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 영국 런던에서 18살 흑인 청년 스티븐 로런스가 일군의 백인 불량배들에게 살해됐다. 인종 혐오 범죄의 정황이 짙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의문 투성이였다. 용의자를 지목하는 많은 제보가 답지했지만 2주가 지나도록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수사를 담당한 경찰 조직 자체가 인종차별주의에 젖어 있었다. 어떤 경찰관은 한 용의자의 아버지인 마약상으로부터 뇌물을 상납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심지어 정보과 형사를 동원해 유족들을 사찰하고, 유족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공작도 벌였다. 검찰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며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유족들이 나서 5명의 용의자를 기소했지만(영국에서는 피해자도 기소권을 갖는다), 경찰의 부실한 수사 결과를 뒤집지 못해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하지만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각계의 지원도 이어졌다. 결국 1998년 내무장관의 지시로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조사 책임자의 이름을 딴 맥퍼슨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경찰 수사가 총체적 부실·부패와 인종차별로 얼룩졌음을 밝히면서, 정의 실현을 위해 ‘이중위험 금지 원칙’(Double Jeopardy)을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혐의로 다시 재판을 받게 해선 안된다는 이 원칙이 유지되는 한, 이미 무죄를 선고받은 로런스 사건 용의자들을 다시 단죄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위험 금지는 무려 천년을 이어온 영국법(Common Law)의 대원칙이었다. 이를 깨버리자는 대담한 제안에 영국 사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영국 의회는 살인·성폭행·유괴·마약 등 중대 범죄에 대해 이중위험 금지 원칙을 폐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2005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이 법은 이름도 ‘형사정의법’(Criminal Justice Act)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이중위험 금지와 비슷한 일사부재리 원칙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헌법을 바꾸는 정도의 사법체계상 대격변이었다. 경찰은 재수사에 착수해 2명의 용의자 옷에서 로런스의 혈흔 등을 발견했다. 2011년 이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18년 만에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과 이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 국가의 치부를 바로잡기 위해 개헌 수준의 결단을 내린 영국 사회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00명이 넘는 무고한 죽음과 국가의 총체적 무능이라는 참사를 겪고도,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 안전한 나라를 만들자는 유족들의 특별법 제정 요구가 외면당하고 있다. 새누리당과 일부 보수진영은 고작 ‘사법체계를 흔든다’는 핑계나 대고 있다. 그나마도 그릇된 핑계들이다.
2. 세월호 진상조사위에 수사·기소권을 주는 것은 위헌 문제가 있는 것도, 사법체계를 흔드는 것도 아니다.
검사의 권한인 수사·기소권을 민간인에게 주는 게 문제라고 하는데, 이런 논리를 펴는 이들은 이미 도입·정착된 특별검사 제도에 애써 눈을 감아버리고 있다. 특검이란 게 바로 민간인에게 검사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특검법을 위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국회가 특검법처럼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위 위원 한명(유족들의 특별법안에 따르면 판사·검사·변호사의 직에 10년 이상 재직한 자)에게 검사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무런 법적 걸림돌이 없다. 이와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행정부의 권한인 수사·기소권을 입법부에 넘겨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는 입법부 소속이 아니라, 특검처럼 독립기구로 운영되는 것이다.(엄밀히 기소권은 행정부가 전적으로 독점하는 권한도 아니다. 현행 법체계는 재정신청 제도를 통해 사법부인 법원에도 일정한 기소권을 부여하고 있다.)
최근 들어, 피해자인 유족들에게 수사·기소권을 주는 것은 현형 법체계에서 금지된 ‘자력구제’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다. 이는 자력구제(또는 사력구제)의 뜻도 제대로 모르는 주장이다. 이때 자력구제란 국가만이 행사할 수 있는 형벌권을 개인이 사적인 물리력을 써서 직접 실현하는 행위, 예를 들어 범죄자를 응징한답시고 흠씬 두들겨 패거나 납치해 가두는 따위의 행위를 뜻한다. 유족들이 이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력구제 논리를 펴는 이들은 아마도 ‘사인 소추(기소)’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인 소추는 피해자나 제3자가 증거를 수집해 가해자를 직접 기소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만이 기소권을 가지는 우리나라에선 낯선 제도다. 일부에선 복수심에 의한 기소를 허용하는 이상한 제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영국 등 영미법계 나라들에서 오래 지속돼왔고 독일·프랑스 등 대륙법계 나라들도 부분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제도다.(앞서 소개한 대로 스티븐 로런스의 유족들도 이 제도를 이용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세월호 유족들이 직접 기소권을 갖자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법률로써 구성된 독립된 진상조사위에 기소권을 주자는 것이므로 이는 사인 소추와 거리가 멀다.
나아가, 유족들의 요구대로라면 ‘사적 재판’을 허용하는 셈이 된다거나 사법권을 침해하게 된다는 주장마저 나오는 모양이다.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진상조사위에 아무리 수사·기소권을 줘도 재판은 엄연히 법원이 하게 된다. 유족들은 결코 재판권을 요구한 적이 없다.
유족들이 일부 추천권을 가지는 진상조사위 위원에게 수사·기소권을 부여하면 수사·기소의 공정성이 침해된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수사·기소의 공정성은 (로런스 사건에서 보듯) 수사 주체가 용의자 쪽에 치우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용의자 쪽에 유리하도록 수사를 대충 하거나 증거가 나와도 눈감는다면, 사건은 묻히게 되고 이를 바로잡기란 매우 어려워진다. 역으로 수사 주체가 피해자 쪽에 유리하도록 수사를 열심히 한다면? 이는 오히려 모든 수사 주체에게 요구되는 바다. 국가의 형벌권 행사 자체가 죄에 대한 응보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혹여, 의욕이 앞선 탓에 수사 대상자의 인권을 침해한다거나 증거를 조작하는 등 불법적인 수사를 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선 법원의 영장심사나 언론의 감시 등 견제장치가 늘 작동하고 있다. 결국 수사 주체가 유족들의 뜻을 받들어 무리한 수사를 하지 않겠냐는 논리는, 범인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강철중 같은 형사나 검사는 수사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논리나 마찬가지다. 수사 주체가 피해자로부터 완전히 절연돼야 한다면, 국민 모두가 피해자인 수많은 공익침해 사건(뇌물·국고횡령·조세포탈 등)은 누가 수사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청와대·정부가 조사 대상인 만큼 오히려 대통령과 여당이 수사 주체 선정에 개입하는 게 더 중요한 공정성 문제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청와대가 조사 대상이 됐던 ‘내곡동 특검’ 때 야당이 특검 추천권을 가졌던 건 그래서 순리인 것이다.
3.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지금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유족들은 18년이 지나도 진실의 발끝에조차 당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치부가 영영 가려지기를 원하는 것일까. 유족들이 지쳐 쓰러져 세월호의 기억마저 침몰하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지금 사태의 배경에 그런 냉혹한 계산이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