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
방금 읽은 이 글을 올려야할지 말지... 하지만, 우리 알아야 하고 같이 느껴야 하지 않겠어요 ?
그 아이들에겐 아무것도 못해줬지만, 남은 아이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
딸 찾은 아버지 ---------------------------------------------------------------------
"기자 양반, 밥은 먹었어? 난 속상해서 술 한잔 하고 왔어."
간간히 눈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던 단원고 실종자 가족 김영오(50)씨가 먼저 안부를 물어왔다.
'세월호' 침몰 9일째인 24일 오후 진도체육관 정문 앞이었다.
"담배 필 줄 아는가? 내가 너무 답답해서…."
체육관 주차장 한 켠에 쪼그려앉은 김씨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참동안 먼 산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오늘 딸 보고 왔어. 내 예쁜 딸…. 너무 곱더라."
이날 164번 시신 인양소식을 듣고 부인과 한걸음에 팽목항으로 달려간
김씨는 딸의 얼굴을 보고 곧바로 자기 딸인줄 확신했다.
살아있는 딸이 잠시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김씨는 곧 깨어날 것만 같은 딸의 얼굴과 손, 발을 차례로 어루만졌다.
"우리 딸 살아나라, 살아나라."
김씨는 딸의 차가운 몸을 정성스럽게 문지르고 주물렀다.
"손을 만지니깐 손가락 마디마디 하나가 살아있을 때랑 똑같애.
그래서 주물러줬다니깐. 살아나라고…. 다 만져줬어.
얼굴도 아주 깨끗해. 아이고 우리 애기, 우리 애기…."
김씨의 섬세한 손동작은 아직도 시신 안치실에 누워 있는 딸을 만지고 있는 듯했다.
"분명히 질식사라고...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부검하고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차마 하지 못해
"내가 그걸 좀 알고 싶어."
"무엇을요?"
"부검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나는 갔을 때 시신이 딱딱하게 굳어 있을 줄 알았어. 근데 너무 부드럽더라.
애 엄마가 너무 놀랬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너무 궁금하다 이거야. 분명히 질식으로 죽었을 것 같애."
그는 딸의 시신이 너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는 데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부검하실건가요?"
한참동안 멍하니 땅바닥을 응시하던 김씨는 금세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최대한 버티다 버티다 저체온증으로 죽었을 거야.
나는 애가 얼어서 죽었는지, 질식해서 죽었는지 알고 싶어.
그런데 하지 못하는 이 심정을 누가 알겠냐고. 두 번 배 가를 수는 없잖아.
얼마나 무서워서 엄마, 아빠 찾다가 죽었을까…. 그런데 또 칼을 댄다? 말도 안 되지."
차마 부검을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의 얄궂은 처지를 원망하는 듯했다.
그는 "분하고 억울하다"는 말을 수십번도 더 되뇌었다.
그가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곳은 마땅히 없었다. 그는 "정부한테 가장 분하다"고 했다.
"물살이 세서 당장이라도 못 구하러 들어간다면 공기라도 넣어달라고 했잖아.
그렇게라도 연명하다보면 언젠가는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거라고….
내가 단상에 올라가서 해경 사람, 정부 사람들한테 소리쳤던 것도 그런 확신 갖고 있었으니깐.
그게 맞았어. 분명히 죽은 지 얼마 안 됐어. 공기라도 넣어줬더라면, 공기라도…."
안타까운 마음에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애꿎은 담배꽁초만 땅바닥에 꾹꾹 문질렀다.
"정부 늑장대응, 그리고 계속 '앉아 있어라, 앉아 있어라'
한 선장, 또 전원 구조됐다고 오보 낸 놈, 전원 구조됐다고 처음 발표한 놈,
치가 떨려. 처음부터 긴급상황이라고 알려졌더라면 더 많이 구했을 거 아니냐고."
"살아서 너무 착했던 딸, 갈 때까지도 착해"
김씨는 현대자동차 협력업체 노동자다.
야간 교대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한 그는 딸이 수학여행 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사고 소식이 전해진 날에서야 아내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
"내가 용돈 줄 것 뻔히 아니깐, 나한테는 수학여행 가는거 말도 안 꺼냈어."
딸은 아버지의 어려운 주머니 사정까지 생각할 줄 아는 철든 아이였다.
"명절 때 받은 용돈도 있고, 자기 돈 있으니깐 애 엄마한테도 용돈 안 받겠다고 했대.
그래도 애 엄마가 안쓰러워서 3만원 줬대. 마지막 수학여행인데,
뒤돌아서 안쓰럽고 해서 2만원 더 줬대. 다른 애들 사는 옷 한벌 안 사입고 갔어.
미리 알았으면 빚을 내서라도 좋은 옷 사입히고, 용돈도 넉넉히 줬을 텐데. 그게 너무 한스러워."
흔히 겪는 사춘기 히스테리도 없었던 딸이었다.
"맨날 뒤에서 꼭 껴안으면서 뽀뽀하고 그랬어.
친구들이 '너는 어떻게 길렀길래 딸이 저렇게 애교가 많냐'고 부러워했어."
김씨는 생전 딸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띄었다.
딸의 웃는 모습이 제일 생각난다고 했다.
"맨날 '아빠' 하면서 달려와서 웃고…. 인상 한번 안 썼어.
뭐라 해도 웃으니깐 싸울 일도 없어. 웃는 모습, 웃음 소리가 제일 생각나."
"그래도 찾은 것만으로 천만 다행이잖아.
못찾은 사람들 얼마나 많아. 나는 찾았어.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잠시나마 미소를 지었던 자신의 모습이 다른 실종자 가족들에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김씨는 "같이 있는 사람들한테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며 숙연해졌다.
넉넉하게 키우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
여태 자식을 찾지 못한 다른 부모들에 대한 미안함에 무거운 김씨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건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돌아와줘서 너무 고마워.
아까운 딸을 잃었어.
너무 착한 우리 딸,
살아서도 착했던 우리 딸, 갈 때까지도 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