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명량 인터넷 강의에 대한 약간의 첨언
1. 고등학생 울딸
'14.8.4 7:50 PM (39.117.xxx.120)명량 인터넷강의 1,2 보고 하는말
임금이 도망다니게 맞는거 아니냐고
역사시간에 왕이 도망다닌얘기가 하도 많아서
도망 가는게 맞는거 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ㅠㅠㅠㅠㅠ2. ....
'14.8.4 8:25 PM (121.163.xxx.51)좋은글 감사합니다
명량에서 나왔던 인물이 다 실존인물이라 좀 놀랬어요
초반에 나오는 배설,일본군 첩자,,다 실존했던 인물이더군요
영화 볼때는 큰뼈대는 논픽셤이지만 세세한 설정은 픽션 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순신 혼자서 왜군을 다 감당하다 나중에 장군들이 주변에 붙었다는 것에 놀랬어요
설민식 님 강의도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3. rafale
'14.8.4 8:38 PM (121.130.xxx.108)제가 영화를 안봐서 그러는데 배설이 좀 찌질하게 나온다면서요?
기록으론 반골기질이 있는 무인이라 찌질과는 좀 거리가 멀어요 ㅇ_ㅇ
칠천량 패전에서 조선 수군을 홀라당 날려먹은 후에 도착한 이순신과 좀 충돌하긴 하는데... 배신 배반 이런것보다는 조정에 대한 불만을 아예 대놓고 표출하기 시작해서 트러블이 좀 났습니다.4. rafale
'14.8.4 8:46 PM (121.130.xxx.108)명량이 실제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지라.. 아직도 이 결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설도 아직 굳어지지 못하긴 했어요. 그러니 분석후 해전 교재로 활용되지도 않고.
로또 같은 결과가 나왔는데 경제학 원론에서 가르칠순 없으니.5. 만시소어
'14.8.4 8:58 PM (175.119.xxx.60)무한도전 역사 관련 특집때부터 느낀 거지만 인터넷 강사들의 역사관은 별로 신뢰할 게 못 됩니다.
1.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입지전적인 인물은 맞으나 그가 권력을 잡는 과정을 보면 신출귀몰한 상상력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처세와 감각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대표적으로 빗츄 타카마츠에서의 빠른 회군이라든지 노부나가 사후 시바타와의 권력다툼에서 보여준 기민한 처세는 토쿠가와와의 교전에서 패배했음에도 토쿠가와가 머리를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간파쿠 취임 과정 또한 상상력이 넘치는 인물이라기보단 현실적인 모습이 굉장히 강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 토요토미가 왜 대륙 진출의 꿈을 가지게 됐는지는 뭐... 자기만이 알겠죠.
참고로 타이코(태합) 뒤에 '전하'라는 수식어는 붙지 않습니다.
2. 16세기 조선의 국방 시스템은 그렇게 부실하지 않았습니다.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이어지는 변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면이 발생한 것은 맞으나, 조선 건국 이래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국가적 전면전은 조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경우였습니다. 건국 초기의 진관 체제로 임진왜란을 맞았으면 시스템 상으로는 오히려 더 비효율적이었죠. 니탕개의 난도 어쨌든 진압에 성공한 게 당시 조선의 방어 체제였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의 시스템은 잘 가동이 되었으나 근본적으로 100여년 가까이 전시였던 일본군과 조선 건국 이래 평화를 누렸던 조선군의 전투력이 같을 수는 없겠죠.
3. 세금 5 ~ 8할은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는데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 한정해도 일본의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나 시행될 얘기였을 얘기를 일반화 시키는 건 말이 안 되고, 센고쿠 시대 일본의 전투 양상이 조선과 극히 달라서 조선에서 고전한 건 맞는 얘기지만, 일본에서는 성을 함락당한 영주는 대부분 자결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오히려 모리와 토요토미의 종전의 경우와 같이 최고 책임자의 목숨을 댓가로 대부분의 생명을 보장해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4. 코니시 군이 평양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던 건 중국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급에 문제가 생겨서입니다. 전쟁에 참여한 타이묘들 개개인의 사정은 여기에 적기엔 너무 방대하니...
5.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 건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죠. 간단화 하면 칠천량으로 진군이 불가능하다고 거부하고 있던 상황에서 원균이 자신이라면 진격할 수 있다고 해서 자리가 바뀌었는데 원균도 막상 앉아보니 진군은 불가능하고... 이순신 말이 맞다는 걸 정직하게 인정하면 간신히 얻은 자리에서 내려와야겠고... 가면 질 것 같고... 권율은 도원수라 나보다 직급이 높고... 근데 갈 수 있다고 했고... 권율은 안 가니 때린 거고...
인터넷 강사들이 일반 역사학자보다 흡입력은 좋겠지만 그 정확성 면에서는... 뭐 저도 일개 미미한 범인에 불과합니다만.6. rafale
'14.8.4 10:03 PM (121.130.xxx.108)만시소어//
잘봤습니다. 저역시도 오류가 있는 점을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쓰면 역시 틀리기 마련이라...
태합 전하가 잘못된 호칭일수 있다는 얘기는 동의합니다. 아무래도 외국 호칭이다보니...
뛰어난 상상력은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건 말꼬리 잡기에 불과한듯 해요.
빗츄에서의 회군 역시 머리가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최우선 목표가 달라졌다는걸 인식하지 못했을거고. 시바타와의 권력다툼에서 전략 역시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시즈가타케에서의 빠른 회군 역시 그런 예죠. 노부나가 휘하에 있을때 하룻밤에 성을 쌓은 일들 역시 좋은 예가 될겁니다.
2.16세기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부실하지 않았다에 첨언을 하자면... 소집 측면에선 잘 작동했습니다만.. 전쟁시 몇가지 문제가 발목을 잡습니다. 북부의 제승방략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전투시행세부 규칙이 메뉴얼로 잘 정리된 반면 남부의 제승방략은 메뉴얼이 없어서 큰 혼란을 겪습니다. 이일이 상주에 내려와 보니 이미 소집된 병력이 이일을 기다리다가 다 도망간다던지. 신립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겪었습니다.
또한 장정 대비 군관이 부족한 문제는 두고두고 야전에서 발목을 잡았습니다. 병력의 통제가 안되서 신립은 회전을 중시했고 용인 전투에선 2천명에 불과한 와키자카군에게 약 5만. 칭하기론 10만이라고 헀던 대군이 패주해서 소멸합니다. 소집 시스템이 잘 가동했다고 해서 시스템이 잘 가동된게 아닙니다. 게다가 고대전에선 라인을 사수하는 모루 역할의 부대가 필요한데 방패수 역할을 기피하던 풍조는 왜란 이전에도 심했습니다.7. rafale
'14.8.4 10:07 PM (121.130.xxx.108)-실제로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의 시스템은 잘 가동이 되었으나 근본적으로 100여년 가까이 전시였던 일본군과 조선 건국 이래 평화를 누렸던 조선군의 전투력이 같을 수는 없-다는 핑계가 적전 도주와 5만명이 2천명의 유인후 돌격에 녹아내린 부분을 설명하진 못합니다. 전쟁은 항상 결과에 따라 설명해야 합니다.
3. 세금 5~8할이 무슨 얘긴지 모르신다면 오공오민의 비율이 영주가 선정을 베푸는 한 예로 잘 설명되었던 기록들을 찾아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특히 영주의 치안이 확립되지 못한다거나 폭정을 하는 경우. 여러명이 세금을 걷거나 해서 세율이 7,8할까지 올라가는 끔찍한 지대도 있었습니다.
이 문화충격은 점령군이 경상도에서 민심을 잡겠다며 오공오민의 '선정'을 베푼 결과 경상도 농민들이 농사를 안짓는 결과로 나옵니다.8. rafale
'14.8.4 10:11 PM (121.130.xxx.108)4.-코니시 군이 평양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던 건 중국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급에 문제가 생겨서- 라는 주장은 임진 왜란의 호기를 놓친 고니시 군에 적용되는 얘기입니다. 보급은 조선이 해주고 있었습니다. 대동강 방어선이 그리 쉽게 무너질줄 몰랐던 선조는 서울 피난보다 더 청야를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쌀을 버리려고 하니 평양 백성들이 크게 반발했거든요.
그덕에 고니시군은 평양 일대에서 10만석의 미곡을 챙깁니다. 그후론 고니시는 평양에 눌러 앉으면서 선조에게 유화책을 펴요. 그 다음의 51일은 70만 대군을 몰고 왔다던 심유경에게 시간을 허비하는 시간입니다. 이 약 석달이 안된 후에야 군량문제가 발목을 잡기 시작합니다. 강사에 맞춘 첨언이니 시간을 놓쳤다는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합니다. 시기를 놓치니 굶었다는건 어차피 강사도 얘기해주잖아요? 제대로 읽어주시길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