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여부로 좌/우간에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자칭 진보진영에서는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 독재를 미화했다고 맹비난하면서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한 학교에 전화 폭력과 현장 시위를 하고 있는 반면, 보수 진영은 교학사 외 기존의 7종 교과서가 친북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반격합니다. 보수진영은 미래엔 역사교과서 외 3종의 역사교과서에는 3.1운동의 대명사인 류관순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을 들어 류관순을 누락한 의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역사의 영웅 만들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위인전을 애들에게도 읽히지 않았습니다. 다수의 위인이나 영웅들은 정치적 이유, 또는 민족(국가)의 필요에 의해 과장되게 포장되는 경우가 많고 하나의 영웅 만들기를 위해 그 주변의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폐해가 적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박정희가 국민들의 결속과 자기의 정치적 위상을 위해 성웅으로 만들어진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이순신의 부각을 위해 원균이 죽일 놈으로 인식된 것도 불편합니다. 물론 이런 집권자의 정치적 계산에 의하거나, 민족적 결집을 위한 장치로 영웅이 만들어졌다 하여도 이순신이 우리 역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으며, 우리 역사에서 무장으로서 모범이며, 영웅이고, 위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죠.
저는 미래엔 등 4종의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이 류관순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테고, 또 대다수 국민들이 3.1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기억한다는 사실도 모를 리 없을텐데 어떻게 역사교과서에 그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영웅만들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4종의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이 류관순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역사적 사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가공의 인물이거나 조작된 인물, 사실과 다르게 과포장된 인물이지 않을까 의심이 들어 자료를 검색해 보니 류관순이 영웅 만들기로 탄생했다는 글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http://c.hani.co.kr/hantoma/249821
http://c.hani.co.kr/hantoma/249820
또 한국역사연구회 등에서 <류관순은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한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http://blog.daum.net/pipaltree/17179921
이 모든 글들을 읽어 보았지만, 이들의 주장이 설사 사실이라 해도 류관순이 역사교과서에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비중이 없는 인물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더군요. 이들 역사교과서에 류관순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영웅 만들기>의 반작용에 의한 폐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혹 <친일파가 만들어낸 항일영웅>일지라도 류관순이 3.1운동 당시에 행했던 행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행위가 일제와 맞선 나라의 독립을 요구한 것이고, 아버지의 희생과 함께 본인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것은 엄연한 사실인 이상, 류관순이 3.1운동의 아이콘으로 인식되는 것이 무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의 친일을 숨기기 위해 류관순을 이용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 이미 숨지고 난 사람이 그런 이용을 당했다고 해서 폄하되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지요.
제가 류관순은 3.1운동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류관순의 재판 기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재판 기록은 사실을 그대로 기술했다고 보아도 무방함으로 류관순의 항일행적은 재판 기록이 보증한다고 해도 되겠지요.
류관순 외 10인의 <경성복심 판결문 전문>에서 류관순과 관련된 부분만 옮겨 보겠습니다.
[경성복심 판결문 전문]
대정 8년 형공(刑控) 제513호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학생 유관순(柳寬順)
18세
-. 피고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를 징역 3년에 처하고, (중략)
-. 피고 유관순은 재 경성(在 京城) 이화학당(梨花學堂) 생도인바 대정 8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각처를 행진하며 독립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 동월 13일 귀향하여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竝川)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꾀하고 자택에서 태극기(구 한국 국기 압수 영 제1호)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하오 1시경 동 시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천 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전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하였고 (중략)
-. 전시(前示) 피고 등이 이와 같이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 그곳에서 약 50보 거리의 철천 헌병주재소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매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냈으며 피고 유관순의 부(父)이며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柳重權)도 그 피해자의 한 사람~ (중략)
-. 피고 유관순은 ‘병천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을때 헌병 주재소와는 약 50보 거리였는데 헌병이 쫓아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즉사 19명 중상자 30명을 내었고 자기 부친도 살해되었는데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누었을때 자기는 쌍방을 제지키 위해 헌병의 총에 달려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고, (중략)
-. 피고 유관순은 ‘만세를 부른 다음 주재소로 가자 부친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격분하여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대어들다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음을 당할까 보아 그 가슴에 달려들었다’는 요지의 공술과 검사의 헌병 상등병 진 상부(溱 相部)에 대한 조서 가운데 ‘자기는 철천 헌병주재소 재근(在勤)인 헌병인데 판시 일시, 병천 장날 하오 1시 경 만세를 외치며 군중이 대한 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몰려왔기 때문에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아 기총(騎銃)을 발포한즉 일단 물러갔으나 그 뒤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과 남씨(南氏)의 남편이 사망하였다고 하여 약 40명의 군중이 그 시체를 메고 주재소로 다시 몰려와 무엇인가 떠들기에 주재소원 너댓 명이 밖으로 달려 나오자 1천 5백 명 이상의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오고 있었고 소원 5명은 주재소 앞에 정렬하여 있을 때 유리창이 깨졌으며 그로부터 자기들은 사무소 입구 왼쪽 벽에 병렬(竝列)했는데, 군중은 자기들 5명이 소지한 기총에 달려들어 탄약합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며 소장을 끌어 내려하여 권총을 몇 번 발사한즉 군중은 다시 도망쳤는데 그 가운데 피고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고함을 지르며 헌병을 잡고 조르려는 기세를 보였고 조인원은 처음 시체를 밀어 넣을 때 시체와 함께 들어서서 상의를 벗고 소장의 총에 달려드는가 하면 또한 자기의 총에도 달라 붙었고 유관순은 소장의 착의(着衣)에 달라 혈흔이 부착해 있음을 가리키며 군중에게 무엇인가 외치고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고 조인원의 아들은 자기의 뺨을 한번 때리더라’ (중략)
-.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의 제2의 소위는 각각 형법 제106조 제2호에 해당되며 징역형을 선택하고 동 피고 등은 형법 제45조에 따라 병합죄임에 동법 제47조·제10조에 따라 무거운 제2의 죄에 파형할 것으로 동법 제47조 단서의 가중형이 타당하다고 보아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을 각각 징역 3년에 처하고 (중략)
-. 압수물건 중 구 한국 국기 한 자루는 피고 유관순 소유의 제 1범죄 공용물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 2호·제2항에 따라 이를 몰수 (중략)
판결문에 나온 류관순의 행적 정도라면 3.1운동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1987년 6.10 항쟁의 대표 인물을 이한열로 기억하듯이 3.1운동의 대표성을 류관순이 가진다고 해서 저는 별 불만은 없습니다.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해 류관순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그 의도는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3.1운동의 대표성을 띄는 인물을 발굴한 것은 별도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미래엔 외 3종의 역사교과서 집필진은 왜 역사교과서에 류관순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또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류관순의 행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아 그 역사적 가치가 교과서에 싣을 만큼 크지 않다고 본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