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2003년 - 미니 여당의 창당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노대통령을 따르던 영남출신 친노세력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호남색이 강해보이는 낡은 민주당으로선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2]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1년차는 집권 여당이 쇄신을 하냐 마냐로 입씨름을 벌이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3]쇄신을 주장하는 측은 총선 승리를 위해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한 반면 구 호남세력들은 이런 신당창당 수준의 쇄신주장이 호남세력을 비토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아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결국 신당창당 세력(이른바 "영남친노 개혁파")들이 갈라져 나오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사실상 최초의[4] 집권여당 대분열이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떨어져 나온쪽은 집권 여당으로서 신당 창당을 준비했고 남은쪽은 민주당의 간판을 고수하며 야당임을 선언했다.
한편으로 한나라당에서도 당의 보수성을 비판하며 개혁성향의 5명의 의원(이른바 독수리 오형제)들이 탈당해 신당에 합류했고[5] 김원웅, 유시민을 주축으로 한개혁국민정당도 신당과의 합당을 선언하면서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창당된 당이 바로 47석(민주당 탈당파 40 + 한나라 5 + 개혁국민 2)의 열린우리당이었다. 2003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창당.
2.2 2004년 - 탄핵과 승리, 그러나...
사상초유의 초미니 여당으로 출범한 열린우리당은 기존의 1인 대표체제(총재 제도) 대신 여려명의 최고위원을 선출하고 그 최고위원중에 최다득표를 한 사람을 의장으로 뽑는 구조를 택해[6] 2004년 1월 초대 의장으로 정동영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의석수의 한계속에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정치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으로 한나라, 민주, 자민련 3당이 총 연합하여 대통령 탄핵을 가결시키는 바람(3월 12일)에 최대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에 맞서는 장면이 국민들앞에 생생히 중계되면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급상승했고.. 아니 이미 탄핵 전에 급상승 되어 있었고 도리어 탄핵이 그런 불안감을 뒤집으려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판 엎기" 전략이었으나[7], 역풍을 맞았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4월 15일에 열린 17대 총선에서 초기 예상 의석인 70석, 100석을 훌쩍 넘은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8] 제5공화국의 문제많던 1985년 12대 국회의원 총선 이후 최초로 선거로 여대야소를 이루었다. 그러니까 민주화 후, 즉 제6공화국 최초의 여대야소.
그렇게 갑작스럽게 미니 정당에서 거대 정당이 되버리는 바람에 머리는 그대로인데 갑자기 몸만 커진 것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108명에 달하는 초선의원들은 제각기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108번뇌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당의 이념적 노선을 가지고서도 실용이냐 개혁이냐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이런 가운데서 노인폄하발언으로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입지가 약해진 정동영 의장은 김근태 원내대표와 함께 내각으로 들어가버렸고 최고의원중 제2위인 신기남 의원이 2대 의장이 되었다. (2004년 5월 17일) 신기남 의원은 "천(정배)/신/정(동영)" 가운데 하나인 당내 주류 개혁파 의원으로 손꼽혔으나, 부친의 일제 경찰 사실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의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2004년 8월) 그 뒤를 한나라당 부총재 출신 이부영 前 의원(17대 총선에서 낙선)이 이어받았다.
10월 21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좌절되었다.[9] 결국 여당은 다음해 3월 2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의결한다.
한편 내각으로 들어간 김근태 원내대표를 대신하여 선출된 천정배 원내대표의 주도로 소위 '4대 개혁입법'[10]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 국민적 여론은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를 등에 업은 한나라당의 강력한 저지와 당내 갈등으로 합의한 수정안까지도 통과되지 못하고 결국 2004년 연말 통과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개혁입법 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입법이 무산되고 김이 빠진 이 시기(어쩌면 이미 총선 승리에 도취 될 때부터)가 열린우리당의 피크였고 기나긴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해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훗날 폭탄이 될 한미 FTA를 진행시키기로 결정했다.)
2.3 2005년 - 약팽소선에 실패하다; 과반상실과 사학법 직권상정
이부영 의장의 뒤를 이은 임채정 의장의 과도기를 거쳐, 정기 전당대회를 통해 문희상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4월 2일) 그러나 문희상 의장 체제에서도 열린우리당의 난맥상은 달라지지 않았고[11] 국민들은 우왕좌왕하는 열린우리당에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4월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6석을 잃으며 146석으로 과반을 상실했고, 당내에서 갈등이 빚어지면서 문희상 의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역시 7월, 8월 내내 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 하지만 대통령의 표현 대로 한나라당에서 터질 것 같던 "폭탄은 당내에서 터졌"고, 열린우리당은 더더욱 극심한 혼란과 분열로 빠져들었다.
이어 10월 재보선에서도 단 한석도 얻지 못한채 참패함으로서 문희상 체제가 붕괴되고, 급기야 열린우리당은 비대위까지 구성하면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고 원만한 조정자 타입인 정세균 원내대표에게 당 의장을 겸하게하여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다. (2005년 11월) 정세균 의장은 개혁입법중 하나인 사립학교법이라도 통과시키자는 생각에서 사립학교법을 강행처리했지만 열린우리당의 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다수당 강행처리시 지지율 하락"의 공식만이 작동했다.[12]
2.4 2006년 - 지리멸렬
해를 넘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정세균 의장을 내각(산업자원부)으로 불러들였다. (2006년 1월 6일)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출신 유재건 의원이 전당대회까지 임시 당의장을 맡았고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새로 선출되었다.
2006년은 지방선거가 있는 해였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전당대회에서 내각에서 복귀한 정동영 의원을 다시 의장으로 선출했다. (2월 18일) 그러나 돌아온 정동영과 강금실, 진대제 등의 친노계 각료들의 수혈로도 열린우리당의 몰락은 막을수 없었고,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초압승[13]으로 끝났다. 열린우리당은 단 한곳, 전북도지사만 당선되는 캐굴욕[14]을 남겼고 6월 9일 정동영 의장은 다시 사퇴했다.
비슷한 시기, 부산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을 초월한다. 5월 17.1%로 15%인 열린우리당을 넘어선 것. #[15]근데 그런데도 대선 지지율 3%를 얻는데 그친걸 보면...
그 뒤를 이어 전당대회에서 2위를 했던 김근태 최고의원이 의장을 승계했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라는 거창한 위원회를 만들고 경제회복과 사회적 대협약등을 추진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계속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열린우리당의 간판으로서는 더이상 안된다는 위기감이 확산되었고 한나라당의 대권주자인 이명박, 박근혜 후보들의 기세가 갈수록 오르자[16]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연합해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민주당과의 재통합 및 반한나라당 세력들과의 연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탈당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2.5 2007년 - 대붕괴
다음 내용은 무시하고 넘겨도 좋습니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17] 의 탈당에 뒤이어 최재천, 이계안 등의 천정배계 의원 6명이 탈당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133석이 되었다. 이들은 당 밖에서 "민생정치 준비모임"을 결성하고 개혁신당 창당을 바탕으로 한 당내의 김근태계와의 공조를 시도하였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17] 의 탈당에 뒤이어 최재천, 이계안 등의 천정배계 의원 6명이 탈당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133석이 되었다. 이들은 당 밖에서 "민생정치 준비모임"을 결성하고 개혁신당 창당을 바탕으로 한 당내의 김근태계와의 공조를 시도하였다.
2007년 2월이 되자 이번엔 당내 보수그룹인 "바른 정치모임" 등의 김한길계 23명이 탈당했다(1차 탈당). 이로서 열린우리당은 110석으로 127석의 한나라당에게 원내 1당마저 내주게 된다. 이들은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24석)이란 교섭단체를 만들었다. 2월 22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적 정리"란 이름으로 탈당을 선언했다. 아니, 사실상 몰려 쫓겨난 것이지만.
2007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면서 정국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 물론 이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기초의원 1명)한건 안습하지만 동시에 너무 당연한 일이라 일단 넘어가자 민주당의 조순형, 김홍업과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등의 당선으로 " 범 여권 연대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희망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물론 현실은 아시발꿈 "5월 빅뱅설"이 등장했고, 급기야 5월 7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20석으로 창당을 선언했다.
6월이 되자 대거 탈당이 이어졌다. 8일엔 임종석, 우상호, 이강래 등 당내 초,재선 386 의원들 17명(2차 탈당), 15일엔 문희상, 문학진 등 김근태계 16명이 탈당했고(3차 탈당), 그 사이에 김근태와 김희선이 개별 탈당했다. 이들은 7석의 천정배계와 결합하여 43석의 '대통합추진모임'을 결성했다. 6월 18일엔 정동영이 탈당하면서, 이로서 당을 구성하는 두 축인 정동영, 김근태가 모두 탈당한 형국이 되었다.
6월 27일에는 민주당(2005년)과 김한길계의 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쳐져 34석의 "중도통합민주당"이 탄생했으나, 7월 중순 이미 일부가 도로 탈당했다. 7월 24일에는 유인태, 송영길 등 개혁 재선 그룹을 중심으로 15명이 탈당했다. 같은 날 범여권신당 창준위가 발족되었다. 8월 3일에는 도로 김한길계와 김홍업 등이 한달만에 당을 박차고 나가고 당명 "대통합민주신당"이 결정되어 다음날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었다. 의석 수는 84석.
대통합신당은 이름 그대로 정동영계(구당권파) + 김근태계(재야파) + 김한길계 + 천정배계 + 기타 당내 세력 +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 + 시민단체 세력(미래창조연대) 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통합을 선언한 것이다. 좀더 쉽게 정리하면 열린우리당 탈당파와 중도통합민주당 탈당파,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지사 + 시민단체.
2.5.1 대통합신당에 합당되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대통합신당에 동참하기로 하고 내각에서 돌아온 정세균 의장(2007년 2월 선출)과 최고위원들에게 대통합신당 추진을 위임했다. 결국 2007년 8월 18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마지막 전당대회에서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가결했고,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선언을 하면서 열린우리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은 59석은 84석과 통합되어 143석이 되었다.[18]
여담으로 2007년 8월 18일 일산 킨텍스에서는 코믹월드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의 최후는 오덕들에게 포위된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도 유일한 킨텍스 서코 열린우리당 해체 반대를 부르짓는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던 오덕들에게 젊은이들의 궐기를 호소(?)하기도 했지만 그런건 관심없는 오덕들은 소 닭보듯이 하면서 지나갔다고. 심지어 애니갤러 GGG는 폐당 행사 중 "이명박 만세!!"라는 소리를 지르고 도망쳤다고 한다.