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두 딸이 사는 가정에서 엄마가 죽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조문객들 중 먼 친척벌 쯤 되는 남자가 방문했다. 그는 매우 미남이었다. 하지만 많은 조문객들 중 한 명이였고 서로 슬픔을 위로하는 분위기에서 대수롭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날 밤 동생은 언니를 죽이는 꿈을 꾸었고 그녀는 불길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만약 이 꿈을 "그 남자를 다시 보기 위해 또 다른 장례식을 필요로 한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 라 분석한다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수 있겠다.
뜬금없이 별로 좋아보이지도 않는 커피숍에 자신을 끌고 들어간 친구는, 왠지모를 좋은 분위기라며 아늑하고 창밖 풍경도 좋지 않냐고 말한다. 친구의 눈동자가 말쑥하게 핸썸한 빠텐더를 몇번이나 향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당신은 그녀의 동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 저 남자 때문이지?" 라고 궁예질이라도 했다간 무슨 되도 않는 얘기냐고 되려 면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이 왠지모를 좋은 분위기라는 느낌이 무의식의 영역이라면 말이다. 순간 둘은 전혀 다른 "진실" 을 보고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셈이다. 따라서 이 두 세계를 굳이 하나로 합쳐내려 한다면 누군가는 머리끄댕이를 잡혀야 한다.
늘 자기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훌륭하다는 걸 굳이 인정해달라 요구하는 건 오히려 자신 내면의 공허함을 증명하는 일 일뿐" 임을 의식의 차원에서 알았다고 하자. 그가 굳이 자신의 의식을 상대와 공유하려 한다면 마찬가지의 일을 겪을 것이다. 당사자는 자랑이 아닌 있는 사실을 얘기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다들 자기자랑하며 살고 있는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당신은 남을 깎아내리는 못된 버릇을 가진 사람이 된다.
개인마다 의식영역의 깊이가 다르다. 때문에 조금 더 무의식적으로 사는 사람과 조금 더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은 각자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 역시 다르게 느낄 수 밖에 없다. 내 의식이 어디까지 바라볼 수 있느냐는 내가 어느 세계와 공명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무의식과 의식의 차이는 사람들에게 삶의 선택권을 좌우하는 역할도 한다. 당신이 만약 누군가로부터 비아냥이나 욕설을 듣고 자동반사적으로 '분노' 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욕설' 이라는 '현상' 을 '인식' 함과 동시에 곧장 '분노' 라는 '반응' 으로 휩쓸렸다는 뜻이다. '인식' 과 '반응' 사이에 멈춰서 다른 선택을 살펴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건 이미 오래토록 습관화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사고와 감정이란 급류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버린 까닭이다. 어쩌면 곧 또다시 분노에 휩쓸리고 만 자신을 후회하거나 자책하고 지기비하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이런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 상대의 잘못을 더욱 강력하고 교묘하게 주장할 필요를 느낄지도 모른다. "나의 분노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건 정당해!".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당신을 뒤흔드는 군상들은 불쑥불쑥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당신의 사소한 잘못에도 이때다 싶어 크게 화를 낸다. 당신을 기죽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더욱 사납게 보이려 신경질적으로 쏘아 붙이는 사람도 있다. 당신의 선량함을 이용해 부당한 일을 반복적으로 뒤집어 씌우고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과 그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찾아 괴롭히는게 즐거운 사람들, 호전적인 성격탓에 억지로라도 적을 만들어 싸움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자신들의 무리에 가담치 않는다고 떼를 지어 욕하며 결속력을 다지는 사람들.. 가히 이 정도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착하게 살라 말하는 이에게, "나에게 착한사람 코스프레를 강요시키고 자신은 이득을 챙기겠다는 속셈인가" 의심해 봄직도 하다. "화내지마, 분노하지마, 넌 착하잖아, 너가 오해 한 거라니까, 난 몰랐어, 나도 피해자야" 따위의 대사들 뒤에 숨어서 말이다.
이쯤되면 누구나 사람들은 어째서 "옳지 않음" 에 대한 개념이 없단 말인가 분통을 터트릴 만도 하다. 하지만 의식수준이 서로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수준에서의 "옳고 그름" 을 들이대어 논하려 한다는 거 자체가 국화에게 너는 왜 장미가 아니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오히려 네 몸에 가시들이 더 흉칙하단 소릴듣고 부들부들 떨어야 할 것이다. 커피숍에 끌고간 친구에게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들먹이거나 자랑밖에 모르는 친구에게 아들러의 권력 이론을 들먹이는 꼴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 변하는게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변한다. 당신이 그렇게 성장해 온 것처럼.
그러니 내 궁예질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고 싶다면 그건 당신이 누구에게 질문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옳다 말한다면 그것이 옳은게 아니라 답한 이가 당신과 의식깊이가 비슷하다는 뜻일 뿐이다. 각자가 느끼는 세계, 각자가 마주하는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내 감수성 내 느낌이 맞다 그러므로 난 예리하고 똑똑하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따위의 논리귀결을 얻고 싶다면 당신이 옳다 말하는 딱 그 사람에게 까지만 질문을 하는게 좋겠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다수의 옳음을 내세워 결국 내 말이 맞지 않느냐는 주장은 전형적인 한국식 패거리문화에 일조하는 셈이다.
의식의 영역을 넓히는 건 무의식이라는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켜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꼭꼭 숨겨진 속물근성들이 하나씩 발견 될 때마다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도록 용기를 붇돋아야 하고 내가 세운 목표들이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함이라는 유아적 단계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기라도 한다면 "그건 나만 그런게 아니야 다들 그렇다고" 따위의 변명 앞에 "다른 사람들을 네 합리화에 끌어들이지 말라" 고 차갑게 대꾸할 줄도 알아야 한다. -- 뒷부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