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냉전 안보 전략에 따라 한국 농촌지역 공산주의차단을 위한 주민감시체제로 가동된 운동
동네마다 반상회라는것도 있었는데.. 민주정부 지나면서 없어졌죠.
허은 고려대 교수 논문서 밝혀
동아시아 농촌 장악 중대 문제로
전략촌 ‘대공 새마을’ 전국 건설
최종결과는 지역민 상호감시 구축
동아시아 농촌 장악 중대 문제로
전략촌 ‘대공 새마을’ 전국 건설
최종결과는 지역민 상호감시 구축
1950년대 미국의 대외활동본부(FOA)와 국제협조처(ICA)는 동남아시아의 농촌개발 경험을 교류하도록 지원했다. 1958년 미국 국제협조처의 지원 아래 필리핀과 한국이 지역개발 참조를 위해 상호방문하고, 1962년 한국 군사시찰단이 남베트남의 전략촌 건설을 시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그러나 지역행정체계를 이미 갖추고 있었던 한국은 새로운 곳으로 주민들을 재정착시킨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부락 자체를 ‘대공 새마을’로 전환했다. 1960년대 말부터 전국 안보취약지구에 ‘전략촌’을 건설하고 반공사상이 투철한 제대장병들에게 국유지를 배분하고 방어임무까지 맡기는 방식이었다. 논문의 ‘괴산군 대공 전략촌 설치운영실적’을 보면, 1969년 9개 부락에 머물렀던 전략촌이 1971년 58개 마을로 늘었다. 한국식 전략촌인 ‘대공 새마을’ 건설은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전개돼 물적지원, 반공계몽교육, 감시체계의 기반을 구축했다. 새마을지도자, 이·동장은 ‘개발의 핵’이자 ‘안보의 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