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씨와 CJ 임원 임대차 계약… “계약서상 김씨 번호로 전화하니 SK 직원이 받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소유의 집이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제이하우스. © 시사저널 임준선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내연녀 김 아무개씨가 한때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소유했다는 의혹을 받은 한남동 고급빌라(약 70평 규모)에 약 2년간 월세(월 300만원)로 거주했던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 결과 확인됐다. 김씨는 2012년 7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김씨 명의로 임대차 계약을 하고 이 집에 월세로 거주했는데, 계약이 만료되기 두 달 전인 2013년 10월 최회장은 같은 빌라 내에 있는 다른 ‘호’를 구입했다. 즉 김씨는 같은 빌라 1층을 임대해 살다가, 최 회장이 집을 구입한 후에 3층으로 옮겨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씨의 계약과 관련된 일체의 관리를 김씨 본인이 아닌 SK그룹 직원이 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실제로 검찰은 2013년 CJ그룹 수사 당시 김씨와 CJ그룹 측이 맺은 임대차 계약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계약서에 기재돼 있는 김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김씨가 아닌 SK그룹 직원이 이 전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SK그룹이 “최 회장이 빌라를 구입한 것은 김씨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해명한 것을 정면으로 뒤집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 회장이 수감 중에도 회사 관련 임직원들을 사적으로 동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한남동 고급빌라 관련 의혹은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그는 2015년 12월29일 미주 한인 언론인 ‘선데이저널’에 특별기고한 기사에서 “수감 중이던 최 회장이 2013년 10월 김씨를 위한 고급빌라를 서울 한남동에 마련했다”고 처음 주장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SK 측은 “SK텔레콤이 임차해서 해외 손님 숙소 등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임차 기간이 끝나고 동창생이 최 회장한테 구매를 부탁해 사게 된 것”이라며 “최 회장은 당초 그곳에 살 생각이었는데 언론에 알려지면서 파파라치 등이 자주 나타나 그냥 빈집으로 두게 됐다”고 말했다. SK 관계자는 또한 “현재 가끔 업무용 등으로 쓰고 있으며 내연녀 김씨는 이 빌라가 아닌 한남동 다른 곳에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면서 “일부 언론에서 이 빌라가 그 아파트 아니냐며 최 회장이 사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SK 측의 해명대로라면 최 회장이 고급빌라를 구매한 것은 김씨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씨는 최 회장이 빌라를 구입하기 전까지 같은 빌라의 밑층에서 약 2년간 월세로 살았다. 최 회장이 구입한 집은 한남동 유엔빌리지 내에 있는 제이하우스 3층 ○호이며, 김씨는 제이하우스 1층 ○호에 2년 가까이 임대로 살았다. 1층 ○호는 CJ E&M 하대중 전 고문이 소유했던 집으로, 한때 CJ그룹 이재현 회장(현재 수감 중)의 차명 소유 의혹이 불거졌던 문제의 그 집이었다. 결국 최 회장은 김씨가 임대해 살던 집의 2개층 윗집을 구매한 것이어서, 회사 측의 필요에 의해 임차해서 사용하다가 나중에 이를 구매했다는 SK 측의 주장은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김씨가 살던 집의 2개층 윗집을 최 회장이 의도적으로 구입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김씨가 임차해 거주했던 집은 약 230㎡(70평) 규모로, 김씨는 매달 300만원의 월세를 내고 살았다. 이는 유엔빌리지 내 비슷한 평수의 임차비용보다 상당히 낮은 가격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가 임차해 살았던 사실은 CJ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연히 드러났다. 국세청은 2014년 3월 증여세 포탈 혐의로 하대중 전 고문을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국세청은 하 전 고문이 지난 2009년 이 회장으로부터 제이하우스 내 한 호를 받으면서 증여세 20억원을 포탈했다고 판단했다. 검찰 수사에서 이 집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를 놓고 검찰과 CJ 측이 공방을 벌였다.
계열사에서 선지급 명목으로 497억원을 빼돌리고 비자금 139억5000만원을 조성해 개인 용도로 사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SK 최태원 회장이 2013년 1월31일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같은 빌라 밑층에서 2년간 월세로 살아
당시 검찰은 이 회장이 회사 돈을 횡령해 이 빌라를 사들였고, 이를 차명화하기 위해 하 전 고문에게 넘겼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CJ 측은 “빌라는 30여 년간 CJ를 위해 근무해왔고 지주사 사장까지 지낸 하 전 고문에게 인센티브 명목으로 지급한 급여”라고 반박했다. 이에 검찰 측은 “하 전 고문의 빌라 구입은 개인이 아니라 CJ 관재팀에서 진행했다. 하 전 고문이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한남동 빌라에 대한 소유권 포기서를 작성했다고 진술했으며, 빌라 대금이 곧바로 이 회장에게로 빠져나간 점을 볼 때 이 자금은 이 회장 개인 용도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하 전 고문 측에서 검찰 측에 소명 자료로 내민 것이 바로 최 회장의 내연녀 김씨와 자신이 맺은 임대계약서였다. 하전 고문 측은 두 사람 간에 맺은 월세 계약서를 통해 실소유주가 자신이라고 고백했다. 검찰도 이를 받아들여 증여세 포탈 부분에서는 하 전 고문을 불기소했다.
하지만 수사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이 회장이 차명으로 소유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집에 당시 30대 중반의 여성(김씨)과 어린 아이가 살자 엉뚱하게도 이 여성이 이 회장의 내연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수사 과정에서 임대계약서 작성 과정이 소명되면서 이러한 소문도 가라앉았다. 이에 대해 CJ 관계자는 “하 전 고문이 살다가 딱 한 번 김씨에게 임대를 직접 줬고, 임대계약서는 김씨의 동생이라는 여자가 와서 작성했다”며 “두 사람 간의 월세 계약서를 검찰에 제출하면서 차명 의혹을 벗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사는 “검찰이 임대차 계약서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니 김씨가 아닌 SK직원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는 김씨와 관련된 일에 SK그룹 직원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SK “한남동 빌라, 내연녀 위한 것 아니다”
이번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커밍아웃’은 한국 재벌들의 도덕적 해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게 됐다. 대기업 총수가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개인적 치부를 공개한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 지분 중 5%도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진 오너 일가가 회사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구조적 후진성이 이번 파문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사실 대중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불륜’ ‘혼외자’ 등 최 회장 개인과 관련된 ‘스캔들’에 더욱 관심을 보이지만, 더 큰 문제는 후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SK는 회장 한 사람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90%가 넘는 일반 주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최 회장이 커밍아웃한 날인 2015년 12월29일에는 지주사인 ㈜SK의 주가가 5% 가까이 떨어졌고,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의 주가도 비슷한 낙폭을 보였다. 전체 주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총수 한 사람으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사건은 회사를 마치 자신만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재벌들의 ‘구태(舊態)의 전형’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회장 개인의 일에 그룹 직원들이 동원된 것이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최태원 회장이 개인의 잘못된 행동으로 회사를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최 회장이 2011년 검찰수사를 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무속인 한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2008년 ‘베넥스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에 계열사 자금을 임의로 넣었는데, 자금을 넣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SK해운 고문까지 지냈던 김원홍씨다. 무속인 출신으로 알려진 그를 전적으로 믿었던 최 회장은 그의 조언에 따라 공금을 임의로 사용했다. 2014년 최 회장에 대한 법원 판결문을 보면, 최 회장이 무속인의 말만 믿고 얼마나 회사를 방만하게 운영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최 회장에게 “무속인 출신 김씨의 말만 믿고 일확천금 획득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사회적 책임과 윤리가 중요한 기업에 대한 신뢰를 저해하고 경제의 근간을 흔들어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사실 SK는 그룹 내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뿐만 아니라, ‘무슨 일만 생기면 위원회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사안별로 위원회 내지는 TF팀을 잘 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시스템화 돼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도 오너 한 사람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 바로 SK그룹 경영 시스템의 한계였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최 회장이 검찰수사를 받는 몇 년 동안 그룹 대관(對官)팀과 법무팀, 정보팀, 홍보팀 등 회장실 관련 조직들은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해당업무를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 회장의 ‘커밍아웃’으로 인해 그룹이 다시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최 회장 한 사람을 위해 일하다시피 한 임직원들 역시 다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최근 SK내부에서 은밀하게 움직였던 최재원 부회장의 가석방 노력도 사실상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오너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회사들이 위기 때에 어떻게 되는지 이번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스캔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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