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농투성이의 짧은 전원일기
어렸을 때의 꿈은 논밭이 있고 큰 황소가 있는 집이었다.
해방 3년 뒤 바늘 하나 꼽을 땅이 없는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굶기를 밥 먹듯 했으며, 어린소견에도 논밭과 황소가 있는 집은 잘 살았으니 철들기 무렵의 희망이 바로 논밭과 황소였다.
그러다가 여덟 살 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어머니 손을 잡고 고향 촌 동네나 다름없는 왕십리로 올라와 그때부터 60년을 서울에 살았으니 이제는 짝퉁이 아닌 진짜 서울사람이 되었다.
초중학교시절 선생한테 불려나가서 상장을 받아보지는 못 했지만 그런 대로 공부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선 지긋지긋한 대물림의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볼 것도 없이 고등학교만 나와도 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공고전기과로 진학을 하였고 공고전기과학생들의 꿈인 한전에 들어가서 끔찍한 가난에서는 벗어났다.
한전생활 26년차에 살고 있는 헌집을 헐고 연립주택을 지으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악덕공사업자에게 속아 넘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기가 힘들었고, 때마침 김영삼 정부 마지막 해 IMF의 예비파고가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하자 한전에도서 어떻게든 직원들을 내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서 난리를 치니 이래저래 뭣이 명예로운지는 모르겠으나 평생을 바치려고 했던 한전을 정년 10년 남겨놓고 아주 명예로운 명예퇴직을 했다.
공사업자에게 사기 맞은 것은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법적으로 맞서서 간신히 땅값만 건졌다.
그동안 알뜰하게 모으고 저축해서 마누라와 아이들은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조그만 상가주택에서 나오는 임대료만 갖고도 살만하였다.
퇴직금으로 집을 더 키우자는 마누라에게 눈을 허옇게 흘겨 떠 일언지하에 묵살하고 내 어렸을 때 꿈이고 어머니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인 농촌생활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김포(현재는 김포시 통진읍)의 농가주책 한 채를 사 들였다.
대지가 500평 가까이 되었고, 통신공사(현 KT)를 다니다 정년퇴직을 한 분이 헌 집을 사서 20평정도의 깨끗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이 농촌사람들과 어울리기는커녕 한 여름에도 하연 모시옷을 빼 입고 붓글씨만 쓰며 동네사람들과는 상종을 안 하여서 동네에서 인심을 잃어 도저히 살 형편이 안 되어 할 수 없이 집을 팔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와 집을 사고 나서 동네 노인들한테 들은 얘기다.
마누라의 집에서 30분이면 차로 오갈 수 있는 거리이고, 나보다도 마누라와 그 친구들이 더 좋아했다.
이사를 하자마자 동네 일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그 당시까지는 수도가 안 들어오는 동네여서 집집마다 전기펌프를 사용하고, 논 밭에도 관정을 파서 전기펌프로 물을 끓어 올리는 데 전기를 좀 아는 사람으로서 너무 위험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집만 새집이고 2-3십여 호 되는 동네 집들은 박정희시절에 새마을과 농촌주택 개량사업을 한답시고 슬레이트를 얹은 옛날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집 안에 스위치 하나만 고장 나도 시장 길에 있는 전파사를 불러오면 1000원짜리 스위치를 바꿔주고 10,000원을 받아가고 하는 판에 그걸 집집마다 찾아다니고 불려 다니며 고쳐주니 동네에서 따돌림은커녕 제발 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다음번에는 이장도 하라고들 하였다.
참으로 동네 분들과 잘 지냈다.
헌데 경증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가 한 2년은 옛날 농사지으셨던(소작) 버릇이 있으셔서 마당가에 푸른 색 식물이라는 것은 풀이건 채소건 손으로 뽑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2년이 지나자 중증치매가 되어 물 논이고 도랑이고 가시덤불이고 가리지를 않고 돌아다니시니 도저히 농촌생활을 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렇다고 마누라와 아이들이 있는 서울 집과 왕래를 끊고 24시간 어머니만 감시하고 있을 수도 없고, 또 서울에 볼 일도 많으니 도저히 2중 살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가슴이 쓰리지만 농가주택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네 분들이 다 “왜 떠나느냐!”고 아우성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농가주책을 처분하여 다시 마누라한테 두 손 들고 무릎 끓고 빌면서 서울 집으로 어머니와 함께 무조건 항복을 하고 투항했다.
재수가 있는 옹녀는 넘어져도 삐죽 튀어 나온 돌부리에 위에 거기가 맡 닺겠끔 넘어지고, 재수가 없는 변강쇠는 넘어져도 바짝 마른 밤송이 위에 넘어지는 법이다.
팔고 나니 바로 “김포 신도시” 계획이 발표되어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하지만 이미 내 손아귀를 벗어난 새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가다 그 동네에 들러 이미 상노인이 되신 내 농사일의 선생님이셨던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한다.
가 뵐 때마다 한 분 씩 줄어든다.
몇 개의 농사사례만 열거한다.
[ 참외농사 ]
어렸을 때 기억가운데 떠오르는 최초의 기억이 참외밭이다.
첫 사랑이 머릿속에서 안 지워지듯 첫 기억도 마찬가지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때일 것 같다.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초여름(?) 참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참외밭 가운데에 혼자 서 있는데 서편하늘을 하얗게 뒤덮은 비행기 떼가 북쪽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 것을 어린것이 은행잎만한 손바닥으로 햇빛가리개를 하여 눈을 찡그려가며 넋을 놓고 쳐다본 기억이 있다.
거리 때문에 그런 것인지 비행기 숫자에 비하여 소리는 그렇게 크게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비행기가 뒤덮었던 하늘이 서편이고, 날아가는 방향이 북쪽인 것은 지금 고향마을의 지형에 꿰어 맞춰 생각해보니 그런 것이고, 뒤에 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산비탈 밭이라 보리도 잘 안 되고 해서 그 시절에는 그 밭에 해마다 참외를 심었단다.
일본본토나 오키나와에서 출발해 남해바다 위를 지나 서해 상공을 타고 올라온 B-29폭격기무리가 태안반도 상공을 지나 인천 앞바다를 거쳐 북한지역으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일 게다.
1948년생이니 그 때가 1952년이나 53년도 쯤 될 것이고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반격을 하여 9.28서울 탈환을 한 뒤로 다시 중공군이 개입을 하여 엎치락뒤치락하다 휴전(1953. 7. 27)을 앞두고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유엔군이 소위 말하는 북한의 평양지역을 “융단폭격”하러가는 폭격기 무리였다고 생각된다.
서해바다로 길게 튀어나온 태안반도가 시작되는 당진이니 6.25때 인민군과 중공군이 훑고 간 지역으로 나도 어머니 등에 업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고 하는데 그 밖의 6.25에 대한 기억은 떠오르는 게 없다.
내 추측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것 빼놓고는 그 시절 한국 상공에 그런 많은 비행기가 뜰 일이라고는 없을 것 같다.
논밭 농사야 알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뭣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의 항상 배고픈 어린아이에게 여름철에 참외처럼 좋은 먹을거리는 없었으며 수박은 그 당시 가난한 농촌에서는 볼 수도 알지도 못하는 신비의 과일이었고 서울에 올라와서야 수박은 처음으로 보았고 먹어도 보았다.
또한 참외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과일이기도 해서 더더욱 애착이 갔다.
우리 집 할머니 제사상에서는 항상 참외가 좌장이다.
그래서 김포에서도 비록 3년간의 짧은 농사기간 이었지만 수박과 참외는 다른 것은 다 제쳐 놓더라도 해마다 빠트리지 않고 심었다.
이웃집들도 집집마다 참외 몇 포기씩은 꼭 심었다.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집안 식구들의 여름철 별미거리였다.
참외농사는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나의 지도 선생님 이었다.
물이 잘 빠지는 곳에 심어야 한다기에 밭을 높여 도랑을 내어 그대로 했다.
순을 지르라는 대로 질러주었더니 줄기가 잘 퍼져나갔다.
손가락 끝으로 순을 지르다가 어느 정도 지나면 낫으로 쳐내야 된다.
참외가 땅바닥에 직접 닺지 않도록 볏짚을 깔아주거나 그냥 두어도 된다.
어려서 비행기를 바라보았던 참외밭에는 보리 집이 깔렸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는 익은 참외만 골라 따 먹기만 하면 된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 먹었던 애들 머리통만 하게 크고 누런 물이 꽉 차있던 개구리참외도 꼭 심어보고 싶었지만 씨앗이나 모종을 구할 길도 없었고, 또 개구리참외 모종이라고 파는 것들도 어렸을 때 그 개구리참외하고는 겉모양과 무늬만 비슷할 뿐 속 내용은 한참 다른 요샛말로 “짝퉁”이었다.
그런데 맛이 문제였다.
이웃집 참외는 말 그대로 꿀참외나 설탕참외인데 우리 집 참외는 오이가 형님 아우 하자고 했다.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몇 입 베어 물어 맛을 보고는 깔깔대며 주저주저하다 어렵게 그 비밀을 알려준다.
사람 똥(인분)을 안 주어서 그렇단다.
참외는 밑거름으로 푹 썩은 똥물을 충분히 주고 흙을 두둑이 덮은 다음 그 위에 심어야 잘 자라고 감칠맛이 난단다.
우리 집은 뒷간이 수세식이어서 썩은 똥은 고사하고 싱싱한 똥도 없으니 이웃집 재래식 뒷간의 묵은똥을 얻어다 써야했다.
그래서 비록 3년간이었지만 철 깡통 똥 장군도 져봤다.
한전에 계속 다니고 있는 친구들이 놀러 와서 참외밭 가운데 원두막 겸 평상에서 내가 기른 닭과 오리를 볶아놓고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한 친구가 불쑥 “야 저 참외는 너희 식구끼리만 처먹으려고 맛도 안 보여 주는 거냐?”고 냅다 소리를 친다.
겉으로 보기에 노랗게 익어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일 때였다.
“그래? 맛 보여주지!”
가장 잘 익은 놈으로 하나 따서 거칠게 깎아 시치미 뚝 떼고 그 친구 앞으로 밀어놓았다.
한입 베어 물고 어석어석 씹던 그 친구가 “야 무슨 놈의 참외 맛이 이 따위야?, 이건 오이만도 못해!” 하면서 들고 있던 참외를 따온 밭으로 다시 집어 던졌다.
“야 이놈아! 저 참외는 입으로 먹는 참외가 아니라 눈으로 먹는 참외야!”
내 대답을 듣고 난 친구들이 모두 다 깔깔거렸고 그 친구들에게 그 까닭을 설명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찬찬히 운전을 잘한다고 해도 차가 굴러가는 뒷모습만 봐도 초보운전자 티가 나듯 농사일도 그랬다.
하지만 그 맛없는 오이형님 참외가 설탕참외보다 더 쓸모가 있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근심걱정이라고는 없는 신선이 되어있으니 보살핌도 할 겸 친구삼아 70대의 작은어머니가 함께 와 계셨다.
젊어 신혼시절에는 한 지붕, 한 시아버지, 한 시어머니 밑에서 형님 아우하면서 친자매같이 지냈던 동서 사이이다.
그 참외를 익기 전 풋 참외 일 때 따서 깨끗이 씻어 속을 발라내고 고추장과 된장독에 박아놓으니 고기맛보다 나은 장아찌가 되었다.
이래서 집안에는 연세 드신 어른이 있어야 하나보다 생각했다.
아무리 잘 자란 참외넝쿨도 장맛비를 맞고 나면 잎이 사그라진다.
꼭 비닐하우스가 아니더라도 적당히 비 가림을 해 주면 서리가 내릴 때까지 줄기차게 따 먹을 수가 있다.
혹시 공해 때문에 산성비가 내려서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수박농사 ]
참외는 애착이 가서, 수박은 어렸을 적 고향에서는 이름만 들어 보았고 서울 올라와서도 과일가게 진열된 수박을 보고 침만 꼴깍 삼켰지 아무 때나 먹어 볼 수가 없었던 신비의 대상이어서 심어보고 싶었다.
수박은 덩치는 큰데 참외와 달리 아주 까다롭다.
이웃집은 물론 인근 어디에도 수박을 심는 농가가 없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김포라고 해서 수박농사가 안 될 리는 없겠지만 저 따뜻한 남쪽지방과 경쟁해서 경쟁력이 없고, 김포는 농토가 비옥해서 수박보다 더 경제성 있는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유리하고, 토질도 수박재배에 썩 좋은 토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참외에 비해 까다로운 수박농사는 아예 짓지도 않았고 먹고 싶으면 사서 먹는 것 같았다.
사서먹는 수박에 붙은 생산지를 보아도 대부분이 저 남쪽지방들이다.
그러니 수박농사는 가르침을 받을 마땅한 선생님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독학으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점에 가서 “수박재배기술 ; 강영모 편저”라는 책을 한권 사 들고 와서 읽기 시작했다.
조금 부풀리고 모양내서 표현을 하자면 주경야독(晝耕夜讀)이다.
그런데 이 책은 수박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수박전업농사꾼을 위한 책이라서 육묘에서 생산 출하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가며 자세히 설명한 책으로, 책의 대부분이 시설(비닐하우스)재배를 하는 방법에 편중되어 있고 노지재배는 별로 비중 있게 다루지를 않았다,
기술된 농사용어나 비닐하우스에 쓰이는 자재이름들도 거의 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말들뿐이어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큰 도움은 안 되었지만 그런대로 수박을 열리게 하는 방법은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가 있었다.
다 건너뛰고 간단히 요약해서 참외는 처음에 나오는 순을 첫마디에서 질러주면 네댓 갈래로 줄기가 갈라져서 퍼져 나가고 또 그 줄기에서 새끼 줄기가 퍼져나고 하여 덩굴을 이루고 한 포기에서 수도 없이 많은 참외가 열리는데 수박은 전혀 달랐다.
딱 한줄기만 “──”자로 기르고 적당한 마디에서 “아들줄기” 하나만 남겨놓고 모든 줄기를 다 질러줘야 하며 15∼20 마디 사이에서 딱 하나만 결실을 맺게 해서 그것만 키우고 수확을 해야 한단다.
하나 남겨놓은 아들 줄기에 수박을 하나 매달았다가 두 주먹 합친 것만큼 크면 따내라고 했는데 그 자세한 이유는 지금은 잊어버렸다.
아들줄기에 붙은 천덕꾸러기인 곁다리 수박은 큰 수박이 너무 비대해져서 수확하기 전에 터져버리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는 않다. 다 커서 며칠만 있으면 따 먹으려고 마음먹었던 수박이 저절로 터져서 못쓰게 된 경우도 많았다.
15∼20마디 이전의 마디에서 결실한 수박들은 큰 밤톨만한 시점에서 따내야 한다. 즉, 수박 한 포기에 수박 딱 하나만 매달리게 해야 제대로 된 수박을 얻을 수가 있단다.
수박이 열리는 암꽃은 이른 아침(5 ∼ 9시 사이)에 핀다.
키우려고 마음먹은 수박은 이때 수꽃을 따서 그 꽃가루를 암꽃의 가운데에 정성들여 털어 넣고 비벼 대서 수정을 시켜주어야 한다. 농약을 많이 사용하여 농촌에서도 벌 나비가 그렇게 흔치가 않고 개화하는 그 두세 시간을 놓치면 바로 꽃이 오므라들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수정을 시켜주는 것이 확실하다.
신기한 것은 아침에 나가보면 밑에는 하얀 솜털이 빼곡히 솟아난 콩알 만 한 수박을 매달고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오른 암꽃이 수정을 시켜주고 나서 저녁 해질 무렵에 가보면 180도 밑으로 고개를 꺾고 수박크기가 하루 낮 사이에 밤톨 크기만 하게 부풀어올라있고 꽃잎은 이미 시들어 있어 수박이 커져가는 속도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키우려고 마음먹은 암꽃(착과한 꽃) 옆에는 비에 씻기지 않도록 유성매직펜으로 프리스틱 푯대에 개화일(착과일)을 표기하여 두는 것이 좋다.
수박은 개화일로부터 45 ∼ 50일 사이에 가장 좋은 과일이 되며 이때 따야 제대로 된 맛있는 수박을 기대할 수 있단다.
전문 농사꾼에게도 개화일을 표기하여 두라고 권한 것을 보면 겉으로만 보아 잘 익은 수박(착과 후 45 ∼ 50일 사이의 수박)을 가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하물며 나와 같은 초보에게 있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쩌다 개화일을 표기해 놓지 않았거나 표기한 것이 유실되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따 보면 덜 익었거나 너무 오래되어 속이 골아 있었다.
이러니 수박농사는 매일같이 곁줄기가 자라나오는 것을 잘라주어야 하고, 키울 수박이 아닌 것은 속아내야하고 이리저리 살필게 많으니 참외와는 달리 밭에 붙어있다시피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참외와 같이 내 팽개쳐 두어도 죽지 않고 자라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박 한 포기에 참외크기만한 수박 서너 개는 딸 수가 있다.
참외농사의 선생님이 되어주셨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번에는 거꾸로 우리 집에 와서 나한테 수박농사 선생님이 되어 달란다.
평생을 농사일로 늙어온 자기들도 이렇게 크게 수박을 길러보지 못했는데 생판초보가 이게 웬일이냐고 야단들이었다.
물론 이웃집들도 더러는 집 주변에 수박을 한두 포기를 심은 집이 있기는 했지만 위에서 말한 참외 크기 만 한 수박이었다.
혹시 도시생활이 싫증나 농촌으로 내려가거나 전원주택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재미삼아 참외 농사는 지어보되 수박농사는 하지 마시라!
그냥 사서 먹는 게 훨씬 싸고 맛도 좋다.
물론 돈을 따지는 게 아니고 재미삼아 짓는 농사에 싸고 비싸고를 따질 것은 아니지만 꼭 수박을 심어보고 싶다면 그냥 참외와 비슷하게 기르는 편이 속편하고 재미도 있을 것이다.
[ 미물들의 놀라운 능력 ]
요사이 지구촌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 참혹한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중남미 아이티는 몇 년 전에 전 국토가 쑥밭이 되다시피 한 지진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지구상에 지진에 절대 안전지대란 없겠지만 지진에 관한한 한반도는 축복 받은 땅인 것 같다.
지진이 일어났다는 외신을 전할 때 마다 뒤에 곁들여 전해오는 얘기가 동물이나 물고기들의 지진감지 초능력(?)이다.
미꾸리, 메기. 자라, 곰, 코끼리 등 종류도 다양하고 이야기도 각각이다.
여름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농가주택 앞에서 손바닥으로 눈곱을 비비며 밭을 바라보면 땅이 불룩거리며 흙이 거북등 같이 갈라져 솟아오르며 꿈틀꿈틀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두더지가 땅속의 벌레를 잡아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 것이다.
두더지가 작물의 줄기나 뿌리를 갉아 먹지는 않지만 흙을 들쑤셔 놓고 나가니 작물이 뿌리가 끊기거나 뽑혀 통째로 말라 죽는 것이다.
그러니 두더지를 안 잡을 수가 없다.
몇 번 삽을 들고 총알같이 튀어가서 들썩거리는 부분을 내리찍어 파헤쳐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하루는 이웃집 영감님이 그 장면을 보더니 깔깔 웃으며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못 잡는 단다. 그러면서 두더지 잡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두더지는 땅속 깊이 판 굴속에 숨어 있다가 아침이 되면 지표 가까이 올라와 흙을 헤집고 앞으로 나가며 땅속의 벌레를 잡아먹는단다. 배가 다 차면 다시 굴속으로 되돌아가는데 지표상의 미세한 진동만 느껴져도 겁을 먹고 헤집고 왔던 길로 잽싸게 되돌아가 굴속에 처박혀 버린단다.
그 땅속 굴은 깊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 두더지를 잡자고 그것을 다 파헤치다보면 밭이 몽땅 망가지고 삽으로는 어림도 없단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손 닺기 알맞은 곳에 항상 삽을 2자루 준비하여 놓고 있다가 두더지가 흙을 들썩거리며 나가는 것이 보이면 삽 한 자루를 살그머니 움켜쥐고 가급적 신발을 벗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조용히 걸어가서 앞으로 파고 나가는 1∼2미터 뒤에다 번개 치듯 삽을 깊숙이 꼽아 놓으란다.
즉, 퇴로를 차단하라는 얘기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삽 한 자루로 파헤치면 두더지를 잡을 수 있단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 봤더니 100발90중이었다.
조급한 생각에 발을 조금만 세게 내 딛어도 그 순간에 허탕이 된다.
촌 동네라고는 하지만 마을 뒤편으로 차량통행이 빈번한 차도가 지나가고 있고 각종 농기계와 경운기 오토바이 등이 수시로 운행을 하고 있어 그런 진동이나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데 발을 조금만 세게 내 딛어도 그 진동은 즉시로 감지하고 퇴각한다.
다 같은 소리나 진동이라도 소리나 진동의 발원지를 알아채고 발원지와 떨어진 거리를 감지해내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는 신비로운 능력(촉각)이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해도 때로는 두더지의 안테나에 감지가 되고, 두더지도 퇴각하는 것이 좀 늦으면 내리찍는 삽에 두더지가 바로 찍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맨몸으로 수비만 하는 두더지가 강력한 무기(삽)로 힘차게 내리찍는 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두더지가 바로 삽에 찍혔어도 등이나 옆구리가 눌려 도망만 못 갔지 가죽이 터지는 경우는 보지를 못했다.
작기는 해도 가죽이 아주 질긴 것 같았다.
일단 파헤쳐져 밝은 햇살아래 들춰져 나온 두더지는 꼼짝도 못한다.
좀 측은 하기는 해도 잡은 두더지를 다시 살려줄 수는 없었다. 두더지를 살려주면 수많은 농작물이 대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두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져도 보았더니 털이 아주 곱고 조밀하고 매끄럽고 고왔다.
가죽표면이 아주 좁기는 하지만 두더지를 다량으로 사육해서 초 고급 모피를 생산하면 어떨까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이웃집 전업농들은 일손이 딸려서 밭에 제초제와 농약을 많이 주다보니 잡초도 없고 벌레도 없고 그러다 보니 두더지도 없는데, 우리 밭은 거의 농약을 안 쓰니 동네 잡초와 두더지라는 두더지는 몽땅 우리 밭으로만 모여드는 것 같았다.
혹시 죽어가는 두더지가 이런 말을 하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언제 지진이 일어나서 떼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까불고 있구나!”
“나는 비록 죽지만 내 처자식들이 또 너와 겨루는 한 판이 있을 것이다!”
또는 이런 말을 하면서 죽어갔을 지도 모른다.
“두더지와 잡초가 없는 세상은 너희 인간들도 살 수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너희 인간들이 잔머리 굴려 짜낸 ‘과학’이라는 것을 가지고 너희들 보다 훨씬 앞서 이 땅덩어리의 주인이었던 풀과 벌레들을 몽땅 죽이려 들지만 그 ‘과학’이 너희들의 목을 겨누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실험실에 두더지를 정중히 초빙하여 지진을 예보케 하는 방법은 없을까?
풀과 벌레와 짐승들과 인간들이 함께 오순도순 사는 길은 없는 것인가?
‘신“이 있고 그가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면, 잔머리 굴리는 인간을 만든 게 ‘신’의 결정적 실수는 아니었을까?
과연 대한민국이, 세계는, 지구와 인류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나도 모르겠다.
<덧 붙이는 얘기>
전원생활!
그거 보고 듣는 것 같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여름에 땀 안 흘리고, 얼굴 하얗게 유지하고, 손발에 흙 안 묻히려고 하신다면 그냥 도시에 눌러 사시는 게 낫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했듯이, 전원에 가면 전원의 삶을 사실 각오를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