다. 보수 전략의 결과였다. 웨이리치는 팻 로벗슨(Pat Robertson) 제리 폴웰(Jerry Falwell) 같은 근본주의 복음교회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종교를 공화당에 유리하게 정치화하면서 엄청난 돈도 모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TV화면에 비치는 정치는 빛의 세력과 암흑 세력의 투쟁이었다. 모든 나쁜 생각, 부당한 행동은 '적'의 소행이었다. 진보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옳은 것은 보수 우익이었다.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이었다. 정치적 보수와 종교적 우익이 결합할 수 있는 토양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리버럴 미디어'를 악마 취급하는 것은 종교방송 목사들의 공통 메뉴였다. 트리니티 방송 네트워크(Trinity Broadcasting Network)의 <주님을 찬양하라(Praise the Lord)> 쇼에서 도우그 클라크(Doug Clark) 목사는 로날드 레이건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를 "미국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라고 힐난하고 "나는 우리의 (언론)자유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기독교 방송들은 (레이건이 불법 개입한) '이란-콘트라 게이트'가 리버럴 미디어의 '음모'라는 픽션을 퍼트렸다. 더 심각한 것은 많은 기독교 행동파들이 '리버럴 미디어'를 비판할 때 미디어가 근본주의 기독교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세속적 역할을 한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측근이며 부시가 "온정 보수주의의 지도적 사상가"라고 칭찬하는 마빈 올라스키는 "비기독교인들이 신문을 거의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한탄했다. 기독교 우익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하는 발언들이다.
폴 웨이리치는 1978-80년 2년 기간 중에 25개 우익 싱크탱크와 후원 단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비밀 라이브러리 코트(Library Court) 그룹을 워싱턴에서 2주일에 한번 정도 소집해서 종교방송에서 내보낼 메시지를 재조정하는 작업을 했다. 이 회의에서 1976년 대선 때는 지미 카터를 지지했던 많은 남(南)침례교회 방송이 정치 노선을 재조정했다. 1979년 웨이리치는 새로 활동하기 시작한 기독교 우익을 위해 "미국을 기독교화 하고, 성경을 정치적 콘텍스트에서 전파하는 방법을 토의했다". 웨이리치는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1980년 대선 때 "1만 명 이상의 목사들"을 만나, TV방송 사회자는 후보를 지지할 수 없다는 연방통신위원회의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 레이건을 지지하고 카터를 반대할 방법에 관해서 '기술적인' 이야기를 나눴음을 시인했다. 웨이리치는 이러한 노력이 수백만의 근본주의 기독교 유권자의 투표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